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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 09 Dec, 2025
개발 일정이 밀렸을 때, 나는 코더가 된다
개발 일정이 밀렸을 때, 나는 코더가 된다 목요일 오후 4시, 슬랙 알림 "창업님, 이번 주 배포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심장이 멈췄다. 클라이언트한테는 이미 말했다. 이번 주 금요일 배포한다고. 데모 일정도 잡혔다. 월요일 오전 10시. "어느 정도 밀릴 것 같아요?" "최소 3일은요. API 연동에서 예상 못 한 이슈가..." 3일이면 월요일이다. 데모 당일 아침에 배포한다는 소리다. 미친 짓이다. 하지만 연기는 불가능하다. 이 클라이언트가 우리 분기 목표의 40%다. 이게 무산되면 투자 미팅에서 할 말이 없다. "알았어요. 제가 도울게요." 개발팀장 민수가 당황한다. "아니, 창업님이 직접요?" "네. 어차피 전 PM 출신이잖아요." 거짓말이다. 도울 수 있어서가 아니다. 도와야만 해서다.5년 만에 다시 연 IDE 마지막으로 코드 짠 게 언제였나. 네이버 퇴사하기 직전이니까 3년 전쯤? IDE 열었다. VS Code.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Git 클론 받고 로컬 환경 세팅하는데 30분 걸렸다. 옛날엔 10분이면 했는데. 민수가 브랜치 따주고 태스크 할당해줬다. "이 부분 API 응답값 파싱하는 로직이요. 단순 작업인데 손이 부족해서..." 단순 작업. 고맙다. 그래도 나한테 할 수 있는 걸 준 거다. 오후 6시. 팀원들 퇴근 시작한다. "창업님 먼저 들어가세요." "아니, 나 좀 더 있을게." "그럼 저희도..." "아니야. 너희는 내일 아침 일찍 와. 새벽에 내가 푸시 올려놓을게." 거짓말 반이다. 새벽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팀원들까지 야근시킬 순 없다. 월급은 내가 주는데, 야근은 같이 하면 뭔가 미안하다.밤 11시, 디버깅 지옥 에러가 안 잡힌다. API는 200을 뱉는다. 근데 프론트에서 undefined가 뜬다. 뭐가 문제인가. 콘솔 찍어봤다. 네트워크 탭 열어봤다. 데이터는 온다. 근데 파싱이 안 된다. 30분 째 같은 코드만 본다. const data = response.data.results뭐가 문제야. results는 배열이다. 분명히. 그런데. console.log(typeof response.data.results) // undefined아. results가 아니라 result였다. 끝에 s가 없었다. API 문서를 잘못 봤다. 30분을 날렸다. 예전엔 이런 실수 안 했는데. 감이 무뎌졌다. 대표 하면서 코드 안 짜니까, 이제 junior 개발자만도 못하다. 자괴감이 온다. 새벽 2시, 푸시 완료 git push origin feature/api-parsing-fix떨리는 손으로 슬랙에 메시지 남긴다. "민수님, 푸시 올렸습니다. 내일 아침에 확인 부탁드려요." 읽음 표시는 안 뜬다. 당연하다. 자고 있을 시간이다. 사무실을 나선다. 성수역은 텅 비었다. 택시를 탄다. 기사님이 말을 건다. "야근하셨어요?" "네." "요즘 회사들이 왜 이렇게 직원을 갈아요." 대답을 못 했다. 나는 직원이 아니라 대표라서. 그리고 아무도 날 갈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간 거다.금요일 오후 3시, 배포 완료 "배포 성공했습니다." 민수의 메시지에 안도한다. 클라이언트한테 연락한다. "금요일 배포 완료했습니다. 월요일 데모 문제없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죠." 끊고 나니 허무하다. 내가 짠 코드는 전체의 5%도 안 된다. 그것도 단순 작업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쳐있나. 대표가 코딩하는 이유 팀원들은 모른다. 내가 목요일 밤에 코딩한 걸. 민수만 안다. 커밋 로그에 남아있으니까. 그런데 민수는 아무 말 안 한다. 그냥 "확인했습니다" 한 줄만 보냈다. 고맙다. 괜히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 대표가 왜 코딩을 하나. 개발팀장이 있는데. 개발자가 4명이나 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책임이 내 거니까. 클라이언트한테 약속한 건 나다. 투자자한테 보고할 것도 나다. 직원들 월급 주는 것도 나다. 일정이 밀리면, 손해는 회사가 본다. 그 회사는 내 거다. 그러니까 내가 움직인다.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한다. 없어도 만든다. 코딩이든, 디자인이든, 영업이든. 잘하지 못해도 코드는 형편없었다. 변수명도 일관성 없고, 주석도 없고, 리팩토링 여지 많고. 민수가 다음날 내 코드 고쳤을 거다. 분명히. 그래도 괜찮다. 내 코드가 좋아서 한 게 아니니까. 일정을 맞추려고 한 거니까. 팀원들한테 "대표도 같이 고생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 거니까. PM 출신 대표라서 코딩 할 줄 안다고 자랑하려는 거 아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직성이 풀린다. 안 하고 기다리는 게 더 힘들다. 다음 주 또 밀리면 이번 주도 일정 빡빡하다. 또 밀릴 수도 있다. 그럼 또 코딩할 거다. 새벽에 사무실 나와서, 민수가 준 태스크 할 거다. 팀원들은 또 모를 거다. 그게 더 편하다. 괜히 미안해하니까. 대표가 코딩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표는 비전 제시하고, 투자 받고, 전략 짜는 게 일 아닌가요?" 맞다. 근데 그건 회사가 잘 돌아갈 때 얘기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일정 지키는 게 전략이다. 클라이언트 놓치지 않는 게 비전이다. 그러니까 코딩한다.월요일 데모는 성공했다. 계약 이어진다. 다행이다. 민수한테 커피 쿠폰 보냈다. 고맙다고. 그는 "?" 만 보냈다. 괜찮다. 알 필요 없다.
- 03 Dec, 2025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벽 3시 41분 또 눈 떴다. 슬랙 알림은 없다. 당연하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건 나뿐이니까. 스프레드시트를 연다. 어제 저녁에 닫았던 그 파일. "시나리오 분석 v23.xlsx" MRR 그래프를 본다. 지난달 1050만원, 이번 달 1200만원. 성장은 하고 있다. 14% 성장. 나쁘지 않다. 그런데. 런웨이는 8개월. 14%씩 성장하면 프리A 받을 만한 트랙션까지 12개월 걸린다. 계산이 안 맞는다. 4개월이 모자라. "피봇해야 하나." 이 생각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시작한다. 매일.출근길 계산기 7시 21분 지하철. 어제 만난 VC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된다. "방향은 좋은데요, 시장이 너무 작지 않나요?" TAM 3000억이라고 했다. IR 덱에 그렇게 썼다. 근데 솔직히 그 숫자 믿냐고 물으면 나도 자신 없다. 리서치 회사 보고서 짜깁기한 거다. 실제로 우리가 공략할 수 있는 시장은 얼마나 될까. B2B SaaS, 중소기업 타겟, 업무 자동화. 경쟁사 4개. 우리 차별점은 '사용성'. 그런데 고객들은 "가격이 중요해요"라고 한다. 우리 강점을 고객이 안 본다. 이게 문제다. 피봇 시나리오 A: 타겟을 대기업으로. 단가 높이기. 피봇 시나리오 B: 기능 줄이고 가격 낮추기. 볼륨 게임. 피봇 시나리오 C: 완전히 다른 버티컬로. HR? 재무? 계산기 두드린다. 시나리오별 매출 예측. 대기업 타겟하면 영업 사이클 6개월. 런웨이가 안 된다. 가격 낮추면 단위경제학이 안 맞는다. 다른 버티컬은... 처음부터 다시? "망했네." 혼잣말이 나온다. 옆 사람이 쳐다본다. 아침 스탠드업 9시 30분. 팀원들 모였다. "어제 A사 미팅 어땠어요?" 개발팀장 민수가 묻는다. "잘 됐어. 긍정적이야." 거짓말이다. A사는 "검토해보겠습니다" 했다. 이건 거절이다. 20번 들어봐서 안다. "다음 주 B사 데모 준비하자. 이번엔 자동화 케이스 3개 더 보여주고." 팀원들이 고개 끄덕인다. 민수가 말한다. "근데 대표님, B사는 대기업이잖아요. 우리 솔루션이 엔터프라이즈급으로 준비됐나요?" 준비 안 됐다. 보안 인증도 없고, 온프레미스 배포도 안 된다. "일단 관심 보이면 커스터마이징 들어가는 거지 뭐." 민수가 약간 불안한 표정이다. 눈치챘나. 회의 끝나고 민수를 붙잡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 방향." 민수가 잠깐 망설인다. "솔직히요... 중소기업 고객들 반응이 생각보다 안 좋잖아요. 이탈률도 높고. 대기업 가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준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준비 시간. 그게 없다는 게 문제지.점심, 데이터와 직관 사이 팀원들이랑 성수동 국밥집. 밥 먹으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돌아간다. 데이터를 본다.신규 고객 획득 비용(CAC): 180만원 고객 생애 가치(LTV): 320만원 LTV/CAC 비율: 1.78책에서는 3 이상이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1.78. 그런데 이탈률이 문제다. 6개월 리텐션 45%. 절반이 떠난다. 왜 떠나나. 고객 인터뷰 10개 다시 읽어봤다. "너무 복잡해요." "우리가 원하는 기능이 없어요." "가격 대비 효과가 안 보여요." 복잡하다고? 우리는 사용성이 강점인데. 민수 말대로 타겟을 잘못 잡은 건가. 중소기업은 '쉬운 것'을 원하는데, 우리는 '강력한 것'을 만들었나. 그럼 대기업으로 가야 하나. 대기업은 강력한 걸 원한다. 맞다. 근데 우리 솔루션이 정말 대기업급인가. 데이터는 '피봇하라'고 한다. 직관은 '조금만 더 버텨봐'라고 한다. 국밥 반도 못 먹었다. 오후 3시, VC 전화 "대표님,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부 검토 들어갔는데요." 기대한다. 제발. "트랙션이 나쁘지 않은데, 시장 포지셔닝이 애매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또 이거다. "중소기업 타겟인데 가격은 비싸고, 대기업용이라고 하기엔 기능이 부족하고. 타겟을 명확히 하시면 다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 끊었다. 책상에 머리를 박는다. 진짜로. 5분 정도 그러고 있었나. 민수가 다가온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민수가 알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간다. 노트북 열어서 IR 덱을 연다. 슬라이드 12번. "Target Market" 중소기업 500~1000명 규모라고 써있다. Delete 키를 누른다. 지워진다. 그럼 뭐라고 쓰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춘다. 10분 동안. 원복한다. Ctrl+Z. 아직은 아니다. 확신이 없다.저녁 8시, 시뮬레이션 팀원들 퇴근했다. 나만 남았다. 새 엑셀 파일 연다. "피봇 시뮬레이션 최종.xlsx" 시나리오 A: 대기업 타겟 전환영업 사이클: 6개월 첫 계약까지 예상 기간: 8개월 런웨이: 8개월 결론: 망함시나리오 B: 프리미엄 축소, 가격 인하월 구독료: 15만원 → 8만원 예상 고객 증가: 2배 매출 증가: 1200만원 → 1600만원 CAC는 그대로 결론: 단위경제학 더 나빠짐시나리오 C: 버티컬 변경 (HR 자동화)시장조사 기간: 2개월 MVP 재개발: 3개월 런웨이: 8개월 결론: 런웨이 부족시나리오 D: 현재 방향 유지MRR 14% 성장 유지 가정 12개월 후 예상 MRR: 4000만원 프리A 가능 여부: 애매 8개월 후 런웨이 소진 결론: 도박네 개 시나리오 모두 답이 없다. "미친." 혼자 웃는다. 웃음이 나온다. 진짜로. 계산이 안 맞는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한 번 더 계산하면 답이 나올까 했다. 안 나온다. 편의점 간다. 삼각김밥 2개, 바나나우유. 돌아와서 먹는다. 모니터 보면서. 검색한다. "스타트업 피봇 성공 사례" 배달의민족: 배달 대행 → 배달 플랫폼 인스타그램: 위치 기반 체크인 → 사진 공유 트위터: 팟캐스트 플랫폼 → 마이크로블로깅 다들 피봇했다. 성공했다. 그럼 우리도? 다음 검색. "스타트업 피봇 실패 사례" 결과가 더 많다. 훨씬 많다. 아, 그렇지. 실패한 회사들은 뉴스가 안 되니까. 데이터가 없는 거다. 생존자 편향. 경영학 수업 때 배웠다. 성공한 회사들은 피봇했다고 말한다. 근데 피봇한 회사 중 몇 %가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시계 본다. 밤 10시 42분. 아내한테 카톡 온다. "언제 와? 딸이 아빠 기다려" "30분 후에 출발할게" 거짓말이다. 1시간은 더 있을 거다. 밤 11시 50분, 결정 아닌 결정 결론을 내려야 한다. 내일 아침 민수가 또 물어볼 거다. A4 용지 꺼낸다. 펜 든다. 왼쪽에 "피봇 해야 하는 이유"현재 트랙션으로는 투자 어려움 타겟 시장 반응 미온적 경쟁사들과 차별화 약함 단위경제학 개선 필요 VC들도 포지셔닝 문제 지적오른쪽에 "피봇 하면 안 되는 이유"런웨이 부족, 피봇할 시간 없음 팀원들 혼란, 사기 저하 우려 누적 데이터/고객 관계 리셋 새 방향 성공 보장 없음 피봇은 도망일 수도두 개 리스트 본다. 둘 다 맞다. 둘 다 틀리다. 데이터는 피봇하라 한다. 직관은 버티라 한다. 그럼 뭐가 답인가. 답은 없다. 알았다. 대신 질문을 바꾼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나?" 적는다.다음 주 B사 미팅 - 대기업 반응 테스트 기존 고객 10명 전화 - 이탈 이유 재확인 가격 A/B 테스트 - 소규모로 개발 리소스 20% - 엔터프라이즈 기능 준비피봇인가, 유지인가? 둘 다 아니다. 검증이다. 4주 준다. 4주 후 데이터 보고 결정한다. 완벽한 답은 아니다. 그냥 다음 스텝이다. 펜 내려놓는다. 좀 후련하다. 조금. 가방 챙긴다. 불 끈다. 나간다. 지하철에서 아내한테 카톡한다. "지금 출발함. 미안" 답 온다. "조심히 와. 사랑해" 핸드폰 본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왜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피곤해서 그런가. 새벽 1시 12분 집 도착했다. 조용하다. 딸은 벌써 잤다. 방에 들어가서 본다. 작은 숨소리. 이마에 키스한다. "아빠가 뭘 하고 있는지 너도 언젠가 알겠지." 침대에 눕는다. 내일도 묻겠지. 피봇할까? 그럼 또 답하겠지. 모르겠다고. 그게 솔직한 답이다. 확신이 없다. 그래도 간다. 데이터 보고, 고객 만나고, 계산하고, 고민한다. 언젠가 답이 나올까. 모르겠다. 정말. 눈 감는다. 3시간 후면 또 눈 뜰 거다. 스프레드시트 열 거다. 피봇할까? 또 물을 거다. 그게 내 일이다.답은 없다. 그래도 내일은 온다. 계산기는 계속 두드린다.
- 03 Dec, 2025
투자자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투자자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오늘도 '검토' 하나 추가 오전 10시. 강남역 근처 카페. 투자자 앞에서 45분 발표했다. 준비는 3주 했다. "좋네요. 팀 구성도 괜찮고. 일단 검토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웃으면서 악수했다.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카페 나와서 스프레드시트 열었다. 'VC 미팅 현황' 시트. F열. '진행 상태'. "검토 중"이라고 입력했다. 10번째다.점심은 굶었다. 입맛이 없다. 사무실 돌아와서 CTO한테 물었다. "미팅 어땠어요?" "괜찮았어. 긍정적이었어." 거짓말이다. 긍정적이면 바로 다음 미팅 잡는다. 2주 후, 1달 후 이런 소리 안 한다. "검토해보겠습니다"는 70% 확률로 거절이다. 경험상. 나머지 30%는 진짜 검토 중이거나, 아니면 더 긴 거절이다. 5개 거절의 패턴 지난 2달. 거절 5개 받았다. 패턴이 있다. 1번 거절: "아직 이르다" 시드 투자자였다. 2억 제안했다. "좋은데, 트랙션이 조금 더 필요해요. 6개월 후 다시 봐요." 6개월이면 런웨이 끝난다. 그 얘긴 안 했다. 2번 거절: "우리 포트폴리오랑 안 맞다" 이건 솔직한 거절이다. 고맙다. 시간 낭비 안 하게 해줬다. 3번 거절: "내부 검토 결과..." 이메일로 왔다. 3주 걸렸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나머지는 안 읽었다. 4번 거절: 연락 두절 제일 최악이다. 문자 3번, 이메일 2번. 답 없다. 카톡 읽씹. 그냥 거절이라고 해주면 되는데. 5번 거절: "다음 라운드에서" "지금은 어렵고요, 프리A 할 때 다시 연락주세요." 프리A 하려고 지금 투자 받으려는 건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거절은 그래도 낫다. 끝이니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검토 중'은 지옥이다. 끝도 아니고 시작도 아니다. 매일 기다린다. 카톡 알림 올 때마다 확인한다. 아니다. 광고 문자다. 10개 보류의 무게 현재 '검토 중' 10개. 스프레드시트에 정리돼 있다. A사: 1차 미팅 후 3주째. 답 없음. B사: "2주 후 파트너 미팅 잡자" - 3주 지남. C사: "실사 들어가겠다" - 자료 보낸 지 2주. D사: "다음 주 전화" - 전화 안 옴. E사: "긍정적으로 검토" - 4주 지남. F사: 오늘 추가. 방금. G사: "투자위원회 상정" - 한 달째. H사: "관심 있다" - 구체적 얘기 없음. I사: "조건 맞으면..." - 조건 얘기 안 나옴. J사: "파운더 일정 보고" - 2주째 일정 안 나옴. 10개. 확률 계산해봤다. 30% 가정하면 3개. 3개 중 1개라도 성사되면 된다. 아니다. 2개는 돼야 한다. 목표 금액 5억이니까. 매일 확률 계산한다. 의미 없는 짓이다.목요일 밤. 아내가 물었다. "투자 어떻게 돼가?" "진행 중이야. 잘 될 것 같아." "진짜?" "응. 여러 군데 긍정적이야." 또 거짓말했다. '긍정적'과 '검토 중'은 다른 말이다. 나는 안다. 아내는 믿고 싶어 한다. 나도 믿고 싶다. 버티는 법 1: 숫자 보기 패닉 올 때. 스프레드시트 연다. '재무 현황' 시트. 현금: 6800만원. 월 소진: 850만원. (인건비 650 + 사무실 180 + 기타 20) 런웨이: 8개월. 8개월. 투자 못 받으면 어떻게 되나. 시나리오 짰다. 3개. 최악 시나리오:5개월 후 투자 불발 급여 50% 삭감 3개월 더 버팀 결국 정리중립 시나리오:3개월 내 브릿지 투자 1억 6개월 연장 프리A 준비낙관 시나리오:2개월 내 5억 투자 유치 팀 2명 충원 매출 집중확률은? 최악 40%, 중립 30%, 낙관 30%. 숫자 보면 정신 차린다. 감정 빠지면 끝이다. 숫자만 보면 된다. 버티는 법 2: 병렬 처리 10개 검토 중이면? 10개 더 미팅 잡는다. 목표는 항상 파이프라인 20개. 상단 10개 (진행 중), 하단 10개 (신규 컨택). 하나 떨어지면 하나 채운다. VC 리스트 100개 만들었다. A급 (원하는 곳): 15개 - 10개 미팅 완료, 5개 대기. B급 (괜찮은 곳): 30개 - 컨택 중. C급 (일단 만나는 곳): 55개 - 명단 정리. 매일 아침. 이메일 3개 보낸다. "안녕하세요, 저희 솔루션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답장률 20%. 100개 보내면 20개 답장. 10개 미팅. 3개 진행. 1개 성사. 깔때기다. Funnel. 위에서 계속 부어야 아래로 떨어진다. 멈추면 끝난다. 버티는 법 3: 루틴 유지 무너지면 안 된다. 아침 7시 출근. 변함없다. 팀원들 보면 웃는다. "오늘도 화이팅!" 점심 같이 먹는다. 투자 얘기 안 한다. "어제 고객사 미팅 어땠어?" "데모 반응 좋았어요." "좋네. 클로징까지 가보자." 밝게 말한다. 리더니까. 불안은 전염된다. 내가 흔들리면 팀이 흔들린다. 혼자 있을 때만 한숨 쉰다. 밤 11시. 사무실 불 끈다. 집 가는 지하철. 스마트폰 본다. 새 메일 없다. 카톡 없다. 내일도 똑같을 거다. 그래도 된다. 루틴만 지키면 된다. 버티는 법 4: 작은 승리 챙기기 투자 성사는 Big Win이다. 근데 당장은 안 온다. 그럼 Small Win 챙긴다. 이번 주 Small Wins:신규 고객사 계약 1건 (월 50만원) MAU 8% 증가 개발 일정 안 밀림 VC 2곳 신규 미팅 확정작다. 근데 이게 쌓인다. 매주 금요일. 노션에 기록한다. '이번 주 잘한 것' 리스트. 안 보면 다 까먹는다. 보면 '아, 그래도 뭔가 하고 있네' 싶다. 투자 못 받아도. 회사는 돌아간다. 매출은 오른다. 느려도. 이게 트랙션이다. 오늘 밤도 밤 12시. 아직 사무실이다. IR 덱 또 수정한다. 51번째 버전. 슬라이드 8번. '트랙션'. 그래프 조금 올랐다. 각도 2도. 의미 있나? 모르겠다. 투자자들은 '하키스틱 그로스' 원한다. 우린 '완만한 우상향'이다. 그래도 상승은 상승이다. 내일 또 미팅이다. K사. "검토해보겠습니다" 들을 확률 70%. 그래도 간다. 20% 확률에 거는 거다. 창업이 원래 그렇다.검토는 끝이 아니다. 다음 미팅까지 버티는 거다.
- 03 Dec, 2025
경쟁사 뉴스레터를 보는 시간
새벽 4시 15분 잠이 안 와서 노트북을 열었다. 슬랙에 아직 안 읽은 메시지 47개. 메일함에 미팅 요청 3건. 그리고 뉴스레터 하나. "○○테크, 시리즈A 120억 투자 유치" 심장이 멈췄다.정확히는 3초간 숨을 못 쉬었다. 화면을 다시 봤다. 120억. 시리즈A. 리드 투자자가 저기네. 우리가 3번 거절당한 그 VC. 마우스 커서가 떨렸다. 기사를 클릭했다. "월 매출 3000만원 돌파, 전년 대비 400% 성장" "기업 고객 80곳 확보" "시장 점유율 1위 목표" 우리 월 매출은 1200만원이다. 기업 고객은 23곳. 시드 투자 3억 받은 게 1년 반 전이다. 새벽 4시에 이걸 보고 있다. 스크롤을 내렸다 대표 인터뷰가 나왔다. 사진도 있다. 밝게 웃고 있다. 팀원들이랑 같이 찍은 단체 사진. 다들 행복해 보인다. 사무실은 강남 어딘가. 창문이 크다. "시장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고객들이 먼저 찾아오는 단계죠." 읽으면서 욕이 나왔다. 우리는 영업팀 2명이 발로 뛴다. 한 곳 계약하는 데 평균 3개월. 데모 10번 하면 1곳 계약. 그것도 소액 플랜. 핸드폰을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기사를 캡처했다. 슬랙 '경영진' 채널에 올릴까 말까 고민했다. 올리지 않았다. 대신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비교하기 시작했다 우리 MRR: 1200만원 저기 MRR: 3000만원 우리 성장률: 월평균 8% 저기 성장률: 전년 대비 400% 우리 투자금: 3억 (1년 6개월 전) 저기 투자금: 120억 (지금) 런웨이 계산을 다시 했다. 현금 2억 4000만원 남음. 월 번레이트 3200만원. 7.5개월 남음. 7.5개월 안에 시리즈A를 따내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저기는 120억으로 2년은 버틴다. 마케팅 돌리고 개발자 더 뽑고 영업 조직 키우고. 그러면 시장 점유율은 더 벌어진다. 우리는 7.5개월. 키보드에 이마를 박았다. 5시 30분 커피를 내렸다. 다섯 번째다. 위가 쓰리다. 약 먹어야 하는데 귀찮다. 기사를 다시 읽었다. 댓글도 봤다. "축하합니다!" "대단하시네요" "부럽습니다 ㅠㅠ" 링크드인도 확인했다. 저기 대표 포스팅. 좋아요 430개. 댓글 68개. 다들 축하한다고 난리다. 우리가 시드 받았을 때는 좋아요 12개였다. 핸드폰을 뒤집었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깜빡인다. 바꿔야 하는데 계속 미뤘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저 회사는 뭐가 달랐을까. 우리 제품이 나쁜 건가. 세일즈를 못 한 건가. IR을 못 한 건가. 타이밍이 나빴나. 운이 없는 건가. 아니면 내가 부족한 건가.출근 시간 7시가 됐다. 첫 출근은 보통 개발팀 막내다. 7시 40분쯤 온다. 화장실 가서 세수했다. 거울을 봤다. 눈 밑이 까맣다. 36살 얼굴이 아니다. '괜찮은 척'을 준비했다. 슬랙에 들어갔다. 저녁에 올라온 개발 진행 상황 확인. 댓글 달았다. "고생했어요 👍" 이모티콘까지. 메일 3통 답장 썼다. IR 자료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 43페이지 중 6페이지 숫자 수정. 경쟁사 분석 문서를 만들었다. 저기 강점: 자금력, 팀 규모, 마케팅 예산 우리 강점: 제품 완성도, 고객 만족도, 운영 효율 거짓말은 아니다. 우리 NPS 점수가 더 높다. 78점. 저기는 65점. 고객들은 우리 제품을 좋아한다. 문제는 고객 수가 23곳이란 거다. 7시 50분. 문 여는 소리. "대표님 벌써 오셨어요?" 웃었다. "응, 일찍 일어나서." "커피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너 먼저 마셔." 모니터를 닫았다. 경쟁사 뉴스는 안 보이게. 아침 스탠드업 9시 30분. 전체 회의. 다들 모였다. 8명. 개발 4명 기획 1명 디자인 1명 영업 2명. 평균 나이 29살. 다들 열심히 한다. 월급은 시장 평균의 70%. 스톡옵션으로 메꿨다. "이번 주 목표 공유할게요." 개발팀: 대시보드 개편 80% 완료 영업팀: 신규 미팅 6건 잡음 기획팀: 사용자 인터뷰 3건 진행 다들 잘하고 있다. 진짜로. "수고하고 있어요. 이번 주도 화이팅!" 회의 끝. 다들 흩어졌다. 영업팀 리드가 다가왔다. "대표님, ○○테크 투자 소식 보셨어요?" 심장이 또 떨렸다. 티 안 냈다. "응, 봤어." "우리도... 괜찮을까요?" 3초 멈췄다. "우리는 우리 길 가는 거야. 제품이 더 좋잖아. 고객들 반응 봐. 다들 만족한다고 하잖아." "그렇긴 한데... 저기가 마케팅 돌리기 시작하면..." "그래서 우리가 더 빨리 움직여야지. 프리A 준비 잘하고 있어. 다음 주에 VC 2곳 더 만나." "알겠습니다." 돌아갔다.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나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한숨 쉬었다. 3초만 쉬고 나왔다. 오후 2시 점심 먹고 카페에 나왔다. 혼자. 노트북 열었다. 경쟁사 웹사이트 들어갔다. 하나하나 클릭해봤다. UI는 우리가 낫다. 기능은 비슷하다. 가격은 저기가 20% 비싸다. 그런데도 고객이 3배 많다. 이유를 생각했다. 브랜딩인가. 마케팅인가. 영업력인가. 네트워크인가. 아니면 투자금의 차이인가. VC 미팅 때마다 듣는다. "트랙션이 더 필요합니다." 트랙션 만들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 뽑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 받으려면 트랙션이 필요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저기는 120억으로 그 고리를 끊었다. 우리는 7.5개월 안에 끊어야 한다. 핸드폰이 울렸다. VC 파트너. "대표님, 다음 주 화요일 미팅 가능하세요?" "네, 가능합니다." "IR 자료 미리 보내주시면 검토하고 만나죠." "지금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끊었다. 43페이지 IR 덱을 열었다. 다시 봤다. "시장 규모 5조원" 맞다. "월 MRR 성장 8%" 맞다. "고객 만족도 78점" 맞다. 그런데 옆 슬라이드에 경쟁사 현황 넣어야 하나. "경쟁사 ○○테크, 시리즈A 120억 유치" 넣으면 솔직한 거다. 안 넣으면 숨기는 거다. 고민했다. 넣었다. 그 밑에 한 줄 더. "차별점: 제품 완성도 및 고객 밀착 운영 모델" 저장했다. PDF로 내보냈다. 메일 보냈다. 노트북을 닫았다. 커피를 다 마셨다. 식었다. 퇴근길 밤 11시. 사무실을 나왔다. 지하철에 앉았다. 핸드폰 열었다. 링크드인 알림 17개. 다 저 회사 관련이다. 업계 사람들이 공유하고 댓글 달고 난리다. "게임 체인저" "시장 판도가 바뀔 듯" "이제 진짜 시작이네요" 핸드폰을 껐다. 창밖을 봤다. 지하철은 어둠 속을 달린다. 집에 도착했다. 12시. 아내는 자고 있다. 딸도 자고 있다. 조용히 씻었다. 침대에 누웠다. 내일 할 일을 생각했다. VC 미팅 준비. 제품 로드맵 점검. 영업 파이프라인 확인. 개발 일정 체크. 그리고 프리A 마감. 7.5개월. 눈을 감았다. 저기는 120억으로 2년을 달린다. 우리는 2억 4000만원으로 7.5개월. 그런데 포기는 안 한다. 아직은.새벽엔 패배자가 됐다가, 아침엔 대표가 된다. 매일.
- 02 Dec, 2025
월급 날 전날 밤, 통장 잔고 보기
월급 날 전날 밤, 통장 잔고를 본다 계산의 밤 새벽 1시 52분. 노트북 화면의 스프레드시트가 눈에 들어온다. 월급 날이 내일이다. 매달 이맘때면 어김없이 이 자리에 앉는다. 사무실 불도 꺼졌다. 성수동 공유오피스의 창밖으로 서울 야경이 흐릿하게 보인다. 밤샘 작업 중인 다른 팀들의 불빛이 띄엄띄엄 보인다. 저 불빛들 중 몇 개가 같은 심정일까. 계산기를 든다. 스마트폰의 기본 계산기 앱이다. 이미 엑셀로는 다 계산했지만, 손으로 다시 한 번 더 눌러본다. 손가락이 비현실적으로 움직인다. 매출 1200만원. 이건 확정이다. 어제 영업팀에서 최종 계약금이 들어왔다. 근데 1200만원이라는 숫자가 커 보이면서도 자꾸 작아 보인다. 숫자에 익숙해져서일까, 아니면 이미 심장이 굳어져서일까. 비용은? 이건 변수가 많다.사무실 월세: 180만원 (고정) 직원 8명 월급: 4200만원 (고정, 보너스 제외) 클라우드 비용: 320만원 (증가 추세) 광고비: 800만원 (월별 유동) 기타: 600만원 (미터기)합계. 7100만원. 1200만원 - 7100만원 = -5900만원.손가락이 멈춘다. 같은 식을 세 번을 더 눌렀다. 계산기가 잘못되길 바랐다. 근데 이미 엑셀에서 수십 번 본 숫자다. 내가 엑셀을 잘못 짰을 리도 없다. 나는 네이버에서 기획자였고, 숫자를 읽고 그릴 줄 안다. 이 적자는 진짜다. 그래서 자본금이 있는 거다. 자본금 3억. 3개월마다 2500만원씩 빠진다. 런웨이 8개월. 8개월. 32주. 224일. 오늘이 12월 30일이니까... 8월 말쯤이다. 내년 8월 말. 8개월 안에 회사가 턴어라운드되든지, 투자를 또 받든지, 아니면 문을 닫든지. 직원들 모르게 직원들은 몰라도 된다. 절대 모르게 해야 한다. 내일 오후 2시, 급여 이체 시간. 직원들이 아마 확인할 거다. 한두 명은 슬랙 상태메시지로 '월급 왔다!' 이러고 있을 거다. 나는 그 메시지들을 봐야 한다. 웃으면서. 아니면 "수고했어!" 이렇게 답장을 해야 한다. 4200만원. 여기에 사무실비, 클라우드비, 광고비... 다 떨어져나가고 나면 우리 통장에는 뭐가 남을까. 아, 맞다. 음수다. 그래서 월초부터 현금흐름 관리를 하는 거다. 지난주 수금이 100만원 지연됐으니 그 돈은 다음주에 들어온다. A사 계약금 1500만원은 1월 초다. B사와의 미팅은 아직 진전이 없다. 예정된 매출이 안 들어올 확률은 15% 정도. 그럼 매출이 1020만원이 되는 건가. 1020만원 - 7100만원 = -6080만원. 계산기를 내려놓는다. 손가락이 떨린다. 이게 매달 반복되는 거다. 월말이 되면 스프레드시트를 켜고, 세 가지 시나리오를 그린다. 보수적 시나리오, 현실적 시나리오, 낙관적 시나리오. 근데 세 가지 모두 같다. 다 마이너스다. 상황이 좋으면 마이너스 4900만원, 나쁘면 마이너스 6500만원. 그 사이에서 산다. 그 사이에서 호흡한다. 아내한테는 말 못 했다. "괜찮아, 런웨이 8개월이면 괜찮아. 그 전에 시리즈A 받을 거야"라고만 했다. 아내의 봉급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고 나면 자괴감이 든다. 내가 가장인데, 왜 아내 월급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딸이 어제 "아빠, 일요일에도 일해?" 물었다. 3살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아내가 나를 봐도 불안한 티가 난다고 했다. "얼굴이 계속 그런 거 같아"라고. 그래서 나는 팀원들 앞에서는 절대 그 얼굴을 드러내면 안 된다. 회의에서도, 슬랙에서도. 항상 "일단 해보자", "데이터로 보여줘", "런웨이가 충분하니까 이 기회는 잡자"라고 말해야 한다. 직원들이 불안해하면 회사는 끝난다. 투자자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미팅 다섯 개가 보류 중이다. 그들은 "조금 더 트랙션을 보고 판단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번역하면 "아직 필요 없습니다"다. 근데 내 피치는 계속 자신감으로 가득 찬 척해야 한다. 회의실에서 나올 땐 다시 가슴이 철렁한다. 밤 11시 12분 노트북 화면의 엑셀을 닫으려다가 멈췄다. 한 가지를 더 확인해야 한다. 프리A 투자 진행 중인 VC가 있다. 순환투자 형태로, 성공적인 스타트업들의 투자를 모아서 새로운 회사들에 넣는 방식이다. 그들은 "좋은 프로덕트고, 팀도 좋다"고 했다. 근데 "시리즈A는 아직 이르고, 프리A는 조건이 좋아야"라고 했다. 조건이 좋다는 게 뭘까. 우리가 빨리 회수 가능해야 한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빨리 유니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우리 지표는?MRR: 1200만원 (성장률: 월 8%) CAC: 550만원 (개선 추세 없음) Churn: 월 4% (괜찮은 편) Runway: 8개월 (나쁜 편)이 지표를 보면 투자자들이 뭐라고 할까. "좋은 프로덕트지만, 성장이 느려요", "CAC가 높네요", "시장이 좀 작은 것 같은데요"라고 할 것 같다. 우리가 시장을 잘못 짚었을까? 아니면 마케팅을 잘못 했을까? 아니면 그냥 우리가 부족한 걸까.새벽 2시 34분. 나는 여전히 사무실에 있다. 직원들이 얼마 전에 "대표님, 너무 늦으니까 나가세요"라고 했다. 고마운데 구차했다. 넌 집에 갈 집이 있잖아. 나도 집이 있고, 아내가 있고, 딸이 있다. 근데 마음이 여기 있다. 자본금 3억이 여기 있다. 런웨이 8개월이 여기 있다. 월급 날이 내일이다. 직원들이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그냥 자기 월급이 들어온 줄만 알면 된다. 우리 회사가 매달 5900만원을 까먹는다는 건 몰라도 된다. 근데 난 알아야 한다. 그게 CEO의 일이다. 실패한 스타트업들의 기사를 자꾸만 검색한다. "급속 성장, 갑자기 문을 닫다." "잘나가던 스타트업이 왜 망했나." "투자 라운드 실패 후 폐업." 새벽 3시에 이런 기사들을 읽다 보면 무서워진다.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해야 한다. 내일 팀미팅은 오전 10시다. 그때 난 밝은 표정으로 이번 달 OKR을 리뷰하고, 다음 달 전략을 얘기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니,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척. 확신 있는 척. "괜찮아, 될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 번. 통장 잔고는 여전히 음수다. 근데 내일은 4200만원이 또 빠져나간다.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8개월 동안 계속. 계산기 앱을 내렸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아내가 또 뭔가 말하겠지. "얼굴이 좀..." 그럼 나는 웃을 거다. "일 많아. 괜찮아."월급 날 전날 밤, 또 다른 CEO도 아마 같은 계산을 하고 있을 것 같다.
- 02 Dec, 2025
새벽 3시, 슬랙 알림이 울릴 때
새벽 3시, 슬랙 알림이 울릴 때 알람이 울린다. 3시 12분. 눈을 뜨고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자동으로 손이 움직인다. 베개 옆 폰을 집는다. 화면이 얼굴을 때린다. 슬랙. 빨간 점. 1개. '누가 또?' 침대 옆에 아내가 자고 있다.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부럽다. 정말 부럽다. 조용히 거실로 나간다. 아이 깨울까봐 슬리퍼를 벗는다. 지나가는 방 문 살짝 열어본다. 딸이 팔 벌리고 자고 있다. 몸 짱 길어진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컸지. 거실 소파에 앉는다. 2시간 반 더 자야 출근 시간인데. 폰을 켠다. 빨간 점의 정체 개발팀 리드 김준수. 오늘 밤 9시쯤 채용공고를 들었다. 오후 미팅에서. "런웨이가 8개월이고, 투자자들이 헤드수를 봐요. 지금 인원으로는 피치 덱에 설득력이 없어서..." 당연히 의사결정이 빠르다. 스타트업의 장점이라고 했다. 팀원들 앞에서는 밝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추가 연봉. 사무실 확장 가능성. 사회보험료. 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아, 김준수가 리드하면서 누군가를 더 끌어오는 게 맞아. 신입이나 경력이나. 팀 규모 성장이 곧 스케일링이야." 슬랙 메시지. "대표님, 이 채용공고 좀 봐줄 수 있을까요? 내가 초안 작성했는데. 한 번 검토해주면..." 시간이 13분 전이다. '3시에 이걸 왜 보내지?' 다시 읽는다. "지금 보내도 괜찮을까봐서... 내일 아침 보면 어때요?" 그 뒤에 다섯 개의 이모지. 죄송함의 이모지들. 알 것 같다. 김준수는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밤 11시에 퇴근했으니까. 늦어도 자정 즈음에. 그 후로 계속 생각했을 것이다. 채용공고. IR. 트랙션. 다음 분기. 나처럼. 그래서 3시에 보냈을 거다. 자다 깼거나, 아니면 계속 일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폰을 내려놨다가 다시 집는다.3시의 의무감 회신할까. 말 그대로 반 초 정도만에 끝난다. 'ㅇㅋ 내일 아침에 보자' Enter. '읽음' 표시가 떠야 해야 마음이 놓인다. 말도 안 된다. 뭐가 어떻게 놓인단 말인가. 어차피 내일 아침에 봐야 하는 거고, 밤 3시에 확인했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건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대표'니까. 대표는 2시간 빨리 본다. 대표는 밤 3시에도 본다. 대표는 항상 온라인이다. 대표는 언제나 응답 대기 중이다. 대표는 어떤 상황에서든 '다 괜찮아'라고 말한다. 쓸데없는 심리 전쟁이다. 근데 이긴다. 항상 이긴다. 스프레드시트를 다시 켠다. 런웨이 계산 시뮬레이션. A 시나리오. 보수적. 매출 성장 없음. 인원 추가. 결과. 5개월. B 시나리오. 중립. 월 15% 성장 유지. 인원 추가. 결과. 7개월. C 시나리오. 낙관적. 월 20% 성장. 인원 추가. 신규 고객 확보. 추가 투자 체결. 결과. 무한. C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C만 가능해야 한다. 기찻길 위에 가만히 누워 있는 기분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움직이면 부술 수도 있다. 그런데 움직일 수밖에 없다. 김준수 말고도 다른 팀원들은? 영업팀은 어떻게 되나. 영업이 제대로 안 되면 채용은 무슨 채용인가. 그런데 채용을 안 하면 더 영업이 안 된다. 악순환. 이걸 누가 전해줄까. 누가 알아줄까. 아내는 몰라도 된다. 걱정만 시킬 테니까. 투자자들한테는 절대 이런 생각이 있는 척 하면 안 된다. '검토해보겠습니다'라는 거절은 '당신은 관리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피드백과 다르지 않다. 혼자다. 정확히는, 함께 있어야 하지만 혼자다. 슬랙의 중독성 시간이 간다. 3시 28분. 스프레드시트를 닫는다. 새로 켠다. 경쟁사 분석. 요즘 라운드를 본 스타트업들. 우리와 비슷한 지표. 우리와 다른 지표.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성장이 빨라?' 메모리로 다시 돌아간다. 정보량이 굉장하다. 혹은 거짓말일 수도 있다. 스타트업 업계는 거짓말 많다. 나도 IR 덱에서는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전략이면 충분히 시장을 장악할 수 있어' '우리 팀이면 가능합니다' 슬랙이 또 울린다. 4시 02분. 이번엔 영업팀이다. "대표님, 내일 고객 미팅 좀 대신 봐주실 수 있을까요? A사인데, 뭔가 이번 달 의사결정이 빨라진 것 같아서..." 아. 이건 좋은 뉴스다. 그런데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한다. 내가 뛰어야 한다는 거. 영업도 못하는 팀원들. 아니다. 못한 게 아니라 못해본 거다. 신입이 많으니까. 경험이 부족하니까. 그래서 내가 뛴다. 내일 아침 9시. A사 미팅. 오후 3시. 투자자 미팅. 저녁 6시. 개발 일정 리뷰. 이미 정해진 일정 위에 또 덮인다. '다 해야지. 뭘.'회신한다. "좋아, 내가 봐줄게. 우리 팀이 먼저 한 번 더 대면한 다음에 나랑 세 명이 함께 들어가자. 좋은 기회야." 밝게. 항상 밝게. 현실은 이거다. 내일 9시에 못 본다. 왜냐하면 난 지금 3시에도 못 자니까. 그리고 아침에 눈 떠서 이메일 50개를 봐야 한다. 그 다음에 스프레드시트 업데이트. 그 다음에 회의 준비. 9시 미팅에서 내가 밝게 웃고 있을까. 아마도. 아마도 그럴 거다. 왜냐하면 '대표'니까. 잠들지 못하는 이유 4시 30분. 컵라면을 끓인다. 물소리가 작게 들린다. 가스렌지. 밤 시간에 우리 집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 스마트폰은 계속 켜 있다. 또 뭐가 올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왔는데 못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경우의 수들이 자꾸 떠오른다. 네이버에 있을 땐 이런 게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했다. 정해진 시간에 퇴근했다. 누군가 상위 레벨에서 결정을 했고, 나는 그 아래에서 일했다. 책임감이 있었지만 이런 책임은 없었다. 이건 다른 종류의 무게다. 돈이다. 직원들의 월급이다. 내 아내의 미래고, 아이의 미래고, 부모님의 신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게 전부 내 판단에 달렸다는 거다. '피봇해야 하나?' 이 질문은 3시마다 돈다. 새벽 2시에도 돈다. 저녁 11시에도 돈다. 주말 아침에도 돈다. 지금 우리 프로덕트가 맞나. 지금 우리 마켓이 맞나. 지금 우리 팀이 맞나. 지금 우리 펀딩 전략이 맞나. 모든 게 의문이다. 그리고 모든 게 내 몫이다. 라면을 먹는다. 국물이 덜 식어서 입이 데인다. 아무 맛이 없다.아침까지 1시간 반 4시 47분. 아내가 일어나지 않을까 봐 거실 불을 끈다. 폰의 불빛만 남는다. 슬랙. 메일. 뉴스. 또 슬랙. 어떤 창업가 인터뷰를 읽다가 멈춘다. "성공의 비결은 충분한 수면과 명확한 전략이었습니다." '우리 여긴 얼마나 성공했길래.' 자조적이다. 근데 이런 마음가짐이 사람을 죽인다. 근데 죽지 않을 수가 없다. 5시 20분. 출근까지 1시간 40분. 침대로 돌아갈까. 아니다. 이제는 잠들기 어렵다. 이 상태로 누우면 더 답답하다. 그래서 그냥 여기 있다. 소파에. 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면서.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메모장 앱. 오늘의 할 일 목록.A사 고객 미팅 (09:00) - 제안서 재점검 팀 미팅 (10:30) - 일정 조정 투자자 미팅 (15:00) - IR 덱 최종 수정 개발 리뷰 (18:00) - 런웨이 시뮬레이션 공유 채용공고 검토 (따로 시간 잡기)8개월의 런웨이를 쪼개는 일정들이다. 하나하나가 번인이다. '이거 다 될까?' 음악을 켠다.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lo-fi beats for productivity' 누군가 이미 같은 시간대에 같은 상태로 음악을 만들었을 거다. 같은 새벽 3시에 깨있는 누군가. 그 누군가도 뭔가를 못 해서, 뭔가를 놓쳐서, 뭔가를 잃을까봐 깨있을 거다. 혼자가 아니라는 게 조금 낫다. 근데 별로 낫지도 않다. 5시 50분 전자 알람이 울린다. 이번엔 밤이 아니라 아침이다. 차이가 뭘까. 3시에 깨는 것과 6시에 자동으로 깨는 것. 결국 같은 잠 부족인데. 침대에서 나온다. 샤워를 한다. 거울을 본다. '피곤해 보이네.' 아내가 말한 적 있다. "왜 자꾸 짙게 보여?" "뭐, 일 때문에." "오케이..." 그 다음은 침묵이었다. 걱정하는 침묵. 더 이상 뭔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안다. 7시. 출근한다. 오피스는 비어있다. 내가 가장 먼저다. 항상 그렇다. 노트북을 켠다. 슬랙. 메일. 뉴스. '오늘도 시작된다.' 그리고 밤 11시. 퇴근한다. 혹은 퇴근했다고 치기로 한다. 집에 가서 이불을 덮는다. 새벽 3시. 또 뭔가가 울린다.내일도 똑같을 거다. 그 다음 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 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