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Dec, 2025
점심, 유일하게 팀원들과 함께하는 시간
점심, 유일하게 팀원들과 함께하는 시간 12시 30분 슬랙에 메시지 올렸다. "점심 누구 같이?" 5분 안에 답장 온다. 개발팀 민수가 제일 빠르다. "저요!" 기획자 지은이도 손든다. 영업팀 두 명은 외근. 디자이너 수진이는 미팅. 결국 네 명. 나, 민수, 지은, 개발자 현우. "어디 갈까요?" 지은이가 묻는다. "된장찌개?" 민수가 말한다. 어제도 된장찌개였다. "파스타 어때요?" 현우가 말한다. "예산이..." 내가 웃으며 말한다. 결국 된장찌개. 사무실 뒤 골목 백반집. 7000원짜리.걸어가면서 민수가 말한다. "대표님, 어제 그 버그 고쳤어요." "오 진짜?" 내가 답한다. "네. 새벽 4시까지 걸렸는데." 미안하다. 말은 안 한다. 민수는 알 것이다. 현우가 끼어든다. "형 또 밤샜어요?" "어쩔 수 없었지." 지은이가 웃는다. "우리 회사 사람들 다 새벽형이네요." 아니다. 새벽형이 아니라 잠을 못 자는 거다. 골목 모퉁이 돌았다. 백반집 보인다. 할머니가 운영하신다. 우리 얼굴 다 아신다. "어서 오세요!" 할머니 목소리. "안녕하세요!" 우리가 동시에 답한다. 구석 자리 앉는다. 항상 그 자리다. 메뉴판 볼 필요 없다. 다 외운다. 된장찌개 정식 네 개. 공깃밥 하나 더. 물 따라 마신다. 시원하다. 민수가 말한다. "날씨 좋네요." "응." 현우가 답한다. "주말에 뭐 해요?" 지은이가 묻는다. 민수가 답한다. "집에서 쉴 거 같은데요. 넷플릭스나 봐야지." 현우가 말한다. "저는 여자친구 만나요." 지은이가 웃는다. "부럽네요. 저는 친구 결혼식이요." 다들 나를 본다. "나?" 내가 말한다. "딸이랑 놀아줘야지." "몇 살이에요?" 민수가 묻는다. "세 살." "귀엽겠다." 지은이가 말한다. 귀엽다. 요즘 제대로 못 놀아줬다.밥이 나왔다 된장찌개 김이 모락모락. 밥 한 공기. 반찬 네 가지.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 든다. 밥 한 입. 된장찌개 한 입. 맛있다. 진짜 맛있다. 회사에서는 컵라면 먹는다. 혼자 회의실에서. 키보드 치면서. 여기서는 다르다. 사람들이랑 같이 먹으니까. 민수가 말한다. "이 집 김치 진짜 맛있어요." "할머니가 직접 담그신대." 지은이가 답한다. "대박." 현우가 김치 한 입 먹는다. 나도 김치 먹는다. 시원하다. 적당히 익었다. 밥 먹으면서는 별 얘기 안 한다. 그냥 먹는다. 가끔 "이거 맛있네", "물 좀 주세요" 정도. 회사 얘기 안 나온다. 버그도 안 나온다. 투자도 안 나온다. 런웨이도 안 나온다. 그냥 밥 먹는다. 이게 좋다. 중간쯤 현우가 말한다. "대표님, 요즘 많이 힘드시죠?" 갑자기 나온 질문이다. "응?" 내가 답한다. "아니 그냥... 표정이 좀..." 민수가 끼어든다. "형, 우리 알아요. 투자 받으려고 뛰어다니시는 거." 지은이도 말한다. "저희도 도울 수 있는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목이 메인다. 안 그래야 하는데. "괜찮아." 내가 웃는다. "다 잘 될 거야." "저희 믿어요." 민수가 말한다. "대표님이 포기 안 하시면 저희도 안 할 거예요." 현우가 덧붙인다. 된장찌개 한 입 더 먹는다. 뜨겁다. "고맙다." 내가 말한다. "진짜로."후식 식혜 나왔다. 서비스다. 할머니가 주신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식혜 마신다. 달다. 차갑다. 지은이가 말한다. "이번 주 스프린트 잘 끝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진짜?" 내가 묻는다. "네. 기획 거의 다 정리했어요." 민수가 말한다. "개발도 70% 왔어요." 현우가 덧붙인다. "다음 주면 QA 들어갈 수 있어요." 좋은 소식이다. 오랜만에. "잘하고 있네." 내가 말한다. "당연하죠." 민수가 웃는다. 식혜 다 마셨다. 컵 내려놓는다. 시계 본다. 1시 20분. 50분 지났다. "슬슬 가야겠다." 내가 말한다. "네." 다들 답한다. 계산하면서 카운터 앞에 선다. 할머니가 웃으신다. "28000원이에요." 카드 꺼낸다. 회사 법인카드.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맛있게 먹었어요." 내가 답한다. 밖으로 나온다. 햇빛 눈부시다. 민수가 말한다. "배불러요." "나도." 현우가 답한다. 지은이가 웃는다. "오후에 졸리겠다." "커피 마시자." 내가 말한다. 사무실로 걸어간다. 네 명이. 사무실 앞 엘리베이터 탄다. 4층 누른다. 문 열린다. 사무실 보인다. 다시 시작이다. 개발. 기획. 회의. 슬랙 메시지. 하지만 괜찮다. 조금은. 아까 그 50분이 있었으니까. 팀원들이랑 밥 먹었으니까. 회사 얘기 안 하고 그냥 밥만 먹었으니까. 민수가 자리 앉는다. 현우도. 지은이도. 나도 앉는다. 노트북 연다. 슬랙 알림 17개. 한숨 쉰다. 작게. 하지만 웃는다. 조금. 오늘 점심은 좋았다. 3시쯤 슬랙에 민수가 메시지 보냈다. "대표님, 아까 점심 맛있었어요. 내일도 같이 가요!" "ㅋㅋ 그래." 내가 답한다. 지은이도 이모지 단다. 하트. 현우도 답한다. "저도요!" 내일도 된장찌개일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 50분이 있으니까. 회사 얘기 안 해도 되는 그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만 숨 쉴 수 있으니까.점심 시간, 내가 대표가 아닌 순간.
- 22 Dec, 2025
'런웨이가...' - 대표의 가장 자주 하는 말
새벽 3시의 엑셀 또 눈이 떴다. 3시 12분. 손이 먼저 움직인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아이폰을 집는다. 슬랙을 켠다. 새 메시지는 없다. 당연하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게 나뿐이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간다. 노트북을 연다. 습관이다. 엑셀 파일 하나를 연다. 파일명은 "현금흐름_2024_v32". 버전이 32다. 그만큼 많이 봤다는 뜻이다.런웨이 8개월. 237일. 5688시간. 계산한다. 월급 5800만원. 사무실 180만원. 서버비 320만원. 마케팅 500만원. 기타 200만원. 월 7000만원 나간다. 매출은 1200만원. 적자 5800만원. 8개월이면 4억 6400만원이 증발한다. 프리A 투자 받아야 한다. 5억 받으면 런웨이가 16개월이 된다. 10억 받으면 25개월. 그 안에 시리즈A 받으면 된다. "받으면 된다." 혼자 중얼거린다. 문제는 "받으면"이다. 딸이 방에서 뒤척인다. 소리가 들린다. 깼나 싶어서 노트북을 닫을 뻔했다. 다시 조용해진다. 다행이다. 엑셀 시트를 하나 더 연다. "시나리오 분석"이라는 이름이다. 세 가지 케이스가 있다. 보수: 투자 못 받음. 런웨이 8개월 후 폐업. 중립: 3억 받음. 런웨이 13개월. 피봇 1회. 낙관: 7억 받음. 런웨이 20개월. MRR 3배 성장. 보수 시나리오는 안 봐도 안다. 8개월 후 직원들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내한테 다시 취업한다고 말하고, 부모님한테 전화한다. "죄송합니다. 접을게요." 상상하기 싫다. 다음 시트로 넘어간다. 투자자 미팅에서 "런웨이는 어느 정도 남았나요?" VC 파트너가 묻는다. IR 자료 17페이지를 보면서. "충분합니다." 나는 대답한다. 미소를 짓는다. 자신감 있게. "구체적으로요?" "현재 기준 12개월 이상입니다." 거짓말이다. 8개월인데 12개월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8개월이라고 하면 다급해 보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다급한 스타트업을 싫어한다. "MRR 성장률이 좋네요. 그런데 CAC가 조금 높은데?" "네. 초기 시장 확보 단계라서 그렇습니다. 6개월 내 30% 절감 목표입니다." 또 거짓말이다. 어떻게 절감할지 모른다. 일단 말은 한다. 자신감 있게.미팅이 끝난다. 악수한다. "좋게 검토해보겠습니다." 파트너가 말한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혼자가 된다. 미소가 사라진다. 한숨이 나온다. "좋게 검토해보겠습니다." 이 말의 뜻을 안다. "관심 없습니다"라는 뜻이다. 20번 들었다. 20번 다 그랬다. 스타벅스에 들어간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오늘 네 번째다. 자리에 앉는다. 노트북을 연다. 다음 주 미팅 IR 자료를 수정한다. "런웨이 충분함" 슬라이드를 본다. 숫자를 바꿀까 생각한다. 12개월을 14개월로? 아니면 10개월로 솔직하게? 결정하지 못한다. 일단 12개월로 놔둔다. 핸드폰이 울린다. CFO가 문자를 보냈다. "대표님 이번 달 마케팅비 오버했어요. 120만원 더 나갔어요." 120만원. 작은 돈이다. 그런데 크다. 런웨이가 하루 줄어든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답장을 보낸다. 커피를 마신다. 쓰다. 팀원들 앞에서 월요일 오전 10시. 전체 회의다. "이번 주 목표 공유하겠습니다." 나는 말한다. 화이트보드에 쓴다. "신규 고객 5개. 데모 미팅 15건. 피처 론칭 2개." 개발팀장이 손을 든다. "대표님 론칭 2개는 무리인데요. 테스트 시간이 부족해요." "해야 합니다." 내 목소리가 조금 세진다. 의도한 건 아니다. "런웨이 생각하면 빨리 가야 해요. 고객 피드백 받으면서 수정하는 거로." "런웨이요?" 팀원들이 쳐다본다. 다들 아는 단어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처음이다. 보통 숨기니까. 말이 나왔으니 어쩔 수 없다. "우리 시간이 많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8개월 남았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진다."투자 받을 거 아닌가요?" 디자이너가 묻는다. "받으려고 하는데 시간이 걸려요. 그 전에 우리가 보여줄 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빨리 론칭하자는 거죠?" 개발팀장이 말한다. "네." 회의가 끝난다. 다들 자리로 돌아간다. 평소보다 조용하다.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내가 실수했나 싶다. 런웨이 얘기를 안 했어야 했나. 팀원들한테 압박을 준 건가.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진짜니까. 점심시간이다. 같이 밥 먹으러 간다. 근처 김치찌개집이다. 7000원짜리. "대표님 괜찮으세요?" 기획자가 묻는다. "네. 괜찮습니다." "투자 받을 수 있을까요?" "받을 겁니다." 자신감 있게 말한다. 그런데 속으로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밥을 먹는다. 김치찌개가 맵다. 밥을 말아 먹는다. 빨리 먹는다. 30분 후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아내에게 못하는 말 밤 11시에 집에 들어간다. 조용하다. 딸은 잤다. 아내는 거실 소파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다. 회사 일인가 보다. "왔어?" "응." 냉장고를 연다. 맥주가 있다. 하나 꺼낸다. 마신다. "오늘도 힘들었어?" 아내가 묻는다. "아니. 괜찮아." 거짓말이다. 힘들었다. 투자자한테 거절당했고, 팀원들한테 압박 줬고, 런웨이 계산하면서 한숨 쉬었다. 그런데 말 안 한다. 왜냐하면 아내도 힘들다는 걸 아니까. 대기업 마케터는 야근이 많다. 딸 육아도 대부분 아내가 한다. 내가 주말에도 일하니까. "너는?" 내가 묻는다. "나도 괜찮아. 내일 PT 있어서 자료 좀 보는 중." 둘 다 거짓말하고 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한다. 맥주를 다 마신다. 샤워하러 간다. 뜨거운 물을 맞는다. 5분 정도. 생각을 비운다. 그런데 안 비워진다. 런웨이 생각이 난다. 8개월. 237일. 샤워를 끝낸다. 침실로 간다. 아내는 아직 거실에 있다. 나는 침대에 눕는다. 핸드폰을 본다. 메일이 왔다. 투자자한테서. "안녕하세요 대표님. 검토 결과 저희 투자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20번째 거절이다.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천장을 본다. 숨을 쉰다. "다음 기회." 다음 기회는 없을 수도 있다. 8개월 후에는. 생각하기 싫다. 눈을 감는다. 스프레드시트의 세계 주말이다. 토요일 오전 10시. 딸이랑 놀이터에 갔어야 한다. 약속했다. 그런데 못 갔다. "아빠 일 있어. 미안해." 딸은 울었다. 아내가 데리고 나갔다. 표정이 안 좋았다. 나는 집에 혼자 있다. 노트북을 연다. 엑셀 파일을 연다. 새로운 시트를 만든다. "극한 시나리오"라는 이름을 붙인다. 만약 4개월 안에 투자 못 받으면? 계산한다. 직원을 줄인다. 8명을 5명으로. 개발 2명, 영업 1명, 나, CFO. 월 인건비 5800만원이 3600만원이 된다. 사무실을 옮긴다. 성수에서 구로로. 월세 180만원이 80만원이 된다. 마케팅을 끊는다. 500만원 절감. 이렇게 하면 월 소모가 7000만원에서 4500만원이 된다. 런웨이가 12개월이 된다. 그런데. 직원을 자르면 개발 속도가 느려진다. 제품을 못 만든다. 고객을 못 받는다. 매출이 안 는다. 투자자가 안 좋아한다. 결국 죽는다. 느리게. 이 시트를 지운다. 보기 싫다. 다른 시트를 만든다. "공격 시나리오". 만약 마케팅을 2배로 늘리면? 월 500만원을 1000만원으로. 신규 고객이 2배 늘어난다고 가정한다. MRR이 1200만원에서 2400만원이 된다. 그러면 런웨이는? 월 소모가 7500만원. 적자 5100만원. 런웨이 7개월. 1개월 줄어든다. 이것도 안 된다. 도박이다. 시트를 또 지운다. 세 번째 시트. "현실 시나리오". 아무것도 안 바꾼다. 그냥 간다. 8개월. 그 사이 투자 받는다. 받아야 한다. 받을 것이다. "받을 것이다." 혼잣말이다. 주문이다. 정오가 됐다. 배가 고프다. 냉장고를 연다. 김치가 있다. 밥을 한다. 김치만 먹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아내다. "놀이터 왔어. 딸이 아빠 생각난대." 영상통화를 켠다. 딸 얼굴이 보인다. "아빠!" 웃는다. "미안해. 다음 주에 꼭 같이 가자." "응!" 통화를 끊는다. 미안하다. 정말. 다시 노트북을 본다. 엑셀 파일이 열려 있다. 런웨이 8개월. 237일. 숫자를 바꿀 수 없다. 시간은 흐른다. 멈출 수 없다. 경쟁사 뉴스 월요일 오전. 출근했다. 슬랙에 링크가 하나 올라와 있다. 개발팀장이 공유했다. "경쟁사 A사, 시리즈B 80억 투자 유치." 기사를 연다. 읽는다. "A사는 창업 3년 만에 누적 투자 120억을 유치하며 시장 선도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월 매출 3억, 직원 40명 규모로 성장했다." 3년. 우리는 2년 6개월. 6개월 차이. 투자 120억. 우리는 3억. 매출 3억. 우리는 1200만원. 숫자가 다르다. 너무 다르다. 화가 난다. 아니 슬프다. 아니 둘 다다. "우리도 할 수 있어요." 개발팀장이 말한다. "네." 대답은 하는데 자신이 없다. A사 대표를 안다. 대학 선배다. 같이 술 마신 적도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다. 나보다 나은가? 모르겠다. 운이 좋았나? 그것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는 지금 런웨이 걱정 안 한다는 것이다. 80억 받았으니까. 3년은 더 버틸 수 있다. 나는? 8개월. 비교하기 싫다. 그런데 자꾸 비교된다. 점심시간. 밥을 먹는다. 팀원들이 A사 얘기를 한다. "저기 제품 써봤는데 별로던데요." "UI가 우리보다 못한 것 같아요." "고객 리뷰 보면 불만 많더라." 팀원들이 위로한다. 나를. 그런데 위로가 안 된다. 제품이 좋고 나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투자를 받았다는 게 중요하다. 돈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시간이 있다는 게. 밥을 먹는다. 맛이 없다. 밤의 회의실 밤 10시. 팀원들은 다 퇴근했다. CFO만 남았다. "대표님 얘기 좀 해요." CFO가 말한다. 회의실로 들어간다. 문을 닫는다. "런웨이 얘기해요." "8개월 남았어요. 아시잖아요." "네. 그런데 실제로는 6개월이에요." "뭐?" "예비비 빼면요. 갑자기 서버 터지거나 직원 한 명 더 뽑거나 하면 6개월이에요." 6개월. 180일. 계산이 틀렸다. 내가 낙관적으로 본 거다. "투자 미팅 어때요?" CFO가 묻는다. "20개 했어요. 다 거절이요." "다음 계획은?" "10개 더 잡았어요. 이번 달 안에." "가능성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해봐야죠." CFO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없다. 나도 없다. "대표님." CFO가 말한다. "최악의 경우 생각해봤어요?" "폐업?" "네." 생각해봤다. 매일 생각한다. 새벽 3시마다. "그때 가서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야 해요. 법인 정리하는 데도 시간 걸려요. 직원들 정리 해고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CFO는 항상 맞는 말을 한다. 그래서 싫다. 아니 고맙다. 복잡하다. "알겠어요. 정리해둘게요." 회의가 끝난다. CFO가 퇴근한다. 나는 남는다.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다. 불을 끈다. 어둡다. 창밖에 성수동 야경이 보인다. 불빛이 예쁘다. 저 건물들에도 스타트업이 있을 것이다. 그 대표들도 런웨이 걱정할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위로가 안 된다. 핸드폰을 꺼낸다. 엑셀 앱을 연다. 파일을 연다. 숫자를 본다. 6개월. 180일. 4320시간. 카운트다운이다. 멈출 수 없는. 투자자의 질문 수요일. VC 미팅이다. 강남역 근처 빌딩 12층. IR을 한다. 20분. 준비한 대로 말한다. 자신감 있게. 숫자를 보여준다. 성장률을 강조한다. "질문 있습니다." 파트너가 말한다. "네." "만약 투자 못 받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예상 못한 질문이다. 준비 안 했다. "...투자 받을 겁니다." "가정입니다. 만약이요." "피봇을 고려하겠습니다." "피봇해서 될까요?" "해봐야 알겠죠." 대답이 약하다. 나도 안다. "런웨이는 얼마나 남았죠?" "12개월입니다." "정말요?" 정말 아니다. 6개월이다. 그런데 말 못 한다. "네. 충분합니다." 파트너가 노트북을 본다. 뭔가 계산하는 것 같다. "대표님 월 소모 추정해보니까 7000만원 정도 되는데. 투자 받은 게 3억이고 지금 1년 반 지났으면 런웨이가 3개월 아닌가요?" 들켰다. "...매출이 있습니다. 그래서 12개월입니다." "매출로 소모 못 막잖아요. 지금 MRR이 1200만원이면." 말문이 막힌다. 파트너가 웃는다. 비웃는 게 아니다. 그냥 웃는다.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더 좋아요." "...6개월 남았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급하시죠?" "네." "그럼 밸류에이션 조정 가능하세요?" 투자받고 싶으면 지분 더 내놓으라는 뜻이다. "...검토하겠습니다." 미팅이 끝난다.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친다. 피곤해 보인다. 늙어 보인다. 36세가 46세 같다. 딸의 그림 금요일 밤. 일찍 들어갔다. 9시. 딸이 안 자고 기다렸다. "아빠!" 뛰어온다. 안아준다. 가볍다. 13킬로. "이거 봐." 딸이 종이를 보여준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다. 세 명이 있다. 큰 사람 두 명. 작은 사람 한 명. 가족이다. "우리야. 아빠 엄마 나." "예쁘다." "근데 아빠 얼굴이 좀 슬퍼." 그림을 자세히 본다. 정말 슬퍼 보인다. 입이 아래로 그어져 있다. "왜 슬프게 그렸어?" "아빠가 맨날 한숨 쉬잖아." 말이 없다. "아빠 힘들어?" 딸이 묻는다. "아니야. 안 힘들어." "거짓말. 엄마가 그랬어. 아빠 요즘 힘들대." 아내가 얘기했나 보다. 딸한테까지.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나아질 거야." "진짜?" "진짜." 거짓말이다. 모르겠다. 6개월 후 어떻게 될지. 딸을 재운다. 동화책을 읽어준다. "아기돼지 삼형제". 늑대가 나온다. 집을 부순다. 돼지들이 도망간다. 딸이 잠든다. 숨소리가 고르다. 거실로 나온다. 아내가 있다. "그림 봤어?" 아내가 묻는다. "응." "미안해. 애한테까지 티가 났나봐." "괜찮아." "안 괜찮아. 나도 알아. 요즘 너 상태." 말이 없다. "투자 안 되고 있지?" "...응." 처음 인정한다. 아내한테. "그럼 어떡하려고?"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최악의 경우 접어도 돼. 나 월급 나오잖아. 우리 살 수 있어." 눈물이 날 뻔한다. 참는다. "조금만 더 해볼게." "6개월?" "응. 6개월."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 말 안 한다. 나는 그림을 본다. 딸이 그린. 슬픈 얼굴의 아빠. 바꾸고 싶다. 웃는 얼굴로. 6개월 안에. 다시 엑셀 앞에서 토요일 새벽 4시. 또 눈이 떴다. 노트북을 연다. 엑셀을 연다. 숫자를 본다. 6개월. 180일. 4320시간. 아니다. 하루 지났다. 179일. 4296시간. 시간은 흐른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새로운 계산을 한다. 만약 다음 주 VC 미팅에서 투자 받으면? DD 2주. 계약 2주. 입금 1주. 총 5주. 그러면 런웨이가 5개월 남았을 때 돈이 들어온다. 만약 안 받으면? 다음 미팅. 또 DD. 또 계약. 시간이 간다. 3개월 남았을 때 돈이 들어올 수도. 아니면 안 들어올 수도. 만약 끝까지 안 받으면? 6개월 후. 통장 잔고 0원. 직원들 월급 못 줌. 폐업 공고. 법인 정리. 빚 청산. 그 다음은? 이력서 쓴다. 취업한다. 37세 경력단절 전 창업자. 받아주는 데 있을까. 생각하기 싫다. 시트를 하나 더 만든다. "희망 시나리오". 만약 제품이 대박나면? 입소문 난다. 고객이 몰린다.
- 21 Dec, 2025
'데이터로 보여줘' - 직관은 믿지 않는 PM의 습관
'데이터로 보여줘' - 직관은 믿지 않는 PM의 습관 네이버에서 배운 것 네이버 PM 5년 했다. 그곳에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숫자 없는 의견은 의견이 아니라는 것. "이거 좋을 것 같은데요." "사용자들이 원할 것 같아요." "경쟁사도 이렇게 하던데요." 신입 때 이런 말 했다가 선배한테 들었다. "데이터는?" 그때부터다. 모든 회의에 숫자 들고 들어갔다. 클릭률, 체류시간, 전환율, 이탈률. 로그 분석, A/B 테스트, 코호트 분석. 말할 때마다 근거를 댔다. 5년 하다 보니 몸에 배었다. 창업하고도 똑같다.팀원들과의 온도차 창업 초기, 팀원들이 힘들어했다. "대표님, 이 기능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아요." "데이터는?" "...아직 없는데 사용자들이 원할 것 같아서요." "어떤 근거로?" 기획자가 표정 굳는 게 보였다. 나는 악역이 되어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런웨이 8개월 남은 스타트업이다. 틀린 선택 한 번에 회사 죽는다. 감으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 실업자다. 개발자가 말했다. "이 기술 트렌디해요. 적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ROI는?" "...일단 해보고 측정하면 안 될까요?" "개발 기간 2주. 그 2주면 핵심 기능 고도화 할 수 있어. 그게 더 급해." 차갑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내 역할이다. 영업팀이 보고했다. "A사가 관심 있대요. 미팅 잡을까요?" "매출 규모는?" "중소기업인데..." "직원 수, 예상 계약 금액, 결제 주기는?" 디테일 물어보면 다들 준비 안 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물어보는 거다.새벽 3시의 스프레드시트 오늘도 잠 못 잔다. 침대에 누웠는데 걱정이 올라온다. '이번 달 MRR 목표 달성 가능할까?' 일어나서 노트북 켠다. 아내가 뒤척인다. 미안하지만 확인 안 하면 못 잔다. 스프레드시트 연다. 우리 회사 대시보드다.이번 달 신규 계약: 3건 (목표 5건) 평균 계약 금액: 42만원 (목표 50만원) 해지율: 8% (목표 5% 이하) 남은 영업일: 9일계산기 두드린다. 최선의 시나리오, 최악의 시나리오, 현실적 시나리오. 세 개 다 돌려본다. 최선: 5건 더 계약, 평균 55만원 = 목표 달성 최악: 2건 계약, 1건 해지 = 목표 60% 달성 현실: 3건 계약, 평균 45만원 = 목표 75% 달성 75%. 나쁘지 않다. 하지만 VC한테는 안 좋게 보인다. "성장 둔화"라고 쓸 거다. 또 다른 시트 연다. 캐시플로우다. 현금: 1억 3200만원 월 고정비: 1650만원 런웨이: 8개월 직원 한 명 더 뽑으면? 7개월. 마케팅 비용 늘리면? 6.5개월. 사무실 이전하면? 5개월. 숫자가 머릿속을 돈다. 시나리오가 끝없이 이어진다. 새벽 4시가 됐다. 겨우 노트북 덮는다.투자자 미팅에서 IR 준비할 때도 똑같다. 덱 50번 넘게 고쳤다. 초기 버전은 비전, 미션, 팀 소개로 가득했다. VC 두 군데 만났다. 반응이 미지근했다. "트랙션은?" "성장률은?" "유닛 이코노믹스는?" 그제야 알았다. 투자자들도 숫자로 본다. 당연하다. 그들도 LP한테 설명해야 한다. 덱을 다시 짰다.슬라이드 1: MRR 그래프 (작년 대비 380% 성장) 슬라이드 2: CAC vs LTV (LTV/CAC 비율 3.2) 슬라이드 3: 리텐션 커브 (12개월 90% 유지) 슬라이드 4: 파이프라인 (2억 규모 계약 논의 중)스토리는 뒤로 뺐다. 숫자를 먼저 보여줬다. 미팅 분위기가 달라졌다. 20분짜리 미팅이 1시간으로 늘었다. 질문이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이 성장률을 어떻게 유지할 건가요?" "이 세그먼트에서 CAC가 낮은 이유는?" "엔터프라이즈로 확장 계획은?" 좋은 신호다. 관심 있다는 뜻이다. 한 VC 파트너가 말했다. "데이터 준비 잘하셨네요. PM 출신이라 그런가?" 맞다. PM 출신이라 그렇다. 숫자가 주는 안정감 사람들은 묻는다. "숫자에 집착하는 거 아니냐?" 맞다. 집착한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숫자는 거짓말 안 한다. 사람은 착각하고, 희망회로 돌리고, 편향에 빠진다. 하지만 숫자는 그냥 있다. "이거 잘될 것 같아요." "왜?" "느낌이 좋아요." 느낌은 믿을 수 없다. 특히 창업자의 느낌은. 우리는 우리 아이디어에 빠져 있다. 객관적으로 못 본다. "클릭률이 15% 떨어졌어요." "왜?" "A/B 테스트 결과 새 버튼 색상이 문제였어요." 이건 명확하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다시 바꾸면 된다. 숫자는 방향을 알려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감이 아니라 근거로. 특히 힘들 때 숫자가 버팀목이 된다. 투자 거절당했을 때, 직원이 퇴사했을 때, 경쟁사가 투자받았을 때. 불안하다. 혼란스럽다. 그때 스프레드시트 연다. 우리 MRR 그래프 본다. 작년 이맘때보다 380% 올랐다. 리텐션은 90%다. 고객들은 우리 제품 쓰고 있다. "괜찮아. 우리 잘하고 있어." 숫자가 말해준다. 직관을 버린 건 아니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직관을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검증한다. 좋은 아이디어는 직관에서 나온다. "이거 되겠는데?" 하는 느낌. 그건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검증해야 한다. 기획자가 말했다. "온보딩 플로우 바꾸면 전환율 오를 것 같아요." "좋아. 어떻게 검증할까?" "A/B 테스트 돌려볼게요. 100명씩 나눠서 2주 돌리고 비교하면 될 것 같아요." "좋아. 그렇게 하자." 직관으로 시작하고, 데이터로 검증한다. 이게 내 방식이다. 작년에 큰 결정했다. 가격 정책 바꾸기. 월 20만원에서 40만원으로. 직관적으로는 무서웠다. "고객들 다 떠나는 거 아냐?" 하지만 데이터 봤다. 우리 제품 쓰는 고객들의 ROI 계산했다. 평균적으로 월 300만원어치 시간을 절약해준다. 40만원은 싸다. 인터뷰 10개 돌렸다. 7개 기업이 "40만원이어도 쓸 것 같다"고 답했다. 가격 올렸다. 해지율 2% 올랐다. 하지만 ARPU는 80% 올랐다. 매출은 76% 증가했다. 맞는 결정이었다. 데이터가 증명했다. 팀원들도 바뀌고 있다 요즘 팀원들이 달라졌다. 기획자가 회의에 온다. 손에 프린트 들고. "대표님, 이 기능 제안하려고요." "데이터는?" "여기요. 사용자 인터뷰 15건, 경쟁사 벤치마크, 예상 개발 공수 3주, 예상 MAU 증가율 25%." 웃음이 나온다. 배웠구나. 개발자도 마찬가지다. "이 기술 스택 바꾸고 싶은데요." "이유는?" "현재 응답속도 평균 2.3초, 이걸로 바꾸면 0.8초 예상돼요. 사용자 만족도 15% 오를 거예요. 레퍼런스 첨부했어요." 전보다 대화가 편해졌다. 근거 있는 제안은 받아들이기 쉽다. 영업팀장이 말했다. "이번 주 미팅 5건 잡혔어요. 다 중견기업이고, 평균 예상 계약 금액 80만원이에요. 확률은 60%로 보고 있어요." 구체적이다. 좋다. 처음엔 내가 독재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대표가 숫자만 밝힌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게 우리를 살리는 방법이라는 걸. 감으로 가다가 망한 스타트업 수없이 봤다.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도 외롭다 솔직히 말하면, 가끔 외롭다. 창업 동기들 만나면 이야기가 다르다. "우리는 비전이 중요하다고 봐. 숫자는 나중 문제지." "일단 만들어봐야 알 수 있잖아." "너무 데이터에 얽매이면 혁신 못 해." 그들 말도 일리 있다. 하지만 나는 동의 못 한다. 비전도 중요하다. 하지만 검증 없는 비전은 망상이다. "너 너무 빡빡한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회사 책임은 내가 진다. 팀원 8명 인생이 달렸다. 그들 가족까지 생각하면 20명 넘는다. 그 무게를 느낀다. 매일 새벽 3시에. 그래서 더 숫자를 본다. 불안을 줄이는 방법이다. 아내가 묻는다. "회사 어때?" "괜찮아. MRR 12% 올랐어." "...그게 아니라 네가 어떠냐고." 말문이 막힌다. 나는 숫자로 대답하는 버릇이 생겼다. 감정도 수치화한다. "피곤도 7/10, 스트레스 6/10, 희망 지수 8/10." 아내가 웃는다. 씁쓸하게. 숫자 뒤의 사람들 요즘 깨닫는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이번 달 해지율 8%." 그 8% 안에는 우리 제품에 실망한 사람이 있다. 더 나은 대안을 찾은 사람이 있다. 예산이 부족해진 회사가 있다. "MAU 2300명." 그 2300명은 매일 우리 제품 켜는 사람들이다. 업무 시작할 때, 보고서 쓸 때, 데이터 찾을 때. 우리가 없으면 불편한 사람들. 숫자만 보면 차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안을 보면 따뜻하다. 지난주에 고객사 방문했다. 중소기업 인사팀이었다. "대표님, 이거 진짜 좋아요. 우리 업무시간 하루에 2시간 줄었어요." 팀장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분 뒤로 직원들이 우리 제품 쓰는 게 보였다. 그때 느꼈다. 숫자는 추상적이지 않다. 숫자는 사람이다. "리텐션 90%"는 우리를 계속 선택하는 2070명이다. "MRR 1200만원"은 우리를 믿고 돈 내는 회사들이다. "성장률 380%"는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봐야 한다. 숫자는 책임이다. 내일도 스프레드시트 오늘 밤도 잠 못 잘 것 같다. 프리A 투자 미팅이 이틀 남았다. 덱 마지막 점검해야 한다. 재무 모델 다시 돌려봐야 한다. 경쟁사 숫자 업데이트해야 한다. 노트북 다시 켠다. 아내는 이미 잠들었다. 스프레드시트가 반긴다. 익숙한 화면이다. 셀과 함수와 그래프. 내 언어다. PM 시절 선배가 했던 말 떠오른다. "데이터는 네 친구다. 거짓말 안 하고, 배신 안 하고, 항상 진실을 말해줘." 맞다. 데이터는 내 친구다. 이 외로운 창업 여정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 직관은 중요하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직관은 위험하다. 비전은 필요하다. 하지만 근거 없는 비전은 공허하다. 열정은 좋다. 하지만 방향 없는 열정은 낭비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데이터로 보여줘." 이게 내 습관이다. 네이버에서 배웠고, 창업하며 더 깊어졌다. 틀릴 수도 있다. 너무 빡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런웨이 8개월. 팀원 8명. 투자 미팅 5개. 숫자는 명확하다. 갈 길도 명확하다. 새벽 4시다. 겨우 노트북 덮는다. 내일 또 스프레드시트 열 것이다. 그리고 물을 것이다. "데이터는?"숫자는 차갑지만, 그게 우리를 살린다.
- 16 Dec, 2025
'일단 해보자' - 내 입버릇이 된 말
"일단 해보자" - 내 입버릇이 된 말 새벽 3시의 결정 또 눈이 떴다. 3시 17분. 슬랙을 켰다. 개발팀 대화방에 불이 켜져 있다. 민준이가 아직도 코드 짜고 있나 보다. '대표님, API 응답속도 개선안 3가지 나왔습니다. 어떤 걸로 할까요?' 메시지가 2시 38분에 왔다. 읽었다. 답을 못 하고 있다. 1안은 안전하지만 효과가 적다. 2안은 효과는 좋은데 개발 기간이 2주 더 필요하다. 3안은 도박이다. 잘되면 대박인데 실패하면 롤백하는 데만 일주일. 런웨이는 8개월. 고객사는 다음 주 월요일에 데모를 본다. 투자자는 '트랙션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확신이 없다. 그런데 결정은 해야 한다. "일단 3안으로 해보자. 금요일까지 프로토타입만 돌아가게. 안 되면 그때 2안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4시 12분. 확신은 없지만 움직이는 게 답이다. 언제나 그랬다.네이버를 나온 이유 5년 전에는 달랐다. 네이버 PM 5년차. 기획서 쓰고, 개발팀이랑 조율하고, 데이터 보고, 보고서 만들고. 그때는 확신이 있을 때만 움직였다. A/B 테스트 3번 돌리고, 사용자 인터뷰 20명 하고, 경쟁사 분석 30페이지 만들고. 그다음에 '이거다' 싶으면 기획서를 냈다. 승인 과정도 길었다. 팀장, 실장, 본부장. 3단계를 거쳐야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안전했다. 월급날은 정확했고, 복지는 좋았고, 커리어는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답답했다. '이거 해보면 될 것 같은데...' '지금 시작하면 경쟁사보다 3개월 빠른데...' '사용자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그런 생각들이 기획서 검토 단계에서 죽었다. 29살 여름, 퇴사했다. 상사가 물었다. "확신 있어?" "없습니다. 근데 일단 해보려고요." 그때부터였다. 이 말이 내 입버릇이 된 게.첫 실패, 그리고 두 번째 시작 처음 만든 서비스는 망했다. 6개월 만들었다. B2C 생산성 앱. 할 일 관리하고 습관 트래킹하고 목표 설정하고. 확신이 있었다. '이건 된다.' 런칭했다. 다운로드 132개. 유지율 8%. 매출 0원. 9개월 버텼다. 안 됐다. 돈이 떨어졌다. 팀원 2명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해산했다. 32살 겨울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다시 취업할래?" "아니." "그럼?" "일단 다시 해보려고." 확신은 없었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B2B로 갔다. 기업용 업무 자동화. 시장은 작지만 명확했다. 피봇이었다. 방향을 180도 틀었다. 주변에서 물었다. "이번엔 확신 있어?" "없어. 근데 일단 해보는 거지." 3개월 만에 첫 고객사가 생겼다. 월 30만원. 그다음 달에 2개 더. 6개월 뒤 시드 투자 3억. 지금 2년 6개월차다. 망하지 않았다. 아직은.매일 아침의 불확실성 월요일 아침 8시. 팀원들이 모였다. 주간 회의. "이번 주 목표입니다." 화이트보드에 썼다. 신규 고객사 미팅 3건. 제품 업데이트 2개. 투자자 IR 1건. 영업팀 수진이가 물었다. "대표님, A사랑 계약 될 것 같아요?" 모르겠다. 지난주 미팅 분위기는 좋았다. 근데 결정권자가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2주째 답이 없다. "일단 팔로업 계속하자. 수요일에 한 번 더 전화해봐." 개발팀 민준이가 말했다. "대표님, 신기능 QA 나왔는데요. 버그가 17개예요." 많다. 목요일까지 고객사 데모인데. "심각한 거 5개만 골라. 그거 먼저 고치고 나머지는 다음 주. 일단 돌아가게만." 기획팀 지은이가 물었다. "대표님, 다음 분기 로드맵 확정해야 하는데요." 확정? 다음 달 현금흐름도 확신 못 하는데 다음 분기? "일단 초안대로 가자. 투자 들어오면 조정하고." 회의가 끝났다. 1시간. 확신한 건 하나도 없다. 근데 다들 움직인다. 그게 스타트업이다. 투자자 앞에서 IR 자료를 50번 고쳤다. 슬라이드 18장. 문제 정의, 솔루션, 시장 규모, 비즈니스 모델, 트랙션, 팀 소개, 재무 계획. 숫자를 봤다. MRR 1200만원. 성장률 월 15%. 이탈률 8%.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경쟁사 데이터는 공개 안 돼서 비교도 안 된다. VC 미팅 20개를 잡았다. 10개는 첫 미팅에서 거절당했다. '아직 이르다', '시장이 작다', '팀이 약하다'. 5개는 '보류'. '트랙션 더 보고 싶다', '다음 분기에 다시 얘기하자'. 5개는 진행 중. 2차 미팅까지 갔다. 실사 요청받았다. 화요일 오후 3시. K벤처스 파트너님 미팅. "박 대표님, 확신 있으세요? 이 시장에서 1등 할 수 있다고?" 확신? 없다. 근데 대답했다. "확신보다는 실행력이라고 봅니다. 지난 2년간 월 평균 2.3개 가설을 테스트했고, 피봇도 3번 했습니다. 틀리면 빨리 인정하고 방향 바꾸는 게 저희 강점입니다." 파트너님이 웃었다. "솔직하시네요." "일단 해보고 데이터로 판단하는 게 저희 방식입니다." 미팅이 끝났다. 1시간 30분. 결과는 모른다. 2주 뒤에 답 준다고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한숨 쉬었다. 확신 있냐고? 매일 불안한데. 그래도 움직인다. 그게 답이니까. 금요일 밤 11시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팀원들은 9시에 다 갔다. "대표님도 들어가세요." 웃으면서 "곧 간다" 했다. 노트북을 켰다. 엑셀 파일. 'Cash Flow 2024-2025'. 시나리오를 3개 만들었다. 보수: A사 계약 무산. 신규 고객 월 1개. 런웨이 6개월. 9월 파산. 중립: A사 계약 성공. 신규 고객 월 2개. 투자 실패. 런웨이 11개월. 내년 2월 위기. 낙관: A사 계약 성공. 신규 고객 월 3개. 투자 5억 유치. 런웨이 24개월. 숨통. 숫자를 봤다. 보수 시나리오 확률 30%. 중립 50%. 낙관 20%. 계산기를 두드렸다. 보수로 가면 7월부터 월급 못 줄 수도 있다. 심장이 빨라진다. 그래도. 일단 내일 출근한다. 월요일 고객사 미팅 준비한다. 화요일 개발 스프린트 회의 한다. 수요일 A사한테 전화한다. 확신은 없다. 성공할지 망할지 모른다. 근데 멈추면 확실히 망한다. 움직이면 가능성이라도 있다. 노트북을 닫았다. 집에 가자. 내일도 '일단 해보자'고 말할 거다. 그게 내 입버릇이니까. 확신 없이 걷는 법 창업한 지 2년 6개월. 확신했던 날은 하루도 없다. '이 기능이 맞을까?' 모른다. 만들어본다. 고객 반응 본다. 틀리면 고친다. '이 가격이 적정할까?' 모른다. 테스트해본다. 이탈률 본다. 조정한다. '이 사람을 뽑아야 할까?' 모른다. 일단 채용한다. 3개월 보면 안다. '투자가 들어올까?' 모른다. 계속 만난다. 거절당한다. 다시 만난다. 네이버 다닐 때는 확신이 있어야 움직였다. 지금은 반대다. 움직여야 확신이 생긴다. 아니, 확신은 안 생긴다. 그냥 다음 단계가 보인다. 그럼 된 거다. 밤 11시 47분. 집 앞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조용하다. 다들 잤나 보다. 딸 방문을 열었다. 자고 있다. 3살. 토요일에 놀아줘야지. 침대에 누웠다. 아내가 자면서 중얼거렸다. "늦었네." "응. 미안." "괜찮아. 힘들어?" "응." "그래도 할 거지?" "응. 일단 해보는 거지 뭐." 아내가 웃었다. 다시 잤다. 나도 눈을 감았다. 내일 또 '일단 해보자'고 말할 거다. 확신은 없다. 근데 괜찮다. 확신 없이 걷는 법을 배웠으니까.확신은 움직인 뒤에 온다. 아니, 안 와도 된다. 그냥 다음 발자국만 보이면 돼.
- 15 Dec, 2025
카페인 5잔, 위장 2개. 창업의 대가
카페인 5잔, 위장 2개. 창업의 대가 첫 잔: 새벽 3시 눈을 뜬다. 새벽 3시 12분. 알람도 안 울렸는데 눈이 떠진다. 이게 3개월째다. 옆에 아내는 자고 있다. 숨소리 고르다. 딸은 옆방에서 잘 거다. 슬랙을 확인한다. 개발팀 준호가 새벽 2시에 메시지를 남겼다. "배포 롤백했습니다. 내일 아침 브리핑 드리겠습니다." 가슴이 철렁한다. 거실로 나와서 커피를 내린다. 핸드드립. 조용히. 아무도 안 깨우게. 첫 잔을 마신다. 쓰다. 설탕 안 넣는다. 이제 단맛은 사치다. 노트북을 연다. 깃허브를 확인한다. 커밋 로그를 본다. 무슨 문제인지 대충 보인다. API 응답 시간이 터진 거다. "아, 씨..." 혼잣말이다. 작게. 아내 깨면 안 된다.둘째 잔: 출근길 7시 아내가 일어났다. 딸도 깼다. "오빠, 또 일찍 일어났어?" "응. 일 좀." 거짓말은 아니다. 사실이다. 근데 전부는 아니다. 잠이 안 온다는 말은 안 한다. 딸이 안긴다. "아빠!" 안아준다. 10초.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다. 지금은. "아빠 회사 가야 돼." "또?" 미안하다. 집을 나선다. 편의점에 들른다. 아메리카노 톨사이즈. 둘째 잔. 지하철에서 마신다. 뜨겁다. 데인다. 상관없다. 슬랙을 다시 본다. 준호가 30분 전에 또 메시지를 남겼다. "원인 파악했습니다. DB 쿼리 최적화 필요합니다. 오늘 오전 중 해결 가능합니다." 숨을 쉰다. 괜찮다. 될 거다. 항상 그랬다.셋째 잔: 오전 회의 10시 사무실에 왔다. 8시 15분이다. 팀원들은 9시 30분에 온다. 1시간 15분이 내 시간이다. 현금흐름표를 연다. 스프레드시트. 세 개 시트. 보수/중립/낙관. 보수 시나리오: 런웨이 6개월. 중립 시나리오: 런웨이 8개월. 낙관 시나리오: 런웨이 11개월. 숫자를 만진다. 변수를 조정한다. 인건비 10% 줄이면? 안 된다. 사무실 이전하면? 2개월 번다. 매출 20% 늘면? 3개월 번다. 결론: 프리A 투자 받아야 한다. 6개월 안에. 커피를 마신다. 셋째 잔. 자판기 커피. 500원. 맛없다. 마신다. 팀원들이 들어온다. 인사한다. 밝게. 항상 밝게. "오늘 회의, 30분만 하자. 집중해서." 준호가 보고한다. 문제 해결했다. 배포 다시 한다. 오후 2시. "고생했어. 새벽까지 고생 많았어." "괜찮습니다. 대표님도 새벽에 확인하셨잖아요." 티가 났나. 넷째 잔: 점심 후 2시 점심은 팀원들이랑 먹었다. 성수동 국밥집. 8000원. 대표가 샀다. 64,000원. 런웨이에서 64,000원 줄었다. 계산하지 말자. 이럴 때가 아니다. 팀 분위기가 중요하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배포가 시작됐다. 모니터링한다. 준호랑 같이. 5분. 10분. 15분. "정상입니다." "좋아. 고객사들 확인해보자." 주요 고객사 3곳에 전화한다. 문제없다. 다행이다. 커피를 마신다. 넷째 잔. 또 자판기. 속이 쓰리다. 아까부터 쓰렸다. 참는다. 가방에 위장약이 있다. 먹는다. 물 없이. 씹어서. 쓰다.다섯째 잔: 저녁 8시 팀원들 퇴근했다. 6시 30분. "대표님은요?" "나 좀 있다 갈게. 먼저 가." 혼자 남았다. 조용하다. 좋다. IR 자료를 연다. 53차 수정본. 다음 주 화요일. VC 미팅. 이번이 진짜다. 느낌이 온다. 슬라이드를 본다. 트랙션 페이지. 그래프가 올라간다. 근데 완만하다. 가파르지 않다. "더 가파르게 보이게 할 수 없나..." 축을 조정한다. Y축 범위를 줄인다. 그래프가 가파라진다. 근데 속이는 거다. 되돌린다. 숫자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 나한테도. 투자자한테도. 커피를 마신다. 다섯째 잔. 편의점에서 사온 것. 차갑다. 식었다. 속이 또 쓰리다. 위장약 또 먹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아내다. "오빠, 언제 와?" "9시쯤?" "또 야근이야?" "미안." "딸이 아빠 보고 싶대." 칼이 꽂힌다. "...내일 일찍 들어갈게." "그래. 조심히 와." 끊는다. 미안하다. 진심이다. 근데 지금은 안 된다. 위장 2개 창업하기 전 건강검진 받았다. 위: 정상 간: 정상 신장: 정상 작년에 또 받았다. 위: 만성 위염 소견 간: 경미한 지방간 신장: 정상 올해는 안 받았다. 받기 싫다. 결과가 무섭다. 커피를 5잔 마신다. 하루에. 매일. 첫 잔: 새벽 3시, 불안을 삼킨다. 둘째 잔: 출근길 7시, 각성한다. 셋째 잔: 오전 10시, 집중한다. 넷째 잔: 점심 후 2시, 버틴다. 다섯째 잔: 저녁 8시, 끝까지 간다. 위장약도 5알 먹는다. 하루에. 매일. 아침 1알, 점심 1알, 저녁 1알, 밤 2알. 이게 창업의 대가다. 커피 5잔 = 위장약 5알 = 런웨이 8개월 계산이 맞다. 멈출 수 없다 커피를 줄여야 한다는 걸 안다. 의사가 말했다. 작년에. "스트레스 관리하시고, 카페인 줄이세요." 알고 있다. 근데 안 된다. 새벽 3시에 눈 뜨면 커피 마셔야 정신 차린다. 출근길에 안 마시면 회의 때 멍하다. 오전에 안 마시면 집중 안 된다. 오후에 안 마시면 졸린다. 저녁에 안 마시면 일 못 끝낸다. 그래서 마신다. 5잔. 매일. 위가 아프다. 속이 쓰리다. 알고 있다. 근데 멈추면 팀이 멈춘다. 회사가 멈춘다. 가족이 멈춘다. 나는 멈출 수 없다. 그래서 마신다. 계산 런웨이 8개월. 프리A 투자 받으면 18개월 더 간다. 18개월이면 PMF 찾을 수 있다. 아마도. PMF 찾으면 시리즈A 간다. 시리즈A 받으면 팀 키운다. 마케팅 한다. 성장한다. 성장하면 엑싯이든 IPO든 한다. 그때 되면 쉴 수 있다. 아마도. 커피 5잔 x 8개월 = 1,200잔. 위장약 5알 x 8개월 = 1,200알. 대가: 위장 하나. 괜찮다. 창업가는 위장 2개 있어야 한다. 하나는 커피 마시고, 하나는 스트레스 받는다. 나는 하나밖에 없다. 근데 2개 역할을 한다. 계산 맞다. 내일도 내일도 새벽 3시에 깰 거다. 첫 잔 마실 거다. 쓰다고 느낄 거다. 마실 거다. 출근할 거다. 둘째 잔 마실 거다. 회의할 거다. 셋째 잔 마실 거다. 배고플 거다. 넷째 잔 마실 거다. 야근할 거다. 다섯째 잔 마실 거다. 속 쓰릴 거다. 위장약 먹을 거다. 집 갈 거다. 아내한테 미안할 거다. 딸 얼굴 못 볼 거다. 자고 있을 거다. 침대에 누울 거다. 잠 못 잘 거다. 새벽 3시에 깰 거다. 반복이다. 이게 창업이다.커피 식었다. 다섯째 잔. 다 마신다. 쓰다. 괜찮다. 익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