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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 05 Jan, 2026
개발 4명, 기획 1명, 디자인 1명, 영업 2명. 그리고 나
개발 4명, 기획 1명, 디자인 1명, 영업 2명. 그리고 나 조직도를 볼 때마다 조직도 파일을 열었다. 개발 4명, 기획 1명, 디자인 1명, 영업 2명. 그리고 맨 위에 나. CEO 박창업. 근데 내 밑에 괄호가 있다. (기술 고문 겸임) (영업 총괄 겸임) (재무 담당 겸임) 투자자한테 보여줄 때는 이 괄호를 지운다. "8명의 탄탄한 조직"이라고 말한다. 혼자 있을 땐 괄호를 다시 넣는다. 현실이니까.월요일 아침 9시 팀원들이 출근한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나는 이미 두 시간 전부터 있었다. 주말 동안 밀린 개발팀 이슈 확인했다. 깃헙 PR 10개, 코멘트 달았다. 9시 30분, 위클리 미팅. 개발팀장 민수가 보고한다. "API 연동 일정이 3일 밀렸습니다." 고개 끄덕였다. "괜찮아, 어떤 부분이 막혔어?" 기술적인 얘기가 10분. 나도 전 개발자니까 이해한다. 아니, 이해해야 한다. "그럼 내가 그 부분 코드 한번 봐볼게. 오늘 중으로 방향 잡자." 민수 표정이 밝아진다. "감사합니다!" CEO가 기술 고문도 하는 회사. 8명 스타트업의 현실이다.화요일 오후 2시 영업팀 지호가 노크한다. "대표님, 잠깐 시간 되세요?" 회의실로 갔다. "○○기업 미팅 어땠어?" "관심은 있는데, 기술 검증을 원합니다." 알았다는 표정 지었다. "언제?" "이번 주 금요일요." 캘린더 확인했다. VC 미팅 2개, 개발 스프린트 리뷰, 급여 이체. "내가 갈게." 지호가 미안한 표정이다. "제가 같이..." "너는 다음 주 ○○ 미팅 준비해. 그게 더 중요해." 영업 2명인데 둘 다 주니어다. 시니어 뽑을 여유가 없다. 그래서 큰 딜은 내가 직접 나간다. CEO가 영업 총괄도 하는 회사. 런웨이 8개월의 현실이다. 수요일 밤 10시 사무실에 나 혼자 남았다. 노트북 두 개 켰다. 왼쪽: 엑셀. 현금흐름표. 오른쪽: 슬랙. 개발팀 채널. 현금흐름표 먼저 봤다. 이번 달 매출 1200만원. 지출 5800만원. 급여 3600만원. 사무실 180만원. AWS 220만원. 기타 1800만원. 마이너스 4600만원. 통장 잔고 3억 6800만원. 8개월. 정확히는 7.9개월. 계산기 두드렸다. 시나리오 3개. 보수: 매출 월 5% 성장 → 6개월 후 투자 필요 중립: 매출 월 15% 성장 → 5개월 후 투자 필요 낙관: 매출 월 30% 성장 → 그래도 4개월 후 투자 필요 어떻게 해도 투자 받아야 한다.목요일 오전 11시 회계사한테 전화 왔다. "대표님, 부가세 신고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메일 열었다. 첨부파일 5개. 30분 걸렸다. 매입 매출 확인하고. 계정 분류 체크하고. 승인 버튼 눌렀다. CFO 없다. 경리 직원도 없다. 세무사가 정리는 해주지만. 최종 결정은 내가 한다. CEO가 재무 담당도 하는 회사. 시드 스테이지의 현실이다. 점심시간. 팀원들이랑 같이 나갔다. 성수동 파스타 집. 다들 편하게 얘기한다. "주말에 영화 봤는데요." "요즘 이 게임 재밌어요." 나도 웃으면서 듣는다. 근데 머릿속은 다르다. '금요일 미팅 자료 준비했나?' 'API 이슈 해결 방법 찾았나?' '다음 주 VC 미팅 시나리오는?' "대표님, 괜찮으세요?" 디자이너 수진이 물었다. "응? 아, 괜찮아. 파스타 맛있다." 다시 웃었다. 팀원들 앞에서는 불안한 티 내면 안 된다. 리더의 불안은 전염된다. 그래서 밥 먹을 때만큼은. 진짜로 편한 척한다. 금요일 오후 4시 ○○기업 미팅. 강남역 근처 그들의 사무실. 상무님, 팀장님, 담당자 3명. 우리 쪽은 나 혼자. "소개 부탁드립니다." 30분 발표했다. 제품 데모 보여주고. 기술 스택 설명하고. ROI 계산해서 보여주고. 질문 20개 받았다. 기술 질문 10개. 영업 질문 10개. 다 답했다. CEO니까. 기술 고문이니까. 영업 총괄이니까. "검토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익숙한 멘트다. 악수하고 나왔다. 지하철 탔다. 성수역 도착. 사무실 가는 길. 편의점 들렀다. 커피 하나 샀다. 오늘 여섯 번째다. 금요일 밤 11시 급여 이체했다. 8명. 총 3600만원. 한 명씩 확인하면서 이체했다. 민수, 지호, 수진, 영희, 태양, 준석, 미래, 현우. 통장 잔고 3억 3200만원. 다음 달 급여일까지 30일. 그 사이에 매출 1200만원 더 들어온다. 지출은 2200만원 나간다. 다음 달 이맘때쯤엔 3억 2200만원. 계산이 자동으로 된다. 매일 보는 숫자니까. 슬랙 열었다. 개발팀 채널. "다들 수고했어요. 주말 푹 쉬세요!" 단톡방에도 썼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주에 봬요!" 팀원들 답장 왔다. "대표님도 쉬세요!" "주말 잘 보내세요~" 노트북 덮었다. 가방 챙겼다. 불 끄고 나왔다. 택시 탔다. 집까지 15분. 창 밖을 봤다. 금요일 밤 성수동. 불 켜진 사무실들. 저 안에도 나 같은 사람 있겠지. 토요일 오전 10시 딸이 깼다. "아빠!" 안아줬다. "우리 공주 잘 잤어?" 아내가 부엌에서 나왔다. "어제도 늦었어?" "응. 급여 이체하고." 더 이상 안 물었다. 아내도 안다. 매달 똑같으니까. "오늘은 같이 있어줄 수 있어?" "오전까진 괜찮아. 오후에 IR 자료 좀..." 아내 표정이 굳었다. "미안. 다음 주엔 꼭..." "됐어. 알아서 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딸이 내 얼굴 봤다. "아빠, 놀아줘!" "그래, 놀자. 뭐 하고 싶어?" "공원!" "좋아, 공원 가자." 노트북은 가방에 넣었다. 공원 벤치에서 열 수도 있으니까. 일요일 새벽 2시 잠이 안 왔다. 노트북 열었다. VC 미팅 자료. 50번째 수정. 슬라이드 15장.문제 정의 솔루션 시장 규모 비즈니스 모델 트랙션 팀 소개 재무 계획 투자 제안팀 소개 페이지에서 멈췄다. 개발 4명, 기획 1명, 디자인 1명, 영업 2명. 그리고 CEO. "전 네이버 출신 대표, 5년간 PM 경험" "시니어 개발자 4명으로 구성된 탄탄한 기술팀" "B2B 영업 경험자로 구성된 영업조직" 거짓말은 아니다. 과장도 아니다. 그냥 괄호를 뺀 것뿐이다. (CEO 겸 기술 고문) (CEO 겸 영업 총괄) (CEO 겸 재무 담당) 이 괄호들. VC들이 알까? 8명 스타트업의 CEO가. 얼마나 많은 걸 혼자 하는지. 아니, 알 것이다. 그들도 다 겪었을 테니까. 그래도 IR 자료엔 안 쓴다. "우리는 약합니다" 같은 소리니까. "우리는 효율적입니다"라고 쓴다. 같은 말이지만. 다르게 들린다. 월요일 아침 7시 출근했다. 아직 아무도 없다. 커피 내렸다. 첫 잔. 깃헙 열었다. 주말 동안 올라온 이슈 3개. 하나씩 봤다. 코멘트 달았다. 해결 방향 제시했다. 슬랙 열었다. 영업팀 채널. 지난주 미팅 결과 정리했다. 다음 주 목표 썼다. 액션 아이템 배분했다. 엑셀 열었다. 현금흐름표. 이번 주 예상 입금 800만원. 예상 출금 1200만원. 마이너스 400만원. 잔고 3억 2200만원에서. 3억 1800만원 될 예정. 7.8개월. 시계 봤다. 7시 50분. 팀원들 오기 10분 전. 화장실 갔다. 거울 봤다. 36세. 눈 밑에 다크서클. 흰머리 몇 개 보인다. 웃어봤다. 연습. "좋은 아침!" 자연스럽다. 다시 자리로 왔다. 9시까지 10분 남았다. 그 10분 동안. 재무 계획 시나리오 하나 더 만들었다. 비관: 매출 정체, 직원 1명 감축 고려 → 9개월 버팀 만들고 나서 지웠다. 팀원들이 볼까봐. 8시 58분. 민수가 들어왔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웃으면서 말했다. 자연스럽게.개발 4명, 기획 1명, 디자인 1명, 영업 2명. 그리고 CEO 겸 기술 고문 겸 영업 총괄 겸 재무 담당인 나. 괄호는 IR 자료에 안 쓴다. 현실엔 있지만.
- 27 Dec, 2025
VC 미팅 20개, 거절 10개, 보류 10개, 진행 중 5개의 수학
월요일, 11번째 미팅 VC 미팅이 11시였다. 강남역 근처 카페. 2층 구석 자리. IR 덱은 어젯밤에 또 고쳤다. 51번째 버전. 트랙션 슬라이드에 지난달 MRR 그래프 추가했다. 상승 각도가 좀 더 가파르게 보이게. "안녕하세요, 박창업 대표입니다." 악수. 명함 교환. 커피 주문. 30분 발표, 20분 질의응답. "고객사 리텐션은 어떻게 되나요?" "경쟁사 대비 차별점이 뭔가요?" "런웨이는 얼마나 남았죠?" 대답했다. 준비한 대로. "네, 좋습니다. 내부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안다. 90%는 거절이다. 카페 나왔다. 1시 20분. 점심 먹을 시간도 없다. 3시에 또 미팅.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2개 샀다.엑셀 파일, 20줄 사무실 돌아와서 엑셀 켰다. 파일명: "투자유치_진행현황_2024.xlsx" 20개 행. 각각 VC 이름.A열: VC명 B열: 미팅일 C열: 상태 D열: 후속 액션 E열: 메모C열을 본다. "거절" 10개. "검토중" 10개. "2차 미팅" 3개. "DD 진행" 2개. 계산했다. 성공률 25%. 아니다. DD 진행도 떨어질 수 있다. 실제 성공률은 10%일 수도. F2 셀에 커서 놨다가 지웠다. 숫자로 계산하면 더 우울해진다. 거절 메일의 패턴 "검토 결과, 현 단계에서는 투자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트랙션이 더 나온 후 다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부 투심에서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거절 메일은 대부분 비슷하다. 정중하고, 짧고, 이유는 애매하다. 첫 거절 메일 받았을 때는 3일 동안 멍했다. 다섯 번째는 하루. 열 번째는 한 시간. 이제는 30분. 읽고, 상태 업데이트하고, 다음 메일 쓴다. 적응이라고 해야 하나. 둔감해진 건가. 카페인이 필요하다. 네 번째 커피.보류의 의미 "검토중"이라는 상태가 제일 애매하다. 기대해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2주 지나면 문자 보낸다. "안녕하세요, 박창업입니다. 검토 진행 상황 여쭤봐도 될까요?" 답장은 반반이다. "아직 내부 논의 중입니다." 또는 무응답. 무응답이 답이다. 사실상 거절. 그래도 엑셀에서는 "검토중"으로 남겨둔다. "거절"로 바꾸면 숫자가 너무 적나라해진다. 자기기만인 걸 안다. 그래도 필요하다. 이 정도 완충은. 4주 지나면 그때 바꾼다. "거절"로. 통장 잔고는 매달 줄어든다. 런웨이는 7개월 남았다. 아니다. 다음 달 급여 나가면 6개월. 목요일, 17번째 미팅 여의도였다. 대형 VC. 30층 오피스. 엘리베이터에서 넥타이 매만졌다. IR 발표는 이제 외운다. 51번 했으니까. 이번에는 파트너급이 들어왔다. 좋은 신호인가. 아니면 그냥 루틴인가. "시장 규모는?" "6500만원 MRR이면, CAC는 얼마죠?" "번율은?" 대답했다. 숫자로. 숫자가 약하다는 걸 안다. 나도. 그래도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고객사 인터뷰 결과 보면, NPS는 68입니다." "작년 대비 MRR 성장률 340%입니다." 파트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 2차 미팅 잡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내려오면서 한숨 쉬었다. 긴장 풀린 거다. 기대감 아니다. 아직 모른다. 2차도 떨어질 수 있다. 편의점 들렀다. 삼각김밥 또 샀다. 저녁 7시인데 이게 첫 끼다.금요일 밤, 혼자 팀원들은 다 퇴근했다. 10시 30분. 나만 남았다. 회의실에서 노트북. 다음 주 미팅 3개 준비해야 한다. 각 VC마다 IR 덱을 조금씩 바꾼다. 이 VC는 B2B 중심이니까 기업 고객 비중 강조. 저 VC는 기술 중심이니까 특허 슬라이드 추가. 52번째, 53번째, 54번째 버전. 창밖을 봤다. 성수동 불빛. 다른 스타트업도 불 켜져 있다. 다들 비슷하겠지. 투자 받으려고 뛰어다니고. 휴대폰 진동. 아내 문자. "저녁 먹었어? 딸이 아빠 보고 싶대." "응, 먹었어. 조금만 더 하고 갈게." 거짓말이다. 아직 안 먹었다. 컵라면 하나 끓였다. 회의실 정수기 물로. 먹으면서 엑셀 또 켰다. 20줄. 10거절, 10보류, 5진행. F2 셀에 커서 놨다. "=COUNTIF(C:C,"진행중")/COUNTA(C:C)" 엔터. "25%" 지웠다. 계산하면 더 힘들다. 그냥 하나씩. 내일 미팅, 모레 미팅. 될 때까지. 토요일 아침, 21번째 준비 주말인데 노트북 켰다. 딸이 옆에서 그림 그린다. "아빠, 뭐 해?" "일." "또?" "응, 또." 미안하다. 말은 안 했다. 월요일에 21번째 미팅이다. 신규 VC. 초기 스타트업 중심. IR 덱 55번째 버전 만든다. 트랙션 슬라이드, 팀 슬라이드, 로드맵 슬라이드. 숫자 체크. 오타 체크. 그래프 각도 체크. 1시간 걸렸다. 저장하고 닫았다. 딸이 그린 그림 봤다. 우리 가족. 아빠가 제일 작게 그려져 있다. "아빠 왜 이렇게 작아?" "아빠가 맨날 안 보여서." 가슴이 뜬다. "미안. 조금만 더 하면 아빠 시간 많아질 거야."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다. 런웨이 6개월. 투자 안 받으면 정리해야 한다. 그럼 시간 많아지겠지. 그게 좋은 건가. 모르겠다. 월요일, 21번째 미팅 또 강남이다. 10시 30분. 30분 발표. 20분 질문. "좋습니다. 2차 미팅 잡겠습니다." 또 이 말. 기쁘지 않다. 익숙하다. 2차도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안다. 성공률 25%. 아마 더 낮을 거다. 그래도 간다. 22번째, 23번째, 24번째. 계속 간다. 다른 방법이 없다. 팀원 8명 월급. 사무실 월세. 서버 비용. 멈출 수 없다. 사무실 돌아왔다. 엑셀 켰다. 21번째 줄 추가. 상태: "1차 완료" D열에 썼다. "2차 미팅 대기" 저장. 닫았다. 책상 서랍에 타이레놀 있다. 두 알 먹었다. 물 없이. 수요일, DD 미팅 17번째 미팅했던 VC에서 연락 왔다. "실사 진행하겠습니다." 드디어. 20개 중에 DD까지 온 건 3번째다. 재무제표, 주주명부, 고객 계약서, 코드 리뷰. 다 준비했다. 일주일 걸렸다. 개발팀장이 밤새 코드 정리했다. "대표님, 이거 투자 되는 거죠?" "아직 몰라. DD도 떨어질 수 있어." 사실이다. 작년에 DD 진행하다 떨어진 적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25%보다는 높다. 아마 50%? 계산하지 말자. 또 우울해진다. 그냥 최선을 다하자. 될 때까지. 저녁 9시. 혼자 남았다. DD 자료 마지막 체크. 괜찮다. 빠진 거 없다. 내일 제출. 퇴근했다. 11시 20분. 아내랑 딸은 자고 있다. 조용히 씻고 누웠다. 천장 봤다. 20개 미팅. 10개 거절. 10개 보류. 3개 DD. 숫자가 머릿속에서 돈다. 25%. 50%. 10%. 잠이 안 온다. 휴대폰 켰다. 새벽 2시 47분. 창업 실패 사례 검색하려다가 껐다. 보면 더 불안해진다. 대신 엑셀 켰다. 어두운 화면에 20줄. F2 셀. 지워진 계산식 자리. 커서만 깜빡인다.성공률을 알면서도 계속 미팅을 잡는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 22 Dec, 2025
'런웨이가...' - 대표의 가장 자주 하는 말
새벽 3시의 엑셀 또 눈이 떴다. 3시 12분. 손이 먼저 움직인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아이폰을 집는다. 슬랙을 켠다. 새 메시지는 없다. 당연하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게 나뿐이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간다. 노트북을 연다. 습관이다. 엑셀 파일 하나를 연다. 파일명은 "현금흐름_2024_v32". 버전이 32다. 그만큼 많이 봤다는 뜻이다.런웨이 8개월. 237일. 5688시간. 계산한다. 월급 5800만원. 사무실 180만원. 서버비 320만원. 마케팅 500만원. 기타 200만원. 월 7000만원 나간다. 매출은 1200만원. 적자 5800만원. 8개월이면 4억 6400만원이 증발한다. 프리A 투자 받아야 한다. 5억 받으면 런웨이가 16개월이 된다. 10억 받으면 25개월. 그 안에 시리즈A 받으면 된다. "받으면 된다." 혼자 중얼거린다. 문제는 "받으면"이다. 딸이 방에서 뒤척인다. 소리가 들린다. 깼나 싶어서 노트북을 닫을 뻔했다. 다시 조용해진다. 다행이다. 엑셀 시트를 하나 더 연다. "시나리오 분석"이라는 이름이다. 세 가지 케이스가 있다. 보수: 투자 못 받음. 런웨이 8개월 후 폐업. 중립: 3억 받음. 런웨이 13개월. 피봇 1회. 낙관: 7억 받음. 런웨이 20개월. MRR 3배 성장. 보수 시나리오는 안 봐도 안다. 8개월 후 직원들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내한테 다시 취업한다고 말하고, 부모님한테 전화한다. "죄송합니다. 접을게요." 상상하기 싫다. 다음 시트로 넘어간다. 투자자 미팅에서 "런웨이는 어느 정도 남았나요?" VC 파트너가 묻는다. IR 자료 17페이지를 보면서. "충분합니다." 나는 대답한다. 미소를 짓는다. 자신감 있게. "구체적으로요?" "현재 기준 12개월 이상입니다." 거짓말이다. 8개월인데 12개월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8개월이라고 하면 다급해 보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다급한 스타트업을 싫어한다. "MRR 성장률이 좋네요. 그런데 CAC가 조금 높은데?" "네. 초기 시장 확보 단계라서 그렇습니다. 6개월 내 30% 절감 목표입니다." 또 거짓말이다. 어떻게 절감할지 모른다. 일단 말은 한다. 자신감 있게.미팅이 끝난다. 악수한다. "좋게 검토해보겠습니다." 파트너가 말한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혼자가 된다. 미소가 사라진다. 한숨이 나온다. "좋게 검토해보겠습니다." 이 말의 뜻을 안다. "관심 없습니다"라는 뜻이다. 20번 들었다. 20번 다 그랬다. 스타벅스에 들어간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오늘 네 번째다. 자리에 앉는다. 노트북을 연다. 다음 주 미팅 IR 자료를 수정한다. "런웨이 충분함" 슬라이드를 본다. 숫자를 바꿀까 생각한다. 12개월을 14개월로? 아니면 10개월로 솔직하게? 결정하지 못한다. 일단 12개월로 놔둔다. 핸드폰이 울린다. CFO가 문자를 보냈다. "대표님 이번 달 마케팅비 오버했어요. 120만원 더 나갔어요." 120만원. 작은 돈이다. 그런데 크다. 런웨이가 하루 줄어든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답장을 보낸다. 커피를 마신다. 쓰다. 팀원들 앞에서 월요일 오전 10시. 전체 회의다. "이번 주 목표 공유하겠습니다." 나는 말한다. 화이트보드에 쓴다. "신규 고객 5개. 데모 미팅 15건. 피처 론칭 2개." 개발팀장이 손을 든다. "대표님 론칭 2개는 무리인데요. 테스트 시간이 부족해요." "해야 합니다." 내 목소리가 조금 세진다. 의도한 건 아니다. "런웨이 생각하면 빨리 가야 해요. 고객 피드백 받으면서 수정하는 거로." "런웨이요?" 팀원들이 쳐다본다. 다들 아는 단어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처음이다. 보통 숨기니까. 말이 나왔으니 어쩔 수 없다. "우리 시간이 많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8개월 남았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진다."투자 받을 거 아닌가요?" 디자이너가 묻는다. "받으려고 하는데 시간이 걸려요. 그 전에 우리가 보여줄 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빨리 론칭하자는 거죠?" 개발팀장이 말한다. "네." 회의가 끝난다. 다들 자리로 돌아간다. 평소보다 조용하다.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내가 실수했나 싶다. 런웨이 얘기를 안 했어야 했나. 팀원들한테 압박을 준 건가.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진짜니까. 점심시간이다. 같이 밥 먹으러 간다. 근처 김치찌개집이다. 7000원짜리. "대표님 괜찮으세요?" 기획자가 묻는다. "네. 괜찮습니다." "투자 받을 수 있을까요?" "받을 겁니다." 자신감 있게 말한다. 그런데 속으로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밥을 먹는다. 김치찌개가 맵다. 밥을 말아 먹는다. 빨리 먹는다. 30분 후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아내에게 못하는 말 밤 11시에 집에 들어간다. 조용하다. 딸은 잤다. 아내는 거실 소파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다. 회사 일인가 보다. "왔어?" "응." 냉장고를 연다. 맥주가 있다. 하나 꺼낸다. 마신다. "오늘도 힘들었어?" 아내가 묻는다. "아니. 괜찮아." 거짓말이다. 힘들었다. 투자자한테 거절당했고, 팀원들한테 압박 줬고, 런웨이 계산하면서 한숨 쉬었다. 그런데 말 안 한다. 왜냐하면 아내도 힘들다는 걸 아니까. 대기업 마케터는 야근이 많다. 딸 육아도 대부분 아내가 한다. 내가 주말에도 일하니까. "너는?" 내가 묻는다. "나도 괜찮아. 내일 PT 있어서 자료 좀 보는 중." 둘 다 거짓말하고 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한다. 맥주를 다 마신다. 샤워하러 간다. 뜨거운 물을 맞는다. 5분 정도. 생각을 비운다. 그런데 안 비워진다. 런웨이 생각이 난다. 8개월. 237일. 샤워를 끝낸다. 침실로 간다. 아내는 아직 거실에 있다. 나는 침대에 눕는다. 핸드폰을 본다. 메일이 왔다. 투자자한테서. "안녕하세요 대표님. 검토 결과 저희 투자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20번째 거절이다.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천장을 본다. 숨을 쉰다. "다음 기회." 다음 기회는 없을 수도 있다. 8개월 후에는. 생각하기 싫다. 눈을 감는다. 스프레드시트의 세계 주말이다. 토요일 오전 10시. 딸이랑 놀이터에 갔어야 한다. 약속했다. 그런데 못 갔다. "아빠 일 있어. 미안해." 딸은 울었다. 아내가 데리고 나갔다. 표정이 안 좋았다. 나는 집에 혼자 있다. 노트북을 연다. 엑셀 파일을 연다. 새로운 시트를 만든다. "극한 시나리오"라는 이름을 붙인다. 만약 4개월 안에 투자 못 받으면? 계산한다. 직원을 줄인다. 8명을 5명으로. 개발 2명, 영업 1명, 나, CFO. 월 인건비 5800만원이 3600만원이 된다. 사무실을 옮긴다. 성수에서 구로로. 월세 180만원이 80만원이 된다. 마케팅을 끊는다. 500만원 절감. 이렇게 하면 월 소모가 7000만원에서 4500만원이 된다. 런웨이가 12개월이 된다. 그런데. 직원을 자르면 개발 속도가 느려진다. 제품을 못 만든다. 고객을 못 받는다. 매출이 안 는다. 투자자가 안 좋아한다. 결국 죽는다. 느리게. 이 시트를 지운다. 보기 싫다. 다른 시트를 만든다. "공격 시나리오". 만약 마케팅을 2배로 늘리면? 월 500만원을 1000만원으로. 신규 고객이 2배 늘어난다고 가정한다. MRR이 1200만원에서 2400만원이 된다. 그러면 런웨이는? 월 소모가 7500만원. 적자 5100만원. 런웨이 7개월. 1개월 줄어든다. 이것도 안 된다. 도박이다. 시트를 또 지운다. 세 번째 시트. "현실 시나리오". 아무것도 안 바꾼다. 그냥 간다. 8개월. 그 사이 투자 받는다. 받아야 한다. 받을 것이다. "받을 것이다." 혼잣말이다. 주문이다. 정오가 됐다. 배가 고프다. 냉장고를 연다. 김치가 있다. 밥을 한다. 김치만 먹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아내다. "놀이터 왔어. 딸이 아빠 생각난대." 영상통화를 켠다. 딸 얼굴이 보인다. "아빠!" 웃는다. "미안해. 다음 주에 꼭 같이 가자." "응!" 통화를 끊는다. 미안하다. 정말. 다시 노트북을 본다. 엑셀 파일이 열려 있다. 런웨이 8개월. 237일. 숫자를 바꿀 수 없다. 시간은 흐른다. 멈출 수 없다. 경쟁사 뉴스 월요일 오전. 출근했다. 슬랙에 링크가 하나 올라와 있다. 개발팀장이 공유했다. "경쟁사 A사, 시리즈B 80억 투자 유치." 기사를 연다. 읽는다. "A사는 창업 3년 만에 누적 투자 120억을 유치하며 시장 선도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월 매출 3억, 직원 40명 규모로 성장했다." 3년. 우리는 2년 6개월. 6개월 차이. 투자 120억. 우리는 3억. 매출 3억. 우리는 1200만원. 숫자가 다르다. 너무 다르다. 화가 난다. 아니 슬프다. 아니 둘 다다. "우리도 할 수 있어요." 개발팀장이 말한다. "네." 대답은 하는데 자신이 없다. A사 대표를 안다. 대학 선배다. 같이 술 마신 적도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다. 나보다 나은가? 모르겠다. 운이 좋았나? 그것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는 지금 런웨이 걱정 안 한다는 것이다. 80억 받았으니까. 3년은 더 버틸 수 있다. 나는? 8개월. 비교하기 싫다. 그런데 자꾸 비교된다. 점심시간. 밥을 먹는다. 팀원들이 A사 얘기를 한다. "저기 제품 써봤는데 별로던데요." "UI가 우리보다 못한 것 같아요." "고객 리뷰 보면 불만 많더라." 팀원들이 위로한다. 나를. 그런데 위로가 안 된다. 제품이 좋고 나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투자를 받았다는 게 중요하다. 돈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시간이 있다는 게. 밥을 먹는다. 맛이 없다. 밤의 회의실 밤 10시. 팀원들은 다 퇴근했다. CFO만 남았다. "대표님 얘기 좀 해요." CFO가 말한다. 회의실로 들어간다. 문을 닫는다. "런웨이 얘기해요." "8개월 남았어요. 아시잖아요." "네. 그런데 실제로는 6개월이에요." "뭐?" "예비비 빼면요. 갑자기 서버 터지거나 직원 한 명 더 뽑거나 하면 6개월이에요." 6개월. 180일. 계산이 틀렸다. 내가 낙관적으로 본 거다. "투자 미팅 어때요?" CFO가 묻는다. "20개 했어요. 다 거절이요." "다음 계획은?" "10개 더 잡았어요. 이번 달 안에." "가능성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해봐야죠." CFO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없다. 나도 없다. "대표님." CFO가 말한다. "최악의 경우 생각해봤어요?" "폐업?" "네." 생각해봤다. 매일 생각한다. 새벽 3시마다. "그때 가서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야 해요. 법인 정리하는 데도 시간 걸려요. 직원들 정리 해고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CFO는 항상 맞는 말을 한다. 그래서 싫다. 아니 고맙다. 복잡하다. "알겠어요. 정리해둘게요." 회의가 끝난다. CFO가 퇴근한다. 나는 남는다.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다. 불을 끈다. 어둡다. 창밖에 성수동 야경이 보인다. 불빛이 예쁘다. 저 건물들에도 스타트업이 있을 것이다. 그 대표들도 런웨이 걱정할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위로가 안 된다. 핸드폰을 꺼낸다. 엑셀 앱을 연다. 파일을 연다. 숫자를 본다. 6개월. 180일. 4320시간. 카운트다운이다. 멈출 수 없는. 투자자의 질문 수요일. VC 미팅이다. 강남역 근처 빌딩 12층. IR을 한다. 20분. 준비한 대로 말한다. 자신감 있게. 숫자를 보여준다. 성장률을 강조한다. "질문 있습니다." 파트너가 말한다. "네." "만약 투자 못 받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예상 못한 질문이다. 준비 안 했다. "...투자 받을 겁니다." "가정입니다. 만약이요." "피봇을 고려하겠습니다." "피봇해서 될까요?" "해봐야 알겠죠." 대답이 약하다. 나도 안다. "런웨이는 얼마나 남았죠?" "12개월입니다." "정말요?" 정말 아니다. 6개월이다. 그런데 말 못 한다. "네. 충분합니다." 파트너가 노트북을 본다. 뭔가 계산하는 것 같다. "대표님 월 소모 추정해보니까 7000만원 정도 되는데. 투자 받은 게 3억이고 지금 1년 반 지났으면 런웨이가 3개월 아닌가요?" 들켰다. "...매출이 있습니다. 그래서 12개월입니다." "매출로 소모 못 막잖아요. 지금 MRR이 1200만원이면." 말문이 막힌다. 파트너가 웃는다. 비웃는 게 아니다. 그냥 웃는다.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더 좋아요." "...6개월 남았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급하시죠?" "네." "그럼 밸류에이션 조정 가능하세요?" 투자받고 싶으면 지분 더 내놓으라는 뜻이다. "...검토하겠습니다." 미팅이 끝난다.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친다. 피곤해 보인다. 늙어 보인다. 36세가 46세 같다. 딸의 그림 금요일 밤. 일찍 들어갔다. 9시. 딸이 안 자고 기다렸다. "아빠!" 뛰어온다. 안아준다. 가볍다. 13킬로. "이거 봐." 딸이 종이를 보여준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다. 세 명이 있다. 큰 사람 두 명. 작은 사람 한 명. 가족이다. "우리야. 아빠 엄마 나." "예쁘다." "근데 아빠 얼굴이 좀 슬퍼." 그림을 자세히 본다. 정말 슬퍼 보인다. 입이 아래로 그어져 있다. "왜 슬프게 그렸어?" "아빠가 맨날 한숨 쉬잖아." 말이 없다. "아빠 힘들어?" 딸이 묻는다. "아니야. 안 힘들어." "거짓말. 엄마가 그랬어. 아빠 요즘 힘들대." 아내가 얘기했나 보다. 딸한테까지.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나아질 거야." "진짜?" "진짜." 거짓말이다. 모르겠다. 6개월 후 어떻게 될지. 딸을 재운다. 동화책을 읽어준다. "아기돼지 삼형제". 늑대가 나온다. 집을 부순다. 돼지들이 도망간다. 딸이 잠든다. 숨소리가 고르다. 거실로 나온다. 아내가 있다. "그림 봤어?" 아내가 묻는다. "응." "미안해. 애한테까지 티가 났나봐." "괜찮아." "안 괜찮아. 나도 알아. 요즘 너 상태." 말이 없다. "투자 안 되고 있지?" "...응." 처음 인정한다. 아내한테. "그럼 어떡하려고?"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최악의 경우 접어도 돼. 나 월급 나오잖아. 우리 살 수 있어." 눈물이 날 뻔한다. 참는다. "조금만 더 해볼게." "6개월?" "응. 6개월."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 말 안 한다. 나는 그림을 본다. 딸이 그린. 슬픈 얼굴의 아빠. 바꾸고 싶다. 웃는 얼굴로. 6개월 안에. 다시 엑셀 앞에서 토요일 새벽 4시. 또 눈이 떴다. 노트북을 연다. 엑셀을 연다. 숫자를 본다. 6개월. 180일. 4320시간. 아니다. 하루 지났다. 179일. 4296시간. 시간은 흐른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새로운 계산을 한다. 만약 다음 주 VC 미팅에서 투자 받으면? DD 2주. 계약 2주. 입금 1주. 총 5주. 그러면 런웨이가 5개월 남았을 때 돈이 들어온다. 만약 안 받으면? 다음 미팅. 또 DD. 또 계약. 시간이 간다. 3개월 남았을 때 돈이 들어올 수도. 아니면 안 들어올 수도. 만약 끝까지 안 받으면? 6개월 후. 통장 잔고 0원. 직원들 월급 못 줌. 폐업 공고. 법인 정리. 빚 청산. 그 다음은? 이력서 쓴다. 취업한다. 37세 경력단절 전 창업자. 받아주는 데 있을까. 생각하기 싫다. 시트를 하나 더 만든다. "희망 시나리오". 만약 제품이 대박나면? 입소문 난다. 고객이 몰린다.
- 15 Dec, 2025
카페인 5잔, 위장 2개. 창업의 대가
카페인 5잔, 위장 2개. 창업의 대가 첫 잔: 새벽 3시 눈을 뜬다. 새벽 3시 12분. 알람도 안 울렸는데 눈이 떠진다. 이게 3개월째다. 옆에 아내는 자고 있다. 숨소리 고르다. 딸은 옆방에서 잘 거다. 슬랙을 확인한다. 개발팀 준호가 새벽 2시에 메시지를 남겼다. "배포 롤백했습니다. 내일 아침 브리핑 드리겠습니다." 가슴이 철렁한다. 거실로 나와서 커피를 내린다. 핸드드립. 조용히. 아무도 안 깨우게. 첫 잔을 마신다. 쓰다. 설탕 안 넣는다. 이제 단맛은 사치다. 노트북을 연다. 깃허브를 확인한다. 커밋 로그를 본다. 무슨 문제인지 대충 보인다. API 응답 시간이 터진 거다. "아, 씨..." 혼잣말이다. 작게. 아내 깨면 안 된다.둘째 잔: 출근길 7시 아내가 일어났다. 딸도 깼다. "오빠, 또 일찍 일어났어?" "응. 일 좀." 거짓말은 아니다. 사실이다. 근데 전부는 아니다. 잠이 안 온다는 말은 안 한다. 딸이 안긴다. "아빠!" 안아준다. 10초.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다. 지금은. "아빠 회사 가야 돼." "또?" 미안하다. 집을 나선다. 편의점에 들른다. 아메리카노 톨사이즈. 둘째 잔. 지하철에서 마신다. 뜨겁다. 데인다. 상관없다. 슬랙을 다시 본다. 준호가 30분 전에 또 메시지를 남겼다. "원인 파악했습니다. DB 쿼리 최적화 필요합니다. 오늘 오전 중 해결 가능합니다." 숨을 쉰다. 괜찮다. 될 거다. 항상 그랬다.셋째 잔: 오전 회의 10시 사무실에 왔다. 8시 15분이다. 팀원들은 9시 30분에 온다. 1시간 15분이 내 시간이다. 현금흐름표를 연다. 스프레드시트. 세 개 시트. 보수/중립/낙관. 보수 시나리오: 런웨이 6개월. 중립 시나리오: 런웨이 8개월. 낙관 시나리오: 런웨이 11개월. 숫자를 만진다. 변수를 조정한다. 인건비 10% 줄이면? 안 된다. 사무실 이전하면? 2개월 번다. 매출 20% 늘면? 3개월 번다. 결론: 프리A 투자 받아야 한다. 6개월 안에. 커피를 마신다. 셋째 잔. 자판기 커피. 500원. 맛없다. 마신다. 팀원들이 들어온다. 인사한다. 밝게. 항상 밝게. "오늘 회의, 30분만 하자. 집중해서." 준호가 보고한다. 문제 해결했다. 배포 다시 한다. 오후 2시. "고생했어. 새벽까지 고생 많았어." "괜찮습니다. 대표님도 새벽에 확인하셨잖아요." 티가 났나. 넷째 잔: 점심 후 2시 점심은 팀원들이랑 먹었다. 성수동 국밥집. 8000원. 대표가 샀다. 64,000원. 런웨이에서 64,000원 줄었다. 계산하지 말자. 이럴 때가 아니다. 팀 분위기가 중요하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배포가 시작됐다. 모니터링한다. 준호랑 같이. 5분. 10분. 15분. "정상입니다." "좋아. 고객사들 확인해보자." 주요 고객사 3곳에 전화한다. 문제없다. 다행이다. 커피를 마신다. 넷째 잔. 또 자판기. 속이 쓰리다. 아까부터 쓰렸다. 참는다. 가방에 위장약이 있다. 먹는다. 물 없이. 씹어서. 쓰다.다섯째 잔: 저녁 8시 팀원들 퇴근했다. 6시 30분. "대표님은요?" "나 좀 있다 갈게. 먼저 가." 혼자 남았다. 조용하다. 좋다. IR 자료를 연다. 53차 수정본. 다음 주 화요일. VC 미팅. 이번이 진짜다. 느낌이 온다. 슬라이드를 본다. 트랙션 페이지. 그래프가 올라간다. 근데 완만하다. 가파르지 않다. "더 가파르게 보이게 할 수 없나..." 축을 조정한다. Y축 범위를 줄인다. 그래프가 가파라진다. 근데 속이는 거다. 되돌린다. 숫자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 나한테도. 투자자한테도. 커피를 마신다. 다섯째 잔. 편의점에서 사온 것. 차갑다. 식었다. 속이 또 쓰리다. 위장약 또 먹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아내다. "오빠, 언제 와?" "9시쯤?" "또 야근이야?" "미안." "딸이 아빠 보고 싶대." 칼이 꽂힌다. "...내일 일찍 들어갈게." "그래. 조심히 와." 끊는다. 미안하다. 진심이다. 근데 지금은 안 된다. 위장 2개 창업하기 전 건강검진 받았다. 위: 정상 간: 정상 신장: 정상 작년에 또 받았다. 위: 만성 위염 소견 간: 경미한 지방간 신장: 정상 올해는 안 받았다. 받기 싫다. 결과가 무섭다. 커피를 5잔 마신다. 하루에. 매일. 첫 잔: 새벽 3시, 불안을 삼킨다. 둘째 잔: 출근길 7시, 각성한다. 셋째 잔: 오전 10시, 집중한다. 넷째 잔: 점심 후 2시, 버틴다. 다섯째 잔: 저녁 8시, 끝까지 간다. 위장약도 5알 먹는다. 하루에. 매일. 아침 1알, 점심 1알, 저녁 1알, 밤 2알. 이게 창업의 대가다. 커피 5잔 = 위장약 5알 = 런웨이 8개월 계산이 맞다. 멈출 수 없다 커피를 줄여야 한다는 걸 안다. 의사가 말했다. 작년에. "스트레스 관리하시고, 카페인 줄이세요." 알고 있다. 근데 안 된다. 새벽 3시에 눈 뜨면 커피 마셔야 정신 차린다. 출근길에 안 마시면 회의 때 멍하다. 오전에 안 마시면 집중 안 된다. 오후에 안 마시면 졸린다. 저녁에 안 마시면 일 못 끝낸다. 그래서 마신다. 5잔. 매일. 위가 아프다. 속이 쓰리다. 알고 있다. 근데 멈추면 팀이 멈춘다. 회사가 멈춘다. 가족이 멈춘다. 나는 멈출 수 없다. 그래서 마신다. 계산 런웨이 8개월. 프리A 투자 받으면 18개월 더 간다. 18개월이면 PMF 찾을 수 있다. 아마도. PMF 찾으면 시리즈A 간다. 시리즈A 받으면 팀 키운다. 마케팅 한다. 성장한다. 성장하면 엑싯이든 IPO든 한다. 그때 되면 쉴 수 있다. 아마도. 커피 5잔 x 8개월 = 1,200잔. 위장약 5알 x 8개월 = 1,200알. 대가: 위장 하나. 괜찮다. 창업가는 위장 2개 있어야 한다. 하나는 커피 마시고, 하나는 스트레스 받는다. 나는 하나밖에 없다. 근데 2개 역할을 한다. 계산 맞다. 내일도 내일도 새벽 3시에 깰 거다. 첫 잔 마실 거다. 쓰다고 느낄 거다. 마실 거다. 출근할 거다. 둘째 잔 마실 거다. 회의할 거다. 셋째 잔 마실 거다. 배고플 거다. 넷째 잔 마실 거다. 야근할 거다. 다섯째 잔 마실 거다. 속 쓰릴 거다. 위장약 먹을 거다. 집 갈 거다. 아내한테 미안할 거다. 딸 얼굴 못 볼 거다. 자고 있을 거다. 침대에 누울 거다. 잠 못 잘 거다. 새벽 3시에 깰 거다. 반복이다. 이게 창업이다.커피 식었다. 다섯째 잔. 다 마신다. 쓰다. 괜찮다. 익숙하다.
- 13 Dec, 2025
팀원들 앞에서는 절대 불안한 티 안 낸다
오전 9시, 스탠드업 미팅 "다들 모였지? 시작하자." 회의실에 들어서면서 목소리 톤을 올린다. 어제 새벽 3시까지 런웨이 계산하느라 3시간 잤지만 티 내면 안 된다. 개발팀 김 대리가 일정 지연 보고한다. 서버 이슈. 예상했다. "괜찮아. 우선순위 조정하면 돼. 고객사 A는 다음 주로 미루고, B사 건부터 마무리하자." 차분하게 말한다. 속으론 '이번 주 데모 미팅 어떡하지' 생각하지만 표정은 관리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안 된다. 대표가 흔들리면 배가 침몰한다. 영업팀 박 과장이 신규 리드 3건 보고. 좋은 소식이다. 진심으로 웃는다. "잘했어. 이번 주 전환율 목표 달성 가능하겠는데? 모두 수고했어." 미팅 끝. 30분. 웃으면서 나온다. 화장실 가서 세면대에 손 짚고 한숨 쉰다. 5초. 다시 얼굴 올린다. 거울에 비친 내가 피곤해 보인다. 물로 얼굴 씻는다.혼자 있는 점심시간 팀원들은 다 같이 밥 먹으러 갔다. 나는 "미팅 준비해야 돼" 핑계 댔다. 사실 혼자 있고 싶었다. 회의실에 남아서 편의점 삼각김밥 뜯는다. 1300원. 노트북 열어서 스프레드시트 본다. 현금흐름표. 8개월. 정확히는 7.8개월. 다음 달 직원 월급 나가면 7.3개월. 손가락으로 셀 하나하나 계산한다. "프리A 6월까지는 받아야 하는데..." 혼잣말. VC 미팅 일정표 본다. 이번 주 2건, 다음 주 3건. 답장 안 온 곳이 7곳. '검토 중'이라던 곳은 2주째 감감무소식. 슬랙 메시지 다시 보낸다. 정중하게. "안녕하세요, 지난주 미팅 후속입니다. 추가 자료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보내고 나서 한숨. 제발 답장 오길. 삼각김밥 반밖에 못 먹었는데 목이 막힌다. 물 마신다. 창밖 본다. 성수동 거리. 사람들 바쁘게 걷는다. 나도 저렇게 보이나. 핸드폰 진동. 아내 카톡. "저녁 몇 시에 와? 서윤이가 아빠 기다려" "오늘 야근. 9시쯤? 미안"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미안하다는 말 또 하고 싶은데 그냥 하트 이모티콘 보낸다. 몇 번째 미안인지 모르겠다.오후 3시, 투자자 미팅 강남역 카페. 20분 일찍 도착했다. 항상 일찍 온다. IR 덱 마지막 점검. 51번째 버전. 슬라이드 32장. 트랙션, MAU 성장률, LTV/CAC 비율, 로드맵. 숫자 하나하나 외웠다. 투자자 들어온다. 40대 중반. 명함 교환. 정중하게 인사.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자료 봤어요. 시장 흥미롭더라고요. 설명 부탁드려요." 15분 발표. 목소리에 힘 준다. 자신감. 데이터로 보여준다. 그래프 우상향. 고객 인터뷰 인용. 팀 소개할 땐 자랑스럽게. "저희 CTO는 전 카카오 출신입니다." 사실이다. 실력 좋다. 연봉은 못 줘서 미안하지만. 질문 들어온다. "경쟁사 대비 차별점이 뭔가요?" 준비한 답변. "저희는 B2B에 특화된 UX와 온보딩 자동화에 집중했습니다. 경쟁사들은..." "번 레이트 어떻게 되죠?" "월 평균 3.2%입니다. 업계 평균 5%보다 낮고..." "시리즈A 목표는?" "30억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프리A로 5억 모집 중이고요." 대화는 30분. 분위기 나쁘지 않다. 그가 고개 끄덕인다. "검토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추가 자료 있으면 메일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악수. 웃으면서 헤어진다. 카페 나와서 지하철역까지 걷는다. 5분. 웃음 사라진다. '검토해보겠습니다.' 이 말 이제 20번째쯤 들었다. 10번은 거절이었다. 5번은 아직 답 없다. 5번은 진행 중. 이번은? 모르겠다. 지하철 타고 사무실 간다. 창밖 본다. 내 얼굴 비친다. 피곤하다. 오후 6시, 팀원과 커피 사무실 돌아오니까 디자이너 이 주임이 물어본다. "대표님 미팅 어떠셨어요?" "응, 괜찮았어. 반응 좋았어." 거짓말 아니다. 실제로 반응은 좋았다. 결과가 어떨지 모를 뿐. "다행이네요! 저희 이번 달 목표 달성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MAU 목표 5000명인데 지금 4200명이잖아. 이번 주 마케팅 캠페인 나가면 충분히 가능해. 너무 걱정하지 마." 그가 웃는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같이 커피 타러 간다. 공용 주방. 캡슐커피 넣는다. 나는 다섯 번째. 이 주임은 두 번째. 젊다. 26살. 나도 10년 전엔 저랬다. "요즘 힘든 거 없어?" "아뇨, 재밌어요. 배우는 게 많아요." 순수하다. 런웨이가 뭔지, 번 레이트가 뭔지 모른다. 그냥 좋은 제품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맞다. 내가 그 걱정 다 하면 된다. "그래, 좋은 마인드야. 계속 그렇게 해." 사무실 돌아온다. 내 자리 앉는다. 모니터 켠다. 슬랙 메시지 47개. 하나씩 답장한다. 긍정적으로. 명확하게. 팀원들이 방향 잃으면 안 된다.밤 10시, 혼자 남은 사무실 팀원들 다 퇴근했다. "먼저 가봐도 될까요?" "그래, 수고했어." 일곱 번 말했다. 여덟 번째는 내가 먼저 말했다. "오늘 일찍 들어가. 내일 봐." 이제 혼자다. 사무실 조용하다. 에어컨 소리만 들린다. 책상 불만 켜놨다. 노트북 화면 밝다. 눈 아프다. 엑셀 시트 연다. 시나리오 분석. 세 가지 버전. 보수적: 월 성장률 15%, 프리A 실패, 시드 연장 3억 추가 조달 → 런웨이 12개월 연장, 내년 3월 시리즈A 재도전. 중립적: 월 성장률 25%, 프리A 5억 성공, 6월 유치 → 런웨이 18개월, 직원 3명 추가 채용, 내년 9월 시리즈A. 낙관적: 월 성장률 35%, 프리A 7억 성공, 전략적 투자자(SI) 포함 → 런웨이 24개월, 팀 두 배, 내년 말 시리즈A 20억. 숫자 만지작거린다. 함수 고친다. 셀 색깔 바꾼다. 의미 없다. 이미 100번 계산했다. 결과는 같다. 투자 받아야 한다. 시간 없다. 핸드폰 본다. 아내 카톡. "서윤이 재웠어. 오늘도 늦네?" "응, 미안. 곧 갈게" "건강 챙겨. 너무 무리하지 마" 고맙다. 눈물 날 것 같다. 나오진 않는다. 그냥 목이 멘다. 창밖 본다. 성수동 밤 풍경. 불 켜진 건물들. 저기도 누군가 야근하겠지. 나만 힘든 건 아니다. 위안 안 된다. "될 거야." 혼잣말. 다짐인지 기도인지 모르겠다. 매일 하는 말. 믿는지도 모르겠다. 믿어야 한다. 안 믿으면 끝이다. 가방 싼다. 노트북 닫는다. 불 끈다. 사무실 나온다. 문 잠근다. 엘리베이터 기다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36살. 피곤하다. 내일 아침엔 또 웃어야 한다. 지하철 탄다. 집까지 40분. 앉아서 눈 감는다. 다음날 아침 9시 "좋은 아침! 다들 주말 잘 보냈지?" 회의실. 월요일 스탠드업. 팀원들 모였다. 나는 웃는다. 커피 들고 있다. 여섯 번째. 아니다. 첫 번째다. 집에서 마신 건 안 센다. "이번 주 목표 공유할게. 우선 MAU 5000명 달성. 둘째, B사 온보딩 완료. 셋째, 신규 리드 10건 확보. 할 수 있지?" 팀원들 고개 끄덕인다. 개발팀 김 대리가 말한다. "저희 이번 주 배포 일정 빠듯한데, 가능할까요?" "가능해. 우선순위 정리하면 돼.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말해." 자신감 있게 말한다. 어제 밤 혼자 런웨이 계산하며 한숨 쉰 건 아무도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자, 시작하자. 화이팅!" 미팅 끝. 팀원들 흩어진다. 나는 내 자리로 간다. 앉는다. 모니터 켠다. 이메일 확인한다. 어제 만난 투자자한테서 메일 왔다. "검토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상했다. 실망 안 한다. 거짓말이다. 조금 실망한다. 많이는 아니다. 익숙하다. 다음 메일 연다. 또 다른 VC. 미팅 요청. 다음 주 화요일 가능하냐고. "네, 가능합니다. 시간 조율해서 답변드리겠습니다." 답장 보낸다. 정중하게. 희망적으로. 커피 마신다. 일곱 번째. 모니터 본다. 슬랙 메시지 12개. 답장 시작한다. 혼자 있을 땐 한숨 쉰다. 미팅 땐 웃는다. 이게 내 일이다.대표가 흔들리면 배가 기운다. 그래서 나는 안 흔들리는 척한다. 매일.
- 04 Dec, 2025
아내한테 '힘들어'라고 못 하는 이유
밤 11시, 집 앞 편의점 집 앞 편의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11시 23분. 아내가 잔다. 딸도 잔다. 들어가면 조용히 씻고 누워야 한다. 그 전에 여기서 맥주 하나. 500ml짜리. 4500원. 오늘 투자자 미팅이 있었다. 세 번째 만남. "트랙션은 좋은데, 번율이 아쉽네요. 조금 더 지켜보고 연락드릴게요." 번역하면 거절이다. 알아듣는다. 이미 열두 번 들었다. 런웨이 7개월 남았다. 정확히는 214일. 매일 계산한다. 직원 8명 월급, 사무실 임대료, 서버비, 마케팅비. 합치면 월 3800만원. 매출은 1200만원. 적자 2600만원씩 쌓인다. 시드 투자금이 녹는다. 눈 녹듯이. 편의점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친다. 36살. 눈 밑이 검다. 머리는 언제 감았더라. 어제? 그제? 기억이 안 난다. 넥타이는 안 맨 지 오래다. 후드 티에 청바지. 창업가 유니폼.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묻는다. "오늘은 어땠어?" 나는 대답한다. "응, 괜찮았어." 거짓말이다. 매일 한다."어땠어?"라는 질문의 무게 아내는 똑똑하다. 대기업 마케팅팀 과장. 연봉 7800만원. 우리 집 주수입이다. 내가 창업하면서 "2년만 버텨줘"라고 했다. 2년 6개월이 지났다. 아내도 힘들다. 알고 있다. 아침 7시 출근, 저녁 8시 퇴근. 주말에는 딸 돌보기. 시댁 전화도 받아야 한다. "창업이 뭐 그리 오래 걸려?" 시어머니 말씀. 아내가 대신 받는다. "오늘은 어땠어?" 이 질문에 진짜 대답하려면. "오늘 투자 미팅 망했어. 이번 달 말까지 프리A 못 받으면 직원들 월급 못 줄 수도 있어. 런웨이 7개월 남았는데 매출 성장이 너무 느려. 경쟁사는 20억 투자받았대. 우리는 언제쯤 될까. 밤마다 현금흐름표 보면서 잠 못 자. 무섭다. 실패할 것 같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지만 못 한다. 왜냐하면. 아내도 지쳤기 때문이다. 내가 창업한다고 했을 때 아내가 말했다. "믿을게. 당신이면 할 수 있어."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배신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대답한다. "응, 괜찮았어. 미팅 잘 됐어." 거짓말. 매일.숫자로 말하기 팀원들한테는 숫자로 말한다. "이번 달 MRR 8% 성장했어. 좋은 흐름이야." "신규 고객 12개 더 늘었어. 다음 달 목표는 15개." "번율은 아직 낮지만, 개선 중이야. 다음 스프린트에서 온보딩 UX 바꾸자." 희망적으로 말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안 되니까. 월급 받는 사람들이다. 가족이 있다. 내 불안을 전염시킬 수 없다. 그런데 집에서는. 아내한테는 숫자로 말할 수 없다. "런웨이 7개월"이라고 하면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7개월 후엔?" "투자 못 받으면?" "직원들은?"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나도 모르니까. 그래서 애매하게 말한다. "일은 잘 되고 있어." "투자도 긍정적이야."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야." 구체적이지 않은 말들. 안개 같은 대답들. 아내는 눈치챈다. 알고 있다. 그래도 더 묻지 않는다. 물으면 내가 무너질까봐. 그 배려가 더 미안하다. 새벽 3시의 계산 오늘도 새벽 3시에 눈 떴다. 슬랙 확인. 알림 없음. 다행이다. 그럼 엑셀을 켠다. 현금흐름표. 시나리오 3개를 계산한다. 보수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5%. 7개월 후 프리A 실패. 직원 5명 정리. 3명만 남기고. 사무실 축소. 공유오피스에서 집으로. 런웨이 12개월로 연장. 그럼 아내한테 뭐라고 말하지. 중립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10%. 5개월 후 프리A 성공. 10억 투자. 직원 12명으로 확대. 사무실 확장. 그럼 2년 안에 시리즈A 가능할까. 낙관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20%. 3개월 후 프리A 성공. 15억 투자. 직원 20명. 그럼... 그럼 아내한테 말할 수 있을까. "봐, 내가 했잖아." 세 개 다 불확실하다. 숫자만 다를 뿐 전부 추측이다. 그래도 계산한다. 안 하면 더 불안하니까. 옆에서 아내가 뒤척인다. 깬 건가. 아니다. 다시 잠든다. 나는 노트북 화면 밝기를 줄인다. 계속 계산한다. 새벽 4시까지."괜찮아"라는 거짓말 점심시간. 팀원들이랑 같이 먹는다. 성수동 식당. 제육볶음 7500원. 8명이니까 6만원. 회사 카드로 긁는다. 법인 통장 잔고 1억 2300만원. 숫자가 줄어든다. 매일. 개발팀 막내가 묻는다. "대표님, 투자는 어떻게 돼가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잘 되고 있어. 곧 좋은 소식 있을 거야." 팀원들이 안도한다. 밥을 먹는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이직 준비한다. 이미 한 명이 물어봤다. "혹시 투자 안 되면 어떻게 되나요?" 조심스럽게. 나는 대답했다. "걱정 마. 플랜 B도 있어." 플랜 B는 없다. 저녁 8시. 아내한테서 카톡 온다.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언제 와?" "10시쯤?" "알았어. 조심히 와." 10시에 못 간다. 알고 있다. 오늘도 회의가 있다. 개발팀이랑 다음 스프린트 계획. 11시까지 걸린다. 그럼 집 가는 길 편의점. 맥주 한 캔. 시간 보내기. 11시 반에 들어간다. 아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기다렸다. "왔어?" "응." "힘들지?" "괜찮아." 괜찮지 않다. 하지만 말한다. 괜찮다고. 왜 말 못 하나 이유를 생각해봤다. 밤마다. 첫 번째 이유: 아내도 힘들다. 내 고민까지 떠안기면 너무 무겁다. 아내는 회사 일도 있고 육아도 있고 시댁 일도 있다. 거기에 내 불안까지 더하면 무너진다. 두 번째 이유: 가장이라는 환상.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착각. 30대 중반 가장.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불안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배웠다. 아버지도 그랬다. 세 번째 이유: 실패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힘들어"라고 말하면 "창업이 잘 안 되고 있어"라고 인정하는 거다. 그럼 진짜 실패가 된다. 말로 만들고 싶지 않다. 네 번째 이유: 해결책이 없어서. 고민을 말하면 아내가 묻는다. "어떻게 할 건데?" 나는 대답 못 한다. 모르니까. 해결책 없는 고민은 그냥 하소연이다. 투덜거림이다. 남자가 그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 다섯 번째 이유: 결정을 미루고 싶어서. "힘들어"라고 말하면 대화가 이어진다. "그만둘까?" "다시 취업할까?" "직원들 정리할까?" 그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여섯 번째 이유: 미안해서. 아내를 설득해서 창업했다. "2년만 믿어줘." 2년이 지났다. 약속을 못 지켰다. 미안하다. 그래서 더 말 못 한다. 일곱 번째 이유: 자존심. 네이버 PM 5년 하고 나왔다. 연봉 9000만원 받았다. 사람들이 말했다. "너 잘될 거야." "능력 있잖아." 그 기대를 저버리기 싫다. 특히 아내한테. 여덟 번째 이유: 혼자 버티는 게 익숙해서. 어릴 때부터 그랬다. 고민은 혼자 한다. 해결도 혼자 한다. 도움 청하는 거 어색하다. 그게 몸에 배었다. 진짜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다 섞인 거겠지. 아내는 알고 있다 어제 아내가 말했다. 자기 전에. 불 끄고. 어둠 속에서. "창업 그만둬도 괜찮아." 나는 대답 못 했다. 한참 후에 말했다. "아직 아니야. 조금만 더 해볼게." 아내가 말했다. "힘들면 말해. 혼자 버티지 말고." "응. 알았어." 거짓말이다. 또. 아내는 알고 있다. 내가 힘든 거. 숫자는 몰라도 분위기는 안다. 새벽에 깨는 것도 알고. 편의점에서 시간 보내는 것도 알고. 맥주 마시고 들어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더 묻지 않는다.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미안하다. 딸의 질문 이번 주 일요일. 드물게 집에 있었다. 딸이 물었다. 3살. 말이 트였다. "아빠, 왜 항상 피곤해?" 나는 웃었다. "피곤한 게 아니야. 아빠 일하는 거야." "일은 왜 해?" "응... 돈 벌려고." "돈은 왜 벌어?" "너 키우려고. 맛있는 거 사주려고." 딸이 말했다. "난 아빠가 같이 놀아주는 게 좋은데." 할 말이 없었다. 3살 애가 맞는 말을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러는가. 가족을 위한다면서 가족과 시간을 못 보낸다. 딸은 자란다. 매일. 나는 그걸 놓치고 있다. 아내가 옆에서 봤다. 아무 말 안 했다. 표정으로 알았다. "봐, 나만 힘든 게 아니야. 딸도 힘들어." 미안했다. 딸한테도. 아내한테도. 그래도 변하지 못한다. 월요일 되면 또 출근한다. 새벽 7시. 투자자 앞에서는 투자자 미팅 때는 다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저희 MRR은 매달 평균 12% 성장하고 있습니다. 번율은 현재 38%지만 다음 분기 60%까지 개선할 계획입니다. TAM은 3조 규모로 추정되며 저희가 선점할 수 있는 시장은..." 자신감 넘친다. 데이터를 보여준다. 그래프는 우상향이다. 고객 사례를 말한다. "A사는 저희 솔루션 도입 후 업무 효율 40% 개선했습니다." 투자자가 묻는다. "경쟁사는 20억 투자받았는데 어떻게 대응할 건가요?" 나는 웃는다. "저희는 차별화된 기술력이 있습니다. 특허 출원 완료했고요. 경쟁사보다 2년 앞섰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과장이다. 2년은 아니다. 6개월쯤? 하지만 투자자 앞에서는 확신에 차서 말한다. 미팅 끝나고 나온다. 엘리베이터 탄다. 혼자.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방금까지 웃었던 얼굴. 지금은 지쳤다. 연기 끝났다. 집에 가면 또 연기한다. "괜찮아." 회사 가면 또 연기한다. "잘 되고 있어." 어디서도 진짜 나를 보여주지 못한다. 창업 동기 모임 한 달에 한 번. 창업 동기들 만난다. 5명. 다들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거기서만 솔직해진다. "런웨이 얼마 남았어?" "6개월." "나는 4개월." "투자는?" "다 거절당했어." "나도." 웃는다. 쓴웃음. 그래도 웃는다. 같이 힘드니까 덜 외롭다. 한 명이 말한다. "와이프한테 말 못 하겠어. 힘들다고." 다들 고개 끄덕인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우리 와이프는 눈치챘어. 근데 더 안 물어봐." "그게 더 미안하지." "맞아." 소주 마신다. 과음하지는 않는다. 내일 또 일해야 하니까. 10시 되면 헤어진다. "다음 달에 봐." "그래. 버티자." 집 가는 길. 조금 덜 외롭다. 한 시간쯤. 그리고 다시 혼자다. 부모님 전화 아버지한테 전화 왔다. 일요일 저녁. "창업 언제까지 할 거냐." "조금만 더요." "조금이 얼마냐. 벌써 2년 넘었다." "투자 받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투자가 그렇게 쉽게 되냐. 내가 보기엔 안 될 것 같은데." "..." "다시 취업 알아봐라. 네이버 있을 때가 좋았다. 연봉도 많이 받고." "아버지." "뭐."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하다가 망하면 어쩔 건데. 애도 있고 와이프도 있는데." "..." 끊었다. 예의는 아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더 듣기 싫었다. 아버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현실적이다. 합리적이다. 그래서 더 듣기 싫다. 나도 같은 생각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밤 11시 30분, 또 편의점 오늘도 편의점이다. 집 앞. 11시 30분. 아내 잔다. 딸도 잔다. 들어가야 한다. 조금만 더. 맥주 한 캔 더. 편의점 알바생이 나를 안다. "또 오셨네요." "응." "힘드세요?" "아니. 괜찮아." 거짓말. 또. 창밖을 본다. 우리 집 불이 꺼져 있다. 22평. 전세 3억. 아내 회사 대출로 얻었다. 내 신용으로는 안 됐다. 창업하면서 신용등급 떨어졌다. 내년에 전세 만기다. 집값 올랐다. 3억 5000만원 될 거다. 5000만원 더 구해야 한다. 어떻게 구하지. 투자 받으면 가능하다. 못 받으면? 모르겠다. 계산한다. 또. 머릿속으로. 런웨이 214일. 일 평균 적자 86만원. 프리A 목표 금액 12억. 확률은? 30%? 40%? 모르겠다. 맥주를 마신다. 500ml. 다 마셨다. 일어난다.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는 길 현관문 연다. 조용히. 신발 벗는다. 소리 안 나게. 거실 지난다. 소파에 뭔가 있다. 이불이다. 아내가 덮어놨다. 나 챙긴 거다. 미안하다. 또. 침실 문 연다. 아내 잔다. 딸도 옆에서 잔다. 평화롭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 내가 힘들게 하고 있는 것들. 씻는다. 조용히. 눕는다. 아내 옆에. 등을 보고. 아내가 뒤척인다. 깨진 않았다. 습관적으로 내 쪽으로 몸을 기댄다. 따뜻하다. 말하고 싶다. "힘들어." "무서워." "잘될 수 있을까." "도와줘." 하지만 못 한다. 오늘도. 언젠가는 말할 것이다. 언제일까. 성공하고 나서? 아니면 실패하고 나서? 그것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눈을 감는다. 내일 또 새벽 3시에 깰 것이다. 슬랙 확인하고. 엑셀 켜고. 계산하고. 그렇게 버틴다. 오늘도.힘들다고 말 못 하는 게 더 힘들다. 그걸 아내도 안다. 나도 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 않는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