IR 덱 50번 수정, 아직도 모자란 기분

IR 덱 50번 수정, 아직도 모자란 기분

IR 덱 50번 수정, 아직도 모자란 기분 새벽 2시, 슬라이드 47번째 또 열었다. IR 덱. 투자자 미팅 3일 남았다. 이번이 26번째 VC다. 슬라이드 3번. "Market Size". 7조에서 12조로 바꿨다가 다시 9조로 내렸다. 숫자가 커야 관심 받지만, 너무 크면 "현실성 없다" 소리 들었다. 지난번에. 4번 슬라이드. "Traction". MRR 그래프. 떨어진 달이 하나 있다. 저번 VC가 거기만 계속 물어봤다. "왜 여기서 주춤했죠?" "일시적 이탈이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냥 전부는 아닐 뿐.커피 한 모금. 식었다. 슬라이드 8번. "Competitive Advantage". 우리만의 차별점. "AI 기반 자동화", "직관적 UI", "빠른 구축 속도". 맞는 말이다. 근데 경쟁사도 비슷한 거 쓴다. 투자자들도 안다. 그걸. 이걸 어떻게 다르게 보이게 만들지. 50번 고쳤는데 답이 안 나온다. 승률 20%, 변하지 않는 숫자 시드 투자 받을 때는 10번 만에 됐다. 프리A는 다르다. 26번 미팅. 5번 투자 검토 중. 승률 19.2%. 덱을 20번 고쳤을 때도 비슷했다. 30번 고쳤을 때도. 지금 50번인데 여전히. 문제가 덱이 아닌 건가. 트랙션이 부족한 건가. MRR 1200만원. 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프리A 치고는..." 말 끝을 흐린다. 투자자들. 시장이 안 좋은 건가. 다들 "시장 상황이..." 한다. 근데 우리 경쟁사는 최근에 30억 받았다. 결국 우리 문제다.지난주 목요일. 유명한 VC였다. 덱 넘기면서 발표했다. 15분. 연습한 대로. "시장 규모는 충분합니다. TAM 9조, SAM 2.1조..." 파트너가 끊었다. "창업자님, 솔직히 물어볼게요. 지금 번 레이트가 얼마죠?" "월 200만원 정도입니다." "6개월 전에는요?" "150만원이었습니다." 침묵. 5초 정도. "성장은 하고 계시네요. 근데 프리A 타이밍인지는 모르겠어요." 미팅 20분 만에 끝났다. 슬라이드에 없는 것들 집 가는 지하철에서 생각했다. 덱에 뭘 넣어야 하지. 뭘 빼야 하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투자자들이 보는 건 슬라이드가 아니다. 숫자 뒤의 스토리다. 창업자의 확신이다. 근데 나도 확신이 없다. 요즘. 매출은 오른다. 느리게. 고객은 만족한다. 이탈률 8%. 나쁘지 않다. 그런데 왜. 투자가 안 되지. "타이밍이 아직이다." "조금만 더 트랙션을 쌓아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 거절이다. 부드러운.사무실 돌아왔다. 새벽 3시. 슬라이드 12번. "Team". 우리 팀 사진. 개발팀장 경력 12년. 디자이너 전 카카오. 영업 2명 각각 B2B 7년차, 5년차. 좋은 팀이다. 진짜로. 근데 투자자들은 "팀은 훌륭한데요" 하고 넘어간다. 그게 다다. 덱 문제가 아니다. 확실히. 숫자만 올라가는 밤 슬라이드 3번 다시 봤다. Market Size. 9조를 11조로 올렸다. 레퍼런스 3개 더 찾았다. IDC 리포트, 가트너 자료, 국내 리서치 보고서. 근거는 충분하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가. 슬라이드 5번. 고객 케이스. "A사 업무 시간 37% 단축", "B사 월 운영비 420만원 절감". 숫자 예뻐 보이게 인포그래픽 다시 만들었다. 피그마 켜서 1시간. 그런데 이게 중요한가. 슬라이드 9번. Financial Projection. 3년 뒤 매출 50억. 5년 뒤 200억. 시나리오 3개로 만들었다. 보수적, 중립적, 낙관적. 보수적 시나리오도 사실 좀 낙관적이다. 아마. 투자자들도 안다. 이 숫자들이 희망 섞인 계산이라는 거. 그래도 넣어야 한다. 안 넣으면 "재무 계획이 없네요" 소리 들으니까. 덱은 점점 그럴듯해진다. 투자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팀원들 모르는 밤 월요일 오전. 출근했다. "대표님 주말 어떻게 보내셨어요?" "그냥 쉬었어. 너는?" 거짓말이다. IR 덱 슬라이드 6개 수정했다. 토요일 오후 4시간, 일요일 새벽 3시간. 팀원들 몰라도 된다. 아니, 알면 안 된다. 개발팀장은 모른다. 이번 달 월급 나가면 통장에 1800만원 남는다는 거. 다음 달 인건비 4200만원이라는 거. 디자이너는 모른다. 지난주 투자자가 "디자인은 좋은데 비즈니스 모델이 약하다"고 했다는 거. 영업팀은 모른다. 내가 매일 밤 현금흐름표 보면서 "8개월, 7개월, 6개월..." 세고 있다는 거. 대표는 혼자 알아야 한다. 이런 거. 그게 내 일이다. 점심 먹으면서 개발팀장이 물었다. "IR 준비 어떻게 돼가요?" "잘 되고 있어. 다음주 미팅 하나 더 잡혔어." "기대되네요!" 웃었다. 나도. 속으로는 생각했다. '이게 28번째인데 될까.' 밤마다 보는 경쟁사 뉴스 네이버 검색창. "기업용 업무 자동화". 우리 경쟁사 3개. 매일 검색한다. D사. 2주 전에 시리즈A 30억 유치. 기사 5개 떴다. "AI 기반 혁신", "폭발적 성장세", "업계 주목". 우리랑 뭐가 다른가. 솔직히 제품은 우리가 낫다. 기능도 더 많고, UI도 더 직관적이다. 고객 피드백도 우리가 좋다. 그런데 저쪽은 투자를 받았다. D사 대표 링크드인 봤다. "팀원들과 함께 이룬 성과입니다. 투자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좋아요 327개. 부럽다. 아니, 솔직히 질투 난다. E사는 3개월 전 시드 5억 받았다. 우리보다 늦게 시작했다. 트랙션도 우리보다 적다. 그런데 받았다. F사는 작년에 망했다. 런웨이 다 써서.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새벽 4시. 침대에 누워서. 아내가 옆에서 잔다. 딸도 옆방에서. 천장 본다. '덱이 문제가 아니야.' 알고 있다. 진짜 문제가 뭔지. 트랙션이 부족하다. 성장 속도가 느리다. 시장 타이밍이 안 맞다. 아니면 내가 투자자들을 설득 못 하는 거다. 덱을 100번 고쳐도 소용없다.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그래도 고친다. 내일도.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서. 51번째 수정 수요일 저녁. 사무실. 팀원들 다 퇴근했다. IR 덱 다시 열었다. 51번째. 슬라이드 1번. 제목 슬라이드. "기업의 업무 자동화를 재정의합니다." 진부하다. "생산성을 2배로 높이는 자동화 플랫폼." 흔하다. "일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애매하다. 30분 고민했다. 결국 원래대로 뒀다. 슬라이드 16번. "Why Now". "시장이 성숙했습니다", "기업들의 니즈가 높아졌습니다", "경쟁 환경이 유리합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근데 투자자 입장에서는 "그래서 왜 지금 투자해야 하는데?" 생각할 거다. 답이 없다. 이 슬라이드. 그래도 넣어야 한다. VC들이 보고 싶어 하니까. 저장했다. 버전 51. 내일 미팅에서 이걸로 간다. 모르는 척, 아는 척 목요일 오후 3시. 강남 VC 사무실. 회의실 들어갔다. 파트너 2명. "반갑습니다. 저희는..." 15분 발표. 슬라이드 18장. 버전 51. 50번 수정한 그거. 파트너가 물었다. "CAC는 얼마죠?" "고객 획득 비용은 현재 건당 68만원입니다." "LTV는요?" "평균 계약 기간 18개월 기준, 약 930만원입니다." 준비한 답이다. 예상한 질문. "그럼 유닛 이코노믹스는 괜찮네요. 근데 성장 속도가 좀..." "네, 현재는 PMF 확보에 집중하고 있고요, 3분기부터 본격적으로..." "보통 그 말 들으면 우려되거든요. 3분기까지 런웨이는 되세요?" "...네, 충분합니다." 거짓말이다. 8개월 남았다. 3분기까지는 간다. 근데 그 다음이 없다. 지금 투자 못 받으면. "일단 검토해보겠습니다. 연락드릴게요." 30분 만에 끝났다. 엘리베이터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덱 문제가 아니었어.' 혼자만 아는 숫자 사무실 돌아왔다. 오후 5시. 팀원들한테 물어봤다. "오늘 미팅 어땠어요?" "괜찮았어. 관심 있어 보이더라." 웃어줬다. 팀원들도 웃었다. 속으로는 안다. 안 될 거라는 거. 그 투자자 표정 봤다. 질문 톤 들었다. 끝날 때 악수하는 느낌 받았다. 안 된다. 27번째 탈락. 노트북 열었다. 엑셀 파일. "VC 미팅 현황" 27번 줄에 적었다. "보류 (사실상 탈락)". 승률 계산했다. 18.5%. 떨어졌다. 다음 줄에 적었다. "28. K벤처스, 11/24 목요일 오후 2시". 덱 다시 열었다. 뭘 고쳐야 하지. 아내가 모르는 밤 밤 11시. 집 도착. 딸은 잤다. 아내는 거실에 있었다. "오늘도 늦었네." "응, 미팅 있었어." "어떻게 됐어?" "잘 됐어. 긍정적이었어." 거짓말이다. 또. 아내가 물었다. "투자 언제쯤 될 것 같아?" "곧. 한두 달 안에는." 모르겠다. 진짜로. 아내 표정 봤다. 믿는 척하는 얼굴. 아내도 안다. 내가 힘들다는 거. 투자 쉽지 않다는 거. 그래도 안 물어본다. 배려인지 포기인지. 방 들어갔다. 노트북 켰다. IR 덱. 버전 51. 슬라이드 7번. "Problem & Solution". 고객들의 문제. 우리의 해법. 다 맞는 얘기다. 근데 투자자들한테는 안 먹힌다. 왜지. 새벽 1시까지 고쳤다. 슬라이드 4개. 버전 52 저장했다. 내일 또 고칠 거다. 끝나지 않는 수정 금요일 오전. 팀 회의. "이번 주 고생했어요. 다들." 개발팀 스프린트 리뷰. 신규 기능 3개 배포. 버그 12개 수정. 디자인팀 화면 개선안 발표. 전환율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영업팀 리드 8개 확보. 다음주 2건 계약 가능성 높다. 다들 잘한다. 그런데 투자는 안 된다. 회의 끝나고 개발팀장이 물었다. "대표님,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괜찮아. 신경 쓰지 마." "IR 때문인가요?" "아니야. 그냥 할 게 많아서." 거짓말. IR 때문이다. 점심 혼자 먹었다. 편의점. 휴대폰 봤다. 링크드인. 또 다른 스타트업 투자 뉴스. '축하드립니다', '응원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댓글들. 우리는 언제쯤. 오후 4시. 사무실 회의실. IR 덱 프린트했다. 52번 버전. 종이로 보면 다르게 보인다. 가끔. 슬라이드 넘기면서 봤다. 1번. 타이틀. - 괜찮다. 3번. 시장 규모. - 숫자 그럴듯하다. 5번. 트랙션. - 떨어진 달 빼고는 괜찮다. 8번. 경쟁 우위. - 약하다. 계속 약하다. 12번. 팀. - 좋다. 여기는 자신 있다. 16번. Why Now. - 여전히 애매하다. 18번. Closing. - 진부하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 그런데 뭔가 빠진 기분이다. 계속. 투자자들이 원하는 게 뭘까. 숫자? 스토리? 확신? 다 있다. 우리한테. 근데 왜 안 되지. 52번 고쳤는데. 답이 없는 밤 주말. 토요일 밤. 아내랑 딸 재웠다. 거실에 혼자 앉았다. 노트북 열었다. IR 덱. 또 열었다. 슬라이드 1번부터 18번까지 봤다. 고칠 데가 없다. 아니, 고칠 데는 있다. 항상 있다. 근데 고쳐도 똑같을 것 같다. 투자자들 반응. 20% 승률. 덱을 200번 고쳐도 20%일 것 같다. 문제는 덱이 아니다. 트랙션이다. 성장성이다. 타이밍이다. 그걸 안다. 머리로는. 근데 손은 자꾸 덱을 고친다. 다른 걸 할 수 없어서. 트랙션은 당장 못 올린다. 시간이 필요하다. 성장성은 증명해야 한다. 몇 개월 더. 타이밍은 내가 정할 수 없다. 시장이 정한다. 그래서 덱을 고친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커서 깜빡인다. 슬라이드 8번. "Competitive Advantage" 다시 쓰기 시작했다. 53번째 수정.덱은 완벽에 가까워진다. 투자는 여전히 멀다. 그래도 고친다. 54번, 55번... 멈출 수가 없다.

저녁 10시, 회의실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

저녁 10시, 회의실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

저녁 10시, 회의실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 혼자 남는다는 것 10시 넘었다. 팀원들 다 갔다. "대표님 먼저 가세요" 하는 소리가 제일 어색하다. 누가 먼저 가라는 건지. 나도 가고 싶다. "응, 조심히 들어가" 하고 손 흔들었다. 밝게. 리더답게. 문 닫히는 소리 세 번. 개발팀 민준이, 디자이너 수진이, 막내 기획자 예린이. 엘리베이터 소리까지 들렸다. 사무실이 조용하다.에어컨 소리만 웅웅거린다. 누군가의 자판 소리 없다. 슬랙 알림도 안 뜬다. 이제 진짜 나만의 시간이다. 회의실로 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 노트북은 그대로 뒀다. 어차피 라면 먹고 다시 볼 거다. 회의실 문을 열었다. 화이트보드에 오늘 아침 회의 때 쓴 글씨가 남아있다. "Q2 목표 MRR 2000만원". 지워야 하는데 귀찮다. 냉장고에서 생수 꺼냈다. 정수기 물은 이상하게 라면이 맛이 없다. 미신 같지만 그렇다. 서랍에 라면 3개 있었다. 신라면, 너구리, 진라면. 오늘은 신라면. 전기포트에 물 끓인다. 보글보글 소리가 크게 들린다. 낮에는 안 들리던 소리다. 3분. 타이머 맞춘다.기다리는 3분 핸드폰 본다. 슬랙 확인한다. 아무도 없다. 카톡 확인한다. 아내한테 온 메시지.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거짓말이다. 7시에 먹은 김밥 두 줄이 전부다. 그래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딸 재웠어. 아빠 보고 싶대" "미안. 주말에 놀아줄게" 이것도 거짓말일지 모른다. 토요일에 투자사 미팅 있다. 타이머가 울린다. 3분 지났다. 뚜껑 뜯는다. 김이 확 올라온다. 뜨겁다. 좋다.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면이 풀린다. 국물이 빨갛다. 첫 젓가락 후루룩. 맛있다. 이게 오늘 제일 솔직한 순간이다. 낮에는 웃었다. 투자자 앞에서, 팀원들 앞에서, 거래처 사람들 앞에서. "잘 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팀 분위기 정말 좋습니다". 다 연기다. 라면 먹을 땐 연기 안 한다. 그냥 배고픈 36살 남자다. 대표 아니다. 후루룩 또 먹는다.국물이 얼얼하다. 맵다. 땀 난다. 이마가 축축하다. 휴대폰 내려놓는다. 그냥 먹는다. 회의실 창문 밖으로 성수동 야경이 보인다. 건물에 불 켜진 곳 많다. 다들 야근하나 보다.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위로가 되나? 잘 모르겠다. 반쯤 먹었을 때 라면 반 먹었다. 국물도 반 마셨다. 핸드폰 다시 든다. 습관이다. 이메일 확인한다. 스팸 3개. VC 한 곳에서 답장 왔다. "검토 결과 공유드립니다. 현재로서는..." 그만 읽는다. 거절이다. 20번째다. 지운다. 라면 먹는다. 통장 앱 켠다. 운영계좌 잔고 6500만원. 월급 날까지 2주. 급여 4800만원. 사무실 월세 180만원. 세금 600만원. 계산한다. 남는 거 920만원. 다음 달엔 5400만원 입금될 거다. 그럼 6320만원. 다다음 달엔? 그다음 달엔? 8개월. 런웨이 8개월. 한숨 나온다. 라면 먹는다. 차가워졌다. 그래도 먹는다. 국물을 마신다 면 다 먹었다. 국물 반 남았다. 회의실 시계 본다. 10시 23분. 집 가려면 11시는 돼야 나가야 한다. 지하철 막차 시간 계산하면 그렇다. 택시 타기엔 아깝다. 1만 2천 원. 국물 마신다. 짜다. 속이 쓰릴 거다. 내일 아침 위 아플 거다. 그래도 마신다. 이게 오늘의 사치다. 3억 받았을 때 기뻤다. 팀원들이랑 고깃집 갔다. 1인당 3만 원짜리. 소주 많이 마셨다. "우리 잘될 거야" 소리쳤다. 지금은 컵라면 1500원이 사치다. 웃긴다. 웃기지도 않다. 국물 다 마셨다. 컵 바닥 보인다. 쓰레기통에 버린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휴지로 입 닦는다. 컵라면 용기 들고 탕비실 간다. 쓰레기통에 버린다. 손 씻는다. 물이 차갑다. 거울 본다. 누가 봐도 피곤한 얼굴이다. 눈 밑에 다크서클. 머리는 언제 감았더라. 그제? 모레? "괜찮아" 거울 속 나한테 말한다. "조금만 더 하면 돼"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다. 그냥 하는 말이다. 매일 하는 말이다. 회의실로 돌아온다. 노트북 들고 내 자리로 간다. 다시 일한다 모니터 켠다. 엑셀 파일 열린다. 현금흐름표다. 시나리오 세 개 있다. 보수적, 중립적, 낙관적. 보수적 시나리오 본다. 8개월 뒤 파산. 중립적 시나리오 본다. 10개월 뒤 파산. 낙관적 시나리오 본다. 12개월 뒤 손익분기점. 손가락으로 숫자 고친다. MRR 성장률 15%에서 20%로 올린다. 12개월이 10개월로 줄어든다. "이 정도면 되나" 혼잣말이다. 투자 받으면 된다. 프리A 10억만 받으면 된다. 그럼 런웨이 2년 늘어난다. 그 사이 매출 올리면 된다. 되나? 모르겠다. 키보드 친다. IR 덱 연다. 51번째 버전이다. 슬라이드 12장. "Our Traction" 페이지. 그래프 수정한다. 더 가파르게 올라가게. 거짓말은 아니다. 각도만 조정한 거다. 시계 본다. 11시 8분. 막차 놓쳤다. "아 씨..." 택시 앱 켠다. 1만 3천 원. 어쩔 수 없다. 노트북 닫는다. 가방에 넣는다. 불 끈다 사무실 불 끈다. 한쪽씩. 딸깍딸깍. 마지막 불 끄기 전에 한 번 더 돌아본다. 텅 빈 사무실. 8개 책상. 내일 아침 7시면 다시 채워질 자리들. "내일도 화이팅"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나한테? 팀원들한테? 그냥 하는 말이다. 마지막 불 끈다. 문 잠근다. 엘리베이터 탄다. 1층까지 28초.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또 본다. "괜찮아질 거야" 28번째 한 말 같다. 오늘. 택시 안 택시 탔다. 기사님이 말 안 건다. 다행이다. 창밖 본다. 한강 다리 지난다. 물에 불빛 반짝인다. 핸드폰 본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지금 가는 중" 읽음 표시 안 뜬다. 잤나 보다. 당연하다. 11시 반인데. 슬랙 확인한다. 개발팀 민준이가 30분 전에 메시지 남겼다. "대표님 PR 머지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확인 부탁드려요. 푹 쉬세요" 착하다. 고맙다. 미안하다. "고생했어. 내일 봐" 보냈다. 창밖 계속 본다. 차 많다. 다들 어디 가나. 야근 끝나고 가나. 나만 이러는 거 아니구나. 위로가 될까? 잘 모르겠다. 집 앞 집 도착했다. 요금 냈다. 1만 3500원. 팁 포함이다. 현관문 연다. 조용하다. 불 다 꺼져있다. 신발 벗는다. 부엌 간다. 물 마신다. 냉장고 문 연다. 딸이 그린 그림 붙어있다. 아빠 얼굴. 크레파스로 그렸다. 웃고 있다. 나도 웃는다. 진짜로. 방문 살짝 연다. 아내랑 딸 자고 있다. 숨소리 들린다. 문 닫는다. 거실 소파에 앉는다. 노트북 꺼낸다. 또 켠다. 현금흐름표 다시 본다.컵라면이 식어갈 때쯤, 나는 제일 솔직해진다. 그게 하루 중 유일하게 대표가 아닌 시간이다.

아내한테 '힘들어'라고 못 하는 이유

아내한테 '힘들어'라고 못 하는 이유

밤 11시, 집 앞 편의점 집 앞 편의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11시 23분. 아내가 잔다. 딸도 잔다. 들어가면 조용히 씻고 누워야 한다. 그 전에 여기서 맥주 하나. 500ml짜리. 4500원. 오늘 투자자 미팅이 있었다. 세 번째 만남. "트랙션은 좋은데, 번율이 아쉽네요. 조금 더 지켜보고 연락드릴게요." 번역하면 거절이다. 알아듣는다. 이미 열두 번 들었다. 런웨이 7개월 남았다. 정확히는 214일. 매일 계산한다. 직원 8명 월급, 사무실 임대료, 서버비, 마케팅비. 합치면 월 3800만원. 매출은 1200만원. 적자 2600만원씩 쌓인다. 시드 투자금이 녹는다. 눈 녹듯이. 편의점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친다. 36살. 눈 밑이 검다. 머리는 언제 감았더라. 어제? 그제? 기억이 안 난다. 넥타이는 안 맨 지 오래다. 후드 티에 청바지. 창업가 유니폼.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묻는다. "오늘은 어땠어?" 나는 대답한다. "응, 괜찮았어." 거짓말이다. 매일 한다."어땠어?"라는 질문의 무게 아내는 똑똑하다. 대기업 마케팅팀 과장. 연봉 7800만원. 우리 집 주수입이다. 내가 창업하면서 "2년만 버텨줘"라고 했다. 2년 6개월이 지났다. 아내도 힘들다. 알고 있다. 아침 7시 출근, 저녁 8시 퇴근. 주말에는 딸 돌보기. 시댁 전화도 받아야 한다. "창업이 뭐 그리 오래 걸려?" 시어머니 말씀. 아내가 대신 받는다. "오늘은 어땠어?" 이 질문에 진짜 대답하려면. "오늘 투자 미팅 망했어. 이번 달 말까지 프리A 못 받으면 직원들 월급 못 줄 수도 있어. 런웨이 7개월 남았는데 매출 성장이 너무 느려. 경쟁사는 20억 투자받았대. 우리는 언제쯤 될까. 밤마다 현금흐름표 보면서 잠 못 자. 무섭다. 실패할 것 같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지만 못 한다. 왜냐하면. 아내도 지쳤기 때문이다. 내가 창업한다고 했을 때 아내가 말했다. "믿을게. 당신이면 할 수 있어."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배신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대답한다. "응, 괜찮았어. 미팅 잘 됐어." 거짓말. 매일.숫자로 말하기 팀원들한테는 숫자로 말한다. "이번 달 MRR 8% 성장했어. 좋은 흐름이야." "신규 고객 12개 더 늘었어. 다음 달 목표는 15개." "번율은 아직 낮지만, 개선 중이야. 다음 스프린트에서 온보딩 UX 바꾸자." 희망적으로 말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안 되니까. 월급 받는 사람들이다. 가족이 있다. 내 불안을 전염시킬 수 없다. 그런데 집에서는. 아내한테는 숫자로 말할 수 없다. "런웨이 7개월"이라고 하면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7개월 후엔?" "투자 못 받으면?" "직원들은?"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나도 모르니까. 그래서 애매하게 말한다. "일은 잘 되고 있어." "투자도 긍정적이야."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야." 구체적이지 않은 말들. 안개 같은 대답들. 아내는 눈치챈다. 알고 있다. 그래도 더 묻지 않는다. 물으면 내가 무너질까봐. 그 배려가 더 미안하다. 새벽 3시의 계산 오늘도 새벽 3시에 눈 떴다. 슬랙 확인. 알림 없음. 다행이다. 그럼 엑셀을 켠다. 현금흐름표. 시나리오 3개를 계산한다. 보수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5%. 7개월 후 프리A 실패. 직원 5명 정리. 3명만 남기고. 사무실 축소. 공유오피스에서 집으로. 런웨이 12개월로 연장. 그럼 아내한테 뭐라고 말하지. 중립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10%. 5개월 후 프리A 성공. 10억 투자. 직원 12명으로 확대. 사무실 확장. 그럼 2년 안에 시리즈A 가능할까. 낙관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20%. 3개월 후 프리A 성공. 15억 투자. 직원 20명. 그럼... 그럼 아내한테 말할 수 있을까. "봐, 내가 했잖아." 세 개 다 불확실하다. 숫자만 다를 뿐 전부 추측이다. 그래도 계산한다. 안 하면 더 불안하니까. 옆에서 아내가 뒤척인다. 깬 건가. 아니다. 다시 잠든다. 나는 노트북 화면 밝기를 줄인다. 계속 계산한다. 새벽 4시까지."괜찮아"라는 거짓말 점심시간. 팀원들이랑 같이 먹는다. 성수동 식당. 제육볶음 7500원. 8명이니까 6만원. 회사 카드로 긁는다. 법인 통장 잔고 1억 2300만원. 숫자가 줄어든다. 매일. 개발팀 막내가 묻는다. "대표님, 투자는 어떻게 돼가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잘 되고 있어. 곧 좋은 소식 있을 거야." 팀원들이 안도한다. 밥을 먹는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이직 준비한다. 이미 한 명이 물어봤다. "혹시 투자 안 되면 어떻게 되나요?" 조심스럽게. 나는 대답했다. "걱정 마. 플랜 B도 있어." 플랜 B는 없다. 저녁 8시. 아내한테서 카톡 온다.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언제 와?" "10시쯤?" "알았어. 조심히 와." 10시에 못 간다. 알고 있다. 오늘도 회의가 있다. 개발팀이랑 다음 스프린트 계획. 11시까지 걸린다. 그럼 집 가는 길 편의점. 맥주 한 캔. 시간 보내기. 11시 반에 들어간다. 아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기다렸다. "왔어?" "응." "힘들지?" "괜찮아." 괜찮지 않다. 하지만 말한다. 괜찮다고. 왜 말 못 하나 이유를 생각해봤다. 밤마다. 첫 번째 이유: 아내도 힘들다. 내 고민까지 떠안기면 너무 무겁다. 아내는 회사 일도 있고 육아도 있고 시댁 일도 있다. 거기에 내 불안까지 더하면 무너진다. 두 번째 이유: 가장이라는 환상.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착각. 30대 중반 가장.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불안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배웠다. 아버지도 그랬다. 세 번째 이유: 실패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힘들어"라고 말하면 "창업이 잘 안 되고 있어"라고 인정하는 거다. 그럼 진짜 실패가 된다. 말로 만들고 싶지 않다. 네 번째 이유: 해결책이 없어서. 고민을 말하면 아내가 묻는다. "어떻게 할 건데?" 나는 대답 못 한다. 모르니까. 해결책 없는 고민은 그냥 하소연이다. 투덜거림이다. 남자가 그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 다섯 번째 이유: 결정을 미루고 싶어서. "힘들어"라고 말하면 대화가 이어진다. "그만둘까?" "다시 취업할까?" "직원들 정리할까?" 그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여섯 번째 이유: 미안해서. 아내를 설득해서 창업했다. "2년만 믿어줘." 2년이 지났다. 약속을 못 지켰다. 미안하다. 그래서 더 말 못 한다. 일곱 번째 이유: 자존심. 네이버 PM 5년 하고 나왔다. 연봉 9000만원 받았다. 사람들이 말했다. "너 잘될 거야." "능력 있잖아." 그 기대를 저버리기 싫다. 특히 아내한테. 여덟 번째 이유: 혼자 버티는 게 익숙해서. 어릴 때부터 그랬다. 고민은 혼자 한다. 해결도 혼자 한다. 도움 청하는 거 어색하다. 그게 몸에 배었다. 진짜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다 섞인 거겠지. 아내는 알고 있다 어제 아내가 말했다. 자기 전에. 불 끄고. 어둠 속에서. "창업 그만둬도 괜찮아." 나는 대답 못 했다. 한참 후에 말했다. "아직 아니야. 조금만 더 해볼게." 아내가 말했다. "힘들면 말해. 혼자 버티지 말고." "응. 알았어." 거짓말이다. 또. 아내는 알고 있다. 내가 힘든 거. 숫자는 몰라도 분위기는 안다. 새벽에 깨는 것도 알고. 편의점에서 시간 보내는 것도 알고. 맥주 마시고 들어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더 묻지 않는다.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미안하다. 딸의 질문 이번 주 일요일. 드물게 집에 있었다. 딸이 물었다. 3살. 말이 트였다. "아빠, 왜 항상 피곤해?" 나는 웃었다. "피곤한 게 아니야. 아빠 일하는 거야." "일은 왜 해?" "응... 돈 벌려고." "돈은 왜 벌어?" "너 키우려고. 맛있는 거 사주려고." 딸이 말했다. "난 아빠가 같이 놀아주는 게 좋은데." 할 말이 없었다. 3살 애가 맞는 말을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러는가. 가족을 위한다면서 가족과 시간을 못 보낸다. 딸은 자란다. 매일. 나는 그걸 놓치고 있다. 아내가 옆에서 봤다. 아무 말 안 했다. 표정으로 알았다. "봐, 나만 힘든 게 아니야. 딸도 힘들어." 미안했다. 딸한테도. 아내한테도. 그래도 변하지 못한다. 월요일 되면 또 출근한다. 새벽 7시. 투자자 앞에서는 투자자 미팅 때는 다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저희 MRR은 매달 평균 12% 성장하고 있습니다. 번율은 현재 38%지만 다음 분기 60%까지 개선할 계획입니다. TAM은 3조 규모로 추정되며 저희가 선점할 수 있는 시장은..." 자신감 넘친다. 데이터를 보여준다. 그래프는 우상향이다. 고객 사례를 말한다. "A사는 저희 솔루션 도입 후 업무 효율 40% 개선했습니다." 투자자가 묻는다. "경쟁사는 20억 투자받았는데 어떻게 대응할 건가요?" 나는 웃는다. "저희는 차별화된 기술력이 있습니다. 특허 출원 완료했고요. 경쟁사보다 2년 앞섰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과장이다. 2년은 아니다. 6개월쯤? 하지만 투자자 앞에서는 확신에 차서 말한다. 미팅 끝나고 나온다. 엘리베이터 탄다. 혼자.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방금까지 웃었던 얼굴. 지금은 지쳤다. 연기 끝났다. 집에 가면 또 연기한다. "괜찮아." 회사 가면 또 연기한다. "잘 되고 있어." 어디서도 진짜 나를 보여주지 못한다. 창업 동기 모임 한 달에 한 번. 창업 동기들 만난다. 5명. 다들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거기서만 솔직해진다. "런웨이 얼마 남았어?" "6개월." "나는 4개월." "투자는?" "다 거절당했어." "나도." 웃는다. 쓴웃음. 그래도 웃는다. 같이 힘드니까 덜 외롭다. 한 명이 말한다. "와이프한테 말 못 하겠어. 힘들다고." 다들 고개 끄덕인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우리 와이프는 눈치챘어. 근데 더 안 물어봐." "그게 더 미안하지." "맞아." 소주 마신다. 과음하지는 않는다. 내일 또 일해야 하니까. 10시 되면 헤어진다. "다음 달에 봐." "그래. 버티자." 집 가는 길. 조금 덜 외롭다. 한 시간쯤. 그리고 다시 혼자다. 부모님 전화 아버지한테 전화 왔다. 일요일 저녁. "창업 언제까지 할 거냐." "조금만 더요." "조금이 얼마냐. 벌써 2년 넘었다." "투자 받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투자가 그렇게 쉽게 되냐. 내가 보기엔 안 될 것 같은데." "..." "다시 취업 알아봐라. 네이버 있을 때가 좋았다. 연봉도 많이 받고." "아버지." "뭐."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하다가 망하면 어쩔 건데. 애도 있고 와이프도 있는데." "..." 끊었다. 예의는 아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더 듣기 싫었다. 아버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현실적이다. 합리적이다. 그래서 더 듣기 싫다. 나도 같은 생각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밤 11시 30분, 또 편의점 오늘도 편의점이다. 집 앞. 11시 30분. 아내 잔다. 딸도 잔다. 들어가야 한다. 조금만 더. 맥주 한 캔 더. 편의점 알바생이 나를 안다. "또 오셨네요." "응." "힘드세요?" "아니. 괜찮아." 거짓말. 또. 창밖을 본다. 우리 집 불이 꺼져 있다. 22평. 전세 3억. 아내 회사 대출로 얻었다. 내 신용으로는 안 됐다. 창업하면서 신용등급 떨어졌다. 내년에 전세 만기다. 집값 올랐다. 3억 5000만원 될 거다. 5000만원 더 구해야 한다. 어떻게 구하지. 투자 받으면 가능하다. 못 받으면? 모르겠다. 계산한다. 또. 머릿속으로. 런웨이 214일. 일 평균 적자 86만원. 프리A 목표 금액 12억. 확률은? 30%? 40%? 모르겠다. 맥주를 마신다. 500ml. 다 마셨다. 일어난다.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는 길 현관문 연다. 조용히. 신발 벗는다. 소리 안 나게. 거실 지난다. 소파에 뭔가 있다. 이불이다. 아내가 덮어놨다. 나 챙긴 거다. 미안하다. 또. 침실 문 연다. 아내 잔다. 딸도 옆에서 잔다. 평화롭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 내가 힘들게 하고 있는 것들. 씻는다. 조용히. 눕는다. 아내 옆에. 등을 보고. 아내가 뒤척인다. 깨진 않았다. 습관적으로 내 쪽으로 몸을 기댄다. 따뜻하다. 말하고 싶다. "힘들어." "무서워." "잘될 수 있을까." "도와줘." 하지만 못 한다. 오늘도. 언젠가는 말할 것이다. 언제일까. 성공하고 나서? 아니면 실패하고 나서? 그것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눈을 감는다. 내일 또 새벽 3시에 깰 것이다. 슬랙 확인하고. 엑셀 켜고. 계산하고. 그렇게 버틴다. 오늘도.힘들다고 말 못 하는 게 더 힘들다. 그걸 아내도 안다. 나도 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 않는다. 아직은.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벽 3시 41분 또 눈 떴다. 슬랙 알림은 없다. 당연하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건 나뿐이니까. 스프레드시트를 연다. 어제 저녁에 닫았던 그 파일. "시나리오 분석 v23.xlsx" MRR 그래프를 본다. 지난달 1050만원, 이번 달 1200만원. 성장은 하고 있다. 14% 성장. 나쁘지 않다. 그런데. 런웨이는 8개월. 14%씩 성장하면 프리A 받을 만한 트랙션까지 12개월 걸린다. 계산이 안 맞는다. 4개월이 모자라. "피봇해야 하나." 이 생각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시작한다. 매일.출근길 계산기 7시 21분 지하철. 어제 만난 VC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된다. "방향은 좋은데요, 시장이 너무 작지 않나요?" TAM 3000억이라고 했다. IR 덱에 그렇게 썼다. 근데 솔직히 그 숫자 믿냐고 물으면 나도 자신 없다. 리서치 회사 보고서 짜깁기한 거다. 실제로 우리가 공략할 수 있는 시장은 얼마나 될까. B2B SaaS, 중소기업 타겟, 업무 자동화. 경쟁사 4개. 우리 차별점은 '사용성'. 그런데 고객들은 "가격이 중요해요"라고 한다. 우리 강점을 고객이 안 본다. 이게 문제다. 피봇 시나리오 A: 타겟을 대기업으로. 단가 높이기. 피봇 시나리오 B: 기능 줄이고 가격 낮추기. 볼륨 게임. 피봇 시나리오 C: 완전히 다른 버티컬로. HR? 재무? 계산기 두드린다. 시나리오별 매출 예측. 대기업 타겟하면 영업 사이클 6개월. 런웨이가 안 된다. 가격 낮추면 단위경제학이 안 맞는다. 다른 버티컬은... 처음부터 다시? "망했네." 혼잣말이 나온다. 옆 사람이 쳐다본다. 아침 스탠드업 9시 30분. 팀원들 모였다. "어제 A사 미팅 어땠어요?" 개발팀장 민수가 묻는다. "잘 됐어. 긍정적이야." 거짓말이다. A사는 "검토해보겠습니다" 했다. 이건 거절이다. 20번 들어봐서 안다. "다음 주 B사 데모 준비하자. 이번엔 자동화 케이스 3개 더 보여주고." 팀원들이 고개 끄덕인다. 민수가 말한다. "근데 대표님, B사는 대기업이잖아요. 우리 솔루션이 엔터프라이즈급으로 준비됐나요?" 준비 안 됐다. 보안 인증도 없고, 온프레미스 배포도 안 된다. "일단 관심 보이면 커스터마이징 들어가는 거지 뭐." 민수가 약간 불안한 표정이다. 눈치챘나. 회의 끝나고 민수를 붙잡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 방향." 민수가 잠깐 망설인다. "솔직히요... 중소기업 고객들 반응이 생각보다 안 좋잖아요. 이탈률도 높고. 대기업 가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준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준비 시간. 그게 없다는 게 문제지.점심, 데이터와 직관 사이 팀원들이랑 성수동 국밥집. 밥 먹으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돌아간다. 데이터를 본다.신규 고객 획득 비용(CAC): 180만원 고객 생애 가치(LTV): 320만원 LTV/CAC 비율: 1.78책에서는 3 이상이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1.78. 그런데 이탈률이 문제다. 6개월 리텐션 45%. 절반이 떠난다. 왜 떠나나. 고객 인터뷰 10개 다시 읽어봤다. "너무 복잡해요." "우리가 원하는 기능이 없어요." "가격 대비 효과가 안 보여요." 복잡하다고? 우리는 사용성이 강점인데. 민수 말대로 타겟을 잘못 잡은 건가. 중소기업은 '쉬운 것'을 원하는데, 우리는 '강력한 것'을 만들었나. 그럼 대기업으로 가야 하나. 대기업은 강력한 걸 원한다. 맞다. 근데 우리 솔루션이 정말 대기업급인가. 데이터는 '피봇하라'고 한다. 직관은 '조금만 더 버텨봐'라고 한다. 국밥 반도 못 먹었다. 오후 3시, VC 전화 "대표님,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부 검토 들어갔는데요." 기대한다. 제발. "트랙션이 나쁘지 않은데, 시장 포지셔닝이 애매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또 이거다. "중소기업 타겟인데 가격은 비싸고, 대기업용이라고 하기엔 기능이 부족하고. 타겟을 명확히 하시면 다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 끊었다. 책상에 머리를 박는다. 진짜로. 5분 정도 그러고 있었나. 민수가 다가온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민수가 알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간다. 노트북 열어서 IR 덱을 연다. 슬라이드 12번. "Target Market" 중소기업 500~1000명 규모라고 써있다. Delete 키를 누른다. 지워진다. 그럼 뭐라고 쓰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춘다. 10분 동안. 원복한다. Ctrl+Z. 아직은 아니다. 확신이 없다.저녁 8시, 시뮬레이션 팀원들 퇴근했다. 나만 남았다. 새 엑셀 파일 연다. "피봇 시뮬레이션 최종.xlsx" 시나리오 A: 대기업 타겟 전환영업 사이클: 6개월 첫 계약까지 예상 기간: 8개월 런웨이: 8개월 결론: 망함시나리오 B: 프리미엄 축소, 가격 인하월 구독료: 15만원 → 8만원 예상 고객 증가: 2배 매출 증가: 1200만원 → 1600만원 CAC는 그대로 결론: 단위경제학 더 나빠짐시나리오 C: 버티컬 변경 (HR 자동화)시장조사 기간: 2개월 MVP 재개발: 3개월 런웨이: 8개월 결론: 런웨이 부족시나리오 D: 현재 방향 유지MRR 14% 성장 유지 가정 12개월 후 예상 MRR: 4000만원 프리A 가능 여부: 애매 8개월 후 런웨이 소진 결론: 도박네 개 시나리오 모두 답이 없다. "미친." 혼자 웃는다. 웃음이 나온다. 진짜로. 계산이 안 맞는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한 번 더 계산하면 답이 나올까 했다. 안 나온다. 편의점 간다. 삼각김밥 2개, 바나나우유. 돌아와서 먹는다. 모니터 보면서. 검색한다. "스타트업 피봇 성공 사례" 배달의민족: 배달 대행 → 배달 플랫폼 인스타그램: 위치 기반 체크인 → 사진 공유 트위터: 팟캐스트 플랫폼 → 마이크로블로깅 다들 피봇했다. 성공했다. 그럼 우리도? 다음 검색. "스타트업 피봇 실패 사례" 결과가 더 많다. 훨씬 많다. 아, 그렇지. 실패한 회사들은 뉴스가 안 되니까. 데이터가 없는 거다. 생존자 편향. 경영학 수업 때 배웠다. 성공한 회사들은 피봇했다고 말한다. 근데 피봇한 회사 중 몇 %가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시계 본다. 밤 10시 42분. 아내한테 카톡 온다. "언제 와? 딸이 아빠 기다려" "30분 후에 출발할게" 거짓말이다. 1시간은 더 있을 거다. 밤 11시 50분, 결정 아닌 결정 결론을 내려야 한다. 내일 아침 민수가 또 물어볼 거다. A4 용지 꺼낸다. 펜 든다. 왼쪽에 "피봇 해야 하는 이유"현재 트랙션으로는 투자 어려움 타겟 시장 반응 미온적 경쟁사들과 차별화 약함 단위경제학 개선 필요 VC들도 포지셔닝 문제 지적오른쪽에 "피봇 하면 안 되는 이유"런웨이 부족, 피봇할 시간 없음 팀원들 혼란, 사기 저하 우려 누적 데이터/고객 관계 리셋 새 방향 성공 보장 없음 피봇은 도망일 수도두 개 리스트 본다. 둘 다 맞다. 둘 다 틀리다. 데이터는 피봇하라 한다. 직관은 버티라 한다. 그럼 뭐가 답인가. 답은 없다. 알았다. 대신 질문을 바꾼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나?" 적는다.다음 주 B사 미팅 - 대기업 반응 테스트 기존 고객 10명 전화 - 이탈 이유 재확인 가격 A/B 테스트 - 소규모로 개발 리소스 20% - 엔터프라이즈 기능 준비피봇인가, 유지인가? 둘 다 아니다. 검증이다. 4주 준다. 4주 후 데이터 보고 결정한다. 완벽한 답은 아니다. 그냥 다음 스텝이다. 펜 내려놓는다. 좀 후련하다. 조금. 가방 챙긴다. 불 끈다. 나간다. 지하철에서 아내한테 카톡한다. "지금 출발함. 미안" 답 온다. "조심히 와. 사랑해" 핸드폰 본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왜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피곤해서 그런가. 새벽 1시 12분 집 도착했다. 조용하다. 딸은 벌써 잤다. 방에 들어가서 본다. 작은 숨소리. 이마에 키스한다. "아빠가 뭘 하고 있는지 너도 언젠가 알겠지." 침대에 눕는다. 내일도 묻겠지. 피봇할까? 그럼 또 답하겠지. 모르겠다고. 그게 솔직한 답이다. 확신이 없다. 그래도 간다. 데이터 보고, 고객 만나고, 계산하고, 고민한다. 언젠가 답이 나올까. 모르겠다. 정말. 눈 감는다. 3시간 후면 또 눈 뜰 거다. 스프레드시트 열 거다. 피봇할까? 또 물을 거다. 그게 내 일이다.답은 없다. 그래도 내일은 온다. 계산기는 계속 두드린다.

투자자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투자자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투자자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오늘도 '검토' 하나 추가 오전 10시. 강남역 근처 카페. 투자자 앞에서 45분 발표했다. 준비는 3주 했다. "좋네요. 팀 구성도 괜찮고. 일단 검토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웃으면서 악수했다.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카페 나와서 스프레드시트 열었다. 'VC 미팅 현황' 시트. F열. '진행 상태'. "검토 중"이라고 입력했다. 10번째다.점심은 굶었다. 입맛이 없다. 사무실 돌아와서 CTO한테 물었다. "미팅 어땠어요?" "괜찮았어. 긍정적이었어." 거짓말이다. 긍정적이면 바로 다음 미팅 잡는다. 2주 후, 1달 후 이런 소리 안 한다. "검토해보겠습니다"는 70% 확률로 거절이다. 경험상. 나머지 30%는 진짜 검토 중이거나, 아니면 더 긴 거절이다. 5개 거절의 패턴 지난 2달. 거절 5개 받았다. 패턴이 있다. 1번 거절: "아직 이르다" 시드 투자자였다. 2억 제안했다. "좋은데, 트랙션이 조금 더 필요해요. 6개월 후 다시 봐요." 6개월이면 런웨이 끝난다. 그 얘긴 안 했다. 2번 거절: "우리 포트폴리오랑 안 맞다" 이건 솔직한 거절이다. 고맙다. 시간 낭비 안 하게 해줬다. 3번 거절: "내부 검토 결과..." 이메일로 왔다. 3주 걸렸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나머지는 안 읽었다. 4번 거절: 연락 두절 제일 최악이다. 문자 3번, 이메일 2번. 답 없다. 카톡 읽씹. 그냥 거절이라고 해주면 되는데. 5번 거절: "다음 라운드에서" "지금은 어렵고요, 프리A 할 때 다시 연락주세요." 프리A 하려고 지금 투자 받으려는 건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거절은 그래도 낫다. 끝이니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검토 중'은 지옥이다. 끝도 아니고 시작도 아니다. 매일 기다린다. 카톡 알림 올 때마다 확인한다. 아니다. 광고 문자다. 10개 보류의 무게 현재 '검토 중' 10개. 스프레드시트에 정리돼 있다. A사: 1차 미팅 후 3주째. 답 없음. B사: "2주 후 파트너 미팅 잡자" - 3주 지남. C사: "실사 들어가겠다" - 자료 보낸 지 2주. D사: "다음 주 전화" - 전화 안 옴. E사: "긍정적으로 검토" - 4주 지남. F사: 오늘 추가. 방금. G사: "투자위원회 상정" - 한 달째. H사: "관심 있다" - 구체적 얘기 없음. I사: "조건 맞으면..." - 조건 얘기 안 나옴. J사: "파운더 일정 보고" - 2주째 일정 안 나옴. 10개. 확률 계산해봤다. 30% 가정하면 3개. 3개 중 1개라도 성사되면 된다. 아니다. 2개는 돼야 한다. 목표 금액 5억이니까. 매일 확률 계산한다. 의미 없는 짓이다.목요일 밤. 아내가 물었다. "투자 어떻게 돼가?" "진행 중이야. 잘 될 것 같아." "진짜?" "응. 여러 군데 긍정적이야." 또 거짓말했다. '긍정적'과 '검토 중'은 다른 말이다. 나는 안다. 아내는 믿고 싶어 한다. 나도 믿고 싶다. 버티는 법 1: 숫자 보기 패닉 올 때. 스프레드시트 연다. '재무 현황' 시트. 현금: 6800만원. 월 소진: 850만원. (인건비 650 + 사무실 180 + 기타 20) 런웨이: 8개월. 8개월. 투자 못 받으면 어떻게 되나. 시나리오 짰다. 3개. 최악 시나리오:5개월 후 투자 불발 급여 50% 삭감 3개월 더 버팀 결국 정리중립 시나리오:3개월 내 브릿지 투자 1억 6개월 연장 프리A 준비낙관 시나리오:2개월 내 5억 투자 유치 팀 2명 충원 매출 집중확률은? 최악 40%, 중립 30%, 낙관 30%. 숫자 보면 정신 차린다. 감정 빠지면 끝이다. 숫자만 보면 된다. 버티는 법 2: 병렬 처리 10개 검토 중이면? 10개 더 미팅 잡는다. 목표는 항상 파이프라인 20개. 상단 10개 (진행 중), 하단 10개 (신규 컨택). 하나 떨어지면 하나 채운다. VC 리스트 100개 만들었다. A급 (원하는 곳): 15개 - 10개 미팅 완료, 5개 대기. B급 (괜찮은 곳): 30개 - 컨택 중. C급 (일단 만나는 곳): 55개 - 명단 정리. 매일 아침. 이메일 3개 보낸다. "안녕하세요, 저희 솔루션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답장률 20%. 100개 보내면 20개 답장. 10개 미팅. 3개 진행. 1개 성사. 깔때기다. Funnel. 위에서 계속 부어야 아래로 떨어진다. 멈추면 끝난다. 버티는 법 3: 루틴 유지 무너지면 안 된다. 아침 7시 출근. 변함없다. 팀원들 보면 웃는다. "오늘도 화이팅!" 점심 같이 먹는다. 투자 얘기 안 한다. "어제 고객사 미팅 어땠어?" "데모 반응 좋았어요." "좋네. 클로징까지 가보자." 밝게 말한다. 리더니까. 불안은 전염된다. 내가 흔들리면 팀이 흔들린다. 혼자 있을 때만 한숨 쉰다. 밤 11시. 사무실 불 끈다. 집 가는 지하철. 스마트폰 본다. 새 메일 없다. 카톡 없다. 내일도 똑같을 거다. 그래도 된다. 루틴만 지키면 된다. 버티는 법 4: 작은 승리 챙기기 투자 성사는 Big Win이다. 근데 당장은 안 온다. 그럼 Small Win 챙긴다. 이번 주 Small Wins:신규 고객사 계약 1건 (월 50만원) MAU 8% 증가 개발 일정 안 밀림 VC 2곳 신규 미팅 확정작다. 근데 이게 쌓인다. 매주 금요일. 노션에 기록한다. '이번 주 잘한 것' 리스트. 안 보면 다 까먹는다. 보면 '아, 그래도 뭔가 하고 있네' 싶다. 투자 못 받아도. 회사는 돌아간다. 매출은 오른다. 느려도. 이게 트랙션이다. 오늘 밤도 밤 12시. 아직 사무실이다. IR 덱 또 수정한다. 51번째 버전. 슬라이드 8번. '트랙션'. 그래프 조금 올랐다. 각도 2도. 의미 있나? 모르겠다. 투자자들은 '하키스틱 그로스' 원한다. 우린 '완만한 우상향'이다. 그래도 상승은 상승이다. 내일 또 미팅이다. K사. "검토해보겠습니다" 들을 확률 70%. 그래도 간다. 20% 확률에 거는 거다. 창업이 원래 그렇다.검토는 끝이 아니다. 다음 미팅까지 버티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