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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A 투자 준비, 두 번째 등반을 시작하며

프리A 투자 준비, 두 번째 등반을 시작하며

프리A 투자 준비, 두 번째 등반을 시작하며 시드는 베이스캠프였다 시드 투자 받은 게 1년 6개월 전이다. 그때는 이게 정상인 줄 알았다. 3억 받고 '드디어 시작이다' 했다. 팀원들이랑 고깃집 가서 '우리가 해냈다' 건배했다. 아내한테 전화해서 "여보, 투자 받았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다. 그건 출발선이었다. 아니, 등산로 입구 매점이었다.시드 투자자들은 착했다. 트랙션 없어도 팀만 괜찮으면 투자했다. "네이버 출신이시네요, 좋습니다" 이 정도로 통했다. IR 자료 20페이지면 충분했다. 프리A는 다르다. 지난주 VC 미팅에서 들었다. "MRR이 1200이면... 좀 더 성장하고 다시 연락 주세요." 웃으면서 말하는데 칼이었다. 다른 투자사는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유닛 이코노믹스는 어떻게 되죠?" 준비 안 한 질문이었다. 버벅였다. 미팅 끝나고 엘리베이터에서 혼자 주먹 쥐었다. 시드는 가능성에 투자한다. 프리A는 증명에 투자한다. 베이스캠프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더 가파르다. 숫자가 전부다 요즘 나는 숫자에 파묻혀 산다. MRR, ARR, CAC, LTV, 처음 듣는 건 하나도 없다. 근데 우리 회사 숫자로 채우면 초라하다.월 매출 1200만원 (목표는 3000이었다) 고객사 23곳 (기업 고객 타깃인데 이건 좀...) 이탈률 12% (허용 범위긴 한데 더 낮춰야 한다) CAC 회수 기간 8개월 (투자자들은 6개월 이하를 원한다)새벽 3시에 엑셀 시트를 만진다. '만약 다음 달 MRR이 15% 성장하면... 6개월 후엔...' 시나리오를 돌린다. 보수적 시나리오, 중립 시나리오, 낙관적 시나리오. 보수적으로 봐도 런웨이는 8개월이다. 프리A 받으려면 최소 4개월은 걸린다. 여유는 4개월. 4개월 안에 MRR을 2배로 만들어야 한다. 가능한가? 모르겠다. 해야 한다. 시드 때는 "우리 이런 거 만들고 있어요" 하면 됐다. 지금은 "지난 분기 대비 성장률 47%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투자자들은 그래프의 기울기를 본다. 각도가 가파를수록 좋다. 우리 그래프는 완만하다. 성장은 하는데 느리다. "대표님, 이 정도 성장률이면 괜찮은 거 아닌가요?" 팀원이 물었다. "괜찮긴 한데... 투자받기엔 부족해." 솔직했다. 팀원 표정이 어두워졌다. IR 자료는 50번을 고쳤다 IR 덱을 다시 만들고 있다. 시드 때 썼던 건 버렸다. 그때는 '우리의 비전'이 앞에 있었다. 지금은 '트랙션'이 첫 페이지다. 투자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건 명확하다.얼마나 빨리 크는가 돈을 벌 수 있는가 시장은 큰가 팀은 해낼 수 있는가순서도 이거다. 팀이 제일 뒤다. 시드 때는 반대였다. 팀이 먼저였다.IR 자료 11페이지. "지난 6개월 MRR 추이" 그래프를 그렸다. 우상향이긴 한데 각도가 아쉽다. 색을 바꿔봤다.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 초록색이 제일 긍정적으로 보인다. 아니다. 속임수다. 색 바꾼다고 성장률이 바뀌나. 지웠다. 다시 파란색으로. IR 자료 18페이지. "고객사 인터뷰" "귀사의 솔루션 덕분에 업무 효율이 30% 향상됐습니다." 실제 고객이 한 말이다. 녹취록을 6번 들었다. 확실하다. 이런 게 필요하다. 정성적 피드백. 숫자만으론 부족하다. IR 자료 25페이지. "향후 12개월 로드맵" 여기가 제일 어렵다. '신규 기능 3개 출시, 고객사 80곳 확보, MRR 5000만원 달성' 이렇게 썼다가 지웠다. 너무 낙관적이다. '신규 기능 2개 출시, 고객사 50곳 확보, MRR 3500만원 달성' 다시 썼다. 그래도 도전적이다. 투자자들은 안다. 스타트업 로드맵은 대부분 안 맞는다는 걸. 근데 없으면 안 된다. 계획 없이 가는 배는 투자 안 한다. 밤 11시. 저장하고 껐다. 내일 다시 본다. 분명히 또 고칠 게 보인다. 미팅은 20개를 잡았다 프리A 준비하면서 VC 리스트를 만들었다. 국내 VC 50개. 이 중에 B2B SaaS에 투자하는 곳은 20개 정도. 여기서 프리A 단계 투자하는 곳은 15개. 15개 전부 컨택했다. 답장 온 곳은 12개. 미팅 잡힌 곳은 8개. 실제로 만난 곳은 지금까지 5개. 결과는 이렇다.1곳: "관심 있습니다. 다음 미팅 잡죠." 2곳: "트랙션 좀 더 보고 연락 주세요." 2곳: "저희 포트폴리오랑 안 맞을 것 같네요."1곳이라도 관심 보인 게 다행이다. 근데 그 1곳도 확정은 아니다. "관심 있다"는 "투자한다"가 아니다. 이건 시드 때 배웠다. "대표님, VC들이 보통 몇 번 미팅해요?" 팀원이 물었다. "3~5번? 길면 더." "그럼 이제 시작이네요." 맞다. 시작이다. 투자자 미팅은 소개팅이 아니다. 결혼 상대 고르는 거다. 서로 신중하다. 미팅 때마다 느낀다. 내가 설득하는 건지, 내가 검증받는 건지. 아마 둘 다다. "그래서 대표님은 왜 이걸 하시는 건가요?" 갑자기 본질적인 질문이 날아온다. IR 자료엔 없는 질문. "...고객사들이 수작업으로 하루 3시간 쓰는 일을 10분으로 줄여줄 수 있어서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투자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모했다. 이런 순간이 중요하다. 숫자만으론 안 된다. 이 사람이 왜 이걸 하는지, 끝까지 갈 사람인지. 그게 보여야 한다. 팀원들 앞에선 웃는다 월요일 아침 스탠드업 미팅. "이번 주 목표는 신규 고객 5곳 컨택, 기능 개발 QA 완료, 그리고..." 말을 이었다. "투자 관련해서도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팀원들이 웃었다. "대표님, 투자 잘 되고 있어요?" "응, 진행 중이지. 괜찮아." 거짓말은 아니다. 진행은 하고 있다. 잘 되고 있냐고 물으면 모르겠지만. 팀원들 앞에선 불안한 티를 내면 안 된다. 특히 투자 관련해선. 이건 대표의 몫이다. 직원들은 월급을 믿고 일한다. 그 믿음을 흔들면 안 된다. 개발팀장이 물었다. "대표님, 런웨이는 충분하죠?" "충분해. 걱정 마." 8개월이 충분한가? 아니다. 근데 말했다. 충분하다고. 미팅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슬랙에 투자사에서 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희 내부 검토 결과 현재 단계에서는 투자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정중한 거절이다. 읽고 지웠다. 다음 투자사 메일을 확인했다. 답장이 없다. 3일째다. 괜찮다. 15개 중 5개 만났다. 10개 남았다. 통계적으로 보면 프리A 투자 받으려면 평균 30개 정도 VC를 만난다고 한다. 이제 1/6 온 거다. 숫자로 보면 담담해진다. 감정을 빼고 확률로 본다. 아내는 모른다 저녁 8시. 집에 전화했다. "여보, 오늘도 늦어. 미안해." "또? 밥은 먹었어?" "응, 먹었어." 거짓말이다. 안 먹었다. "딸이 아빠 보고 싶대. 주말엔 시간 돼?" "...주말에 투자사 미팅 하나 있어. 토요일 오전만. 오후엔 같이 놀아줄게." 한숨 소리가 들렸다. 뭐라 하진 않았다. "알았어. 조심히 들어와." 끊었다. 아내한테 말 안 한 게 있다. 프리A 못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런웨이 8개월. 그 안에 투자 못 받으면 두 가지 선택이다. 팀 줄이거나, 문 닫거나. 말하면 걱정한다. 잠 못 잔다. 회사에서도 스트레스 받는데 집에선 괜찮아야 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다. 딸 얼굴이 떠올랐다. 3살. 아빠가 뭐 하는지 모른다. "아빠는 회사 가" 이 정도만 안다. 나중에 크면 말해줄까. "아빠가 너 3살 때 엄청 힘들었어. 근데 해냈어." 이렇게. 아니면 "아빠가 도전했다가 실패했어. 근데 최선을 다했어." 이렇게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숨기고 싶진 않다. 두 번째 등반이 더 어렵다 시드는 첫 등반이었다. 장비 챙기고, 날씨 보고, 출발했다. 힘들었지만 설렜다. '드디어 시작이다' 그 느낌. 프리A는 다르다. 이미 한번 올랐다. 힘든 걸 안다. 더 가파른 걸 안다. 그래도 가야 한다는 걸 안다. 설렘보단 각오다. 어제 밤에 창업 실패 사례를 검색했다. 안 좋은 버릇이다. 근데 자꾸 찾아본다. "프리A 투자 받지 못해 폐업" 기사가 나왔다. 읽었다. 우리랑 비슷한 회사였다. B2B SaaS, 시드 투자 3억, 팀 10명. MRR이 정체되면서 투자 못 받았다고 한다. 런웨이 끝나고 6개월 버티다가 결국 문 닫았다. 대표 인터뷰가 있었다. "좀 더 빨리 피봇할 걸 그랬습니다." 창을 껐다. 우리는 피봇해야 하나? 아니다. 방향은 맞다. 속도가 문제다. 빨리 가야 한다. 새벽 4시.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봤다. '할 수 있다.' 속으로 말했다. '할 수 있어.' 매일 하는 주문이다. 시드는 가능성을 증명했다. 프리A는 성장을 증명해야 한다. 두 번째 등반. 더 높다. 더 가파르다. 더 춥다. 그래도 간다. 정상은 저기 있다.런웨이는 8개월. 시간은 흐른다. 숫자를 만들어야 한다.

아침 7시 출근, 밤 11시 퇴근이 기본이 되던 날

아침 7시 출근, 밤 11시 퇴근이 기본이 되던 날

아침 7시 출근, 밤 11시 퇴근이 기본이 되던 날 3시 17분 또 눈 떴다. 알람 전에 눈 뜨는 게 1년째다. 슬랙 알림이 먼저 깬 건지, 내가 먼저 깬 건지 모르겠다. 일단 핸드폰 든다. 개발팀에서 밤새 푸시한 커밋 7개. 기획팀장이 올린 기능 명세서. 영업 김대리가 새벽 2시에 올린 고객사 피드백. 다들 언제 자는 거지. 아내가 뒤척인다. 핸드폰 불빛 때문인가. 침대 밖으로 나간다. 거실 소파에 앉는다. 현금흐름표 연다. 8개월. 런웨이 8개월 남았다. MRR 1200만원. 지난달보다 80만원 올랐다. 성장률 7.1%. 나쁘지 않다. 근데 VC들은 최소 15%는 봐야 한다고 했다. 계산기 두드린다. 직원 8명 인건비, 사무실 월세, AWS 비용, 마케팅 비용. 고정비만 월 2800만원. 적자 1600만원. 곱하기 8개월 하면 1억 2800만원. 통장 잔고 1억 5천. 7천만원 남는다. 아니다, 세금 빠지면 실제로는 5천. 5천으로 뭘 하나.7시 03분 성수역 2번 출구. 커피 산다. 아메리카노 톨사이즈. 샷 추가. 5500원. 예전에는 이 돈도 아까웠는데, 이제는 안 마시면 오전을 못 버틴다. 공유오피스 4층. 카드 찍는다. 삐- 제일 먼저 온 건 나다. 불 켠다. 에어컨 온도 24도 맞춘다. 의자에 앉는다. 노트북 켠다. 슬랙 데스크톱 버전 실행. 어제 밤 대화 쭉 읽는다. 개발팀이 API 응답속도 개선했다고 한다. 0.8초에서 0.3초로. 좋다. 디자이너가 새 랜딩페이지 시안 올렸다. 어, 괜찮네. 근데 CTA 버튼 색이 좀... 영업팀이 미팅 잡았다. 수요일 오후 2시, 여의도. 직원 500명 규모 제조사. 좋아. 답장 단다. "수고했어요", "좋은데 CTA는 논의 필요", "미팅 전 자료 준비 부탁". 시계 본다. 7시 41분. 팀원들 출근까지 1시간 19분 남았다. IR 덱 연다. 46페이지. VC한테 "시장 규모 근거 부족하다"는 피드백 받았다. TAM, SAM, SOM 다시 계산한다. 국내 중소기업 수 680만개. 우리 타겟은 직원 50~500명 기업. 약 18만개. 솔루션 도입률 12%. 객단가 연 480만원. 시장 규모 1조 384억. 엑셀에 수식 입력한다. 출처 링크 단다. 슬라이드 수정한다. 커피 한 모금. 식었다.9시 12분 팀원들 출근했다. "대표님 일찍 오셨네요." "응, 좀 일찍 왔어." 매일 듣는 말. 매일 하는 대답. 회의실 예약한다. 오전 스탠드업. 9시 30분. 개발팀 진호, 서연, 민재, 준석. 기획팀 혜진. 디자인팀 유나. 영업팀 대리 김성훈, 박지영. 8명 전부 모인다. "어제 고생 많았어요. 다들 일찍 퇴근했어요?" 아무도 대답 안 한다. 웃음만 나온다. "오늘 할 일 공유하죠." 진호가 말한다. "결제 모듈 API 연동 마무리할게요. 오늘 중으로요." 서연이 말한다. "대시보드 차트 렌더링 최적화 들어갑니다." 민재가 말한다. "QA 이슈 7건 픽스했고, 배포는 내일 새벽 예정입니다." 새벽 배포. 또 밤샌다는 거다. "고생이 많아요. 근데 꼭 새벽이어야 해요?" "서비스 다운타임 최소화하려면요." 맞는 말이다. 할 말 없다. 혜진이 말한다. "고객사 피드백 정리해서 오후에 공유드릴게요." 유나가 말한다. "랜딩페이지 시안, CTA 색상 3가지 안 준비했어요." 성훈이 말한다. "수요일 미팅 자료 오늘 완성합니다." 지영이 말한다. "신규 리드 12건 확보했어요. 콜드메일 응답률 8.3%예요." 다들 잘한다. 진짜 잘한다. 근데 다들 피곤해 보인다. "수고해요. 점심은 같이 먹어요." 회의 끝.1시 18분 점심 먹었다. 회사 근처 김치찌개집. 1인분 9000원. 9명이면 8만 1천원. 회사 카드 긁는다. 이 돈도 고정비다. 한 달이면 243만원. 연간 2916만원. 계산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계산한다. 팀원들은 밥 먹으면서 농담한다. 웃는다. 그때만큼은 가볍다. 나도 웃는다. 같이 웃어야 한다. 대표가 무거우면 팀도 무거워진다. "지영씨 콜드메일 응답률 진짜 높네요. 어떻게 한 거예요?" "제목에 고객사 pain point를 구체적으로 넣었어요. '업무 자동화'보다 '엑셀 작업 시간 70% 단축' 이렇게요." "오, 좋은데요. 이거 다른 메일에도 적용해봐요." 이런 대화. 편하다. 회사 얘기 아닌 얘기도 한다. 준석이가 말한다. "주말에 부모님 만나러 가요. 명절 아닌데도 뭐라 안 하시려나." 민재가 말한다. "형,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는데요?" "사업 접고 대기업 가래요." 다들 웃는다. 나도 웃는다. 근데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부모님 말이 틀리진 않다. 6시 47분 저녁 먹을 시간 없다. VC 화상 미팅 7시. 20분 전에 자료 최종 점검한다. 회의실 들어간다. 노트북 연결한다. 줌 링크 클릭한다. 7시 정각. 상대방 입장. "안녕하세요. 박창업 대표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자료 잘 봤습니다." 30분 발표. 15분 질의응답. "시장 규모는 이해했는데요, 경쟁사 대비 차별점이 명확하지 않네요." "저희는 UI/UX에 집중했습니다. 비개발자도 5분 안에 자동화 워크플로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근데 경쟁사도 노코드 표방하잖아요?"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학습곡선이 훨씬 낮습니다. 고객사 온보딩 시간이 경쟁사 대비 40% 짧습니다." "데이터가 있나요?" "네, 고객사 10곳 평균 온보딩 시간 측정했습니다. 자료 공유드리겠습니다." 질문이 계속된다. 대답한다. 또 질문. 또 대답. 45분 지났다. "네, 일단 검토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검토해보겠다. 이 말이 제일 무섭다. 됐다는 건지, 안 됐다는 건지 모른다. "감사합니다.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회의 종료. 혼자 남았다. 한숨 나온다. 9시 33분 아직 일한다. 회의실에서 나왔다. 자리로 돌아왔다. 팀원들 반 이상 남았다. 진호, 민재, 준석은 헤드폰 끼고 코딩한다. 혜진은 Figma 켜놓고 화면 설계한다. 다들 집중한다. 나도 일한다. IR 덱 수정한다. 경쟁사 비교 슬라이드 추가한다. 차별점 3가지 명확하게 정리한다.학습곡선 40% 단축 온보딩 시간 평균 2.3일 고객 이탈률 4.2% (업계 평균 12%)숫자로 말해야 한다. 감으로 설득 안 된다. 슬랙에 메시지 온다. 성수 투자사 김 이사. "대표님, 다음 주 화요일 오전 미팅 가능하신가요?" 답장 바로 보낸다. "네, 가능합니다. 시간 알려주세요." 3초 만에 답장 온다. "10시 저희 사무실로 오시죠." "네, 감사합니다." 미팅 하나 더 잡혔다. 21번째 IR 미팅. 20번 중에 5번 거절당했다. 10번은 "검토하겠다". 5번은 아직 진행 중. 확률 계산하면 안 되는데 자꾸 계산한다. 25% 거절. 50% 보류. 25% 진행. 진행 중인 5곳 중에 1곳만 투자해도 된다. 일단 해보자. 11시 09분 퇴근 준비한다. 노트북 덮는다. 가방에 넣는다. 자리 정리한다. "다들 수고했어요. 먼저 들어갑니다." 진호가 말한다. "대표님도 수고하셨어요." 민재가 말한다. "내일 봬요." 헤드폰 낀 채로 손만 흔든다. 엘리베이터 탄다. 1층 내려간다. 밖으로 나간다. 11시 15분. 성수동 밤거리. 사람 많다. 카페, 술집, 편의점. 다들 웃는다. 나도 웃어야 하는데 피곤하다. 지하철 탄다. 2호선. 집까지 40분. 앉는다. 핸드폰 꺼낸다. 슬랙 본다. 민재가 커밋 푸시했다. 11시 22분. 진호가 이슈 코멘트 달았다. 11시 28분. 다들 언제 집에 가나. 나도 언제 집에 가나. 집 도착. 12시 03분. 현관문 연다. 조용하다. 불 다 꺼져 있다. 아내랑 딸 자고 있다. 씻는다. 침대에 눕는다. 아내가 뒤척인다. "왔어?" "응, 자." "오늘도 늦었네." "미안." "괜찮아. 자." 괜찮지 않다는 거 안다. 근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 감는다. 내일 또 7시 출근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3시 41분 또 눈 떴다. 알람까지 3시간 19분 남았다. 핸드폰 든다. 슬랙 본다. 준석이 배포 완료했다. 새벽 3시 12분. "배포 완료. 이슈 없음. 퇴근합니다." 3시에 배포하고 3시 12분에 퇴근. 12분 만에 검증하고 간 거다.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근데 뭐라 할 수 없다. 나도 똑같이 했으니까. 런웨이 계산기 연다. 습관이다. 8개월. 여전히 8개월. 시나리오 3개 돌린다. 보수: MRR 월 5% 성장, 8개월 후 잔고 2300만원 중립: MRR 월 10% 성장, 8개월 후 잔고 5800만원 낙관: MRR 월 15% 성장, 8개월 후 잔고 9200만원 셋 다 추가 투자 없으면 죽는다. 투자 받아야 한다. 무조건. 21번째 IR, 22번째 IR, 30번까지 가도 된다. 한 곳만 투자하면 된다. 될 거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아내가 뒤척인다. 나도 눈 감아야 한다. 근데 잠이 안 온다. 7시에 출근해야 한다. 11시에 퇴근할 거다. 내일도, 모레도, 다음 주도. 언제까지 이럴까. 투자 받으면 나아질까. 시리즈 A 받으면 편해질까. 거짓말이다. 더 바빠진다는 거 안다. 근데 멈출 수 없다. 이미 8명이 나를 믿고 있다. 8개 가정이 이 회사에 달려 있다. 런웨이 8개월. 버텨야 한다. 일단 해보자.새벽 3시, 런웨이 계산하다가 또 눈 떴다. 내일도 7시 출근이다.

점심, 유일하게 팀원들과 함께하는 시간

점심, 유일하게 팀원들과 함께하는 시간

점심, 유일하게 팀원들과 함께하는 시간 12시 30분 슬랙에 메시지 올렸다. "점심 누구 같이?" 5분 안에 답장 온다. 개발팀 민수가 제일 빠르다. "저요!" 기획자 지은이도 손든다. 영업팀 두 명은 외근. 디자이너 수진이는 미팅. 결국 네 명. 나, 민수, 지은, 개발자 현우. "어디 갈까요?" 지은이가 묻는다. "된장찌개?" 민수가 말한다. 어제도 된장찌개였다. "파스타 어때요?" 현우가 말한다. "예산이..." 내가 웃으며 말한다. 결국 된장찌개. 사무실 뒤 골목 백반집. 7000원짜리.걸어가면서 민수가 말한다. "대표님, 어제 그 버그 고쳤어요." "오 진짜?" 내가 답한다. "네. 새벽 4시까지 걸렸는데." 미안하다. 말은 안 한다. 민수는 알 것이다. 현우가 끼어든다. "형 또 밤샜어요?" "어쩔 수 없었지." 지은이가 웃는다. "우리 회사 사람들 다 새벽형이네요." 아니다. 새벽형이 아니라 잠을 못 자는 거다. 골목 모퉁이 돌았다. 백반집 보인다. 할머니가 운영하신다. 우리 얼굴 다 아신다. "어서 오세요!" 할머니 목소리. "안녕하세요!" 우리가 동시에 답한다. 구석 자리 앉는다. 항상 그 자리다. 메뉴판 볼 필요 없다. 다 외운다. 된장찌개 정식 네 개. 공깃밥 하나 더. 물 따라 마신다. 시원하다. 민수가 말한다. "날씨 좋네요." "응." 현우가 답한다. "주말에 뭐 해요?" 지은이가 묻는다. 민수가 답한다. "집에서 쉴 거 같은데요. 넷플릭스나 봐야지." 현우가 말한다. "저는 여자친구 만나요." 지은이가 웃는다. "부럽네요. 저는 친구 결혼식이요." 다들 나를 본다. "나?" 내가 말한다. "딸이랑 놀아줘야지." "몇 살이에요?" 민수가 묻는다. "세 살." "귀엽겠다." 지은이가 말한다. 귀엽다. 요즘 제대로 못 놀아줬다.밥이 나왔다 된장찌개 김이 모락모락. 밥 한 공기. 반찬 네 가지.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 든다. 밥 한 입. 된장찌개 한 입. 맛있다. 진짜 맛있다. 회사에서는 컵라면 먹는다. 혼자 회의실에서. 키보드 치면서. 여기서는 다르다. 사람들이랑 같이 먹으니까. 민수가 말한다. "이 집 김치 진짜 맛있어요." "할머니가 직접 담그신대." 지은이가 답한다. "대박." 현우가 김치 한 입 먹는다. 나도 김치 먹는다. 시원하다. 적당히 익었다. 밥 먹으면서는 별 얘기 안 한다. 그냥 먹는다. 가끔 "이거 맛있네", "물 좀 주세요" 정도. 회사 얘기 안 나온다. 버그도 안 나온다. 투자도 안 나온다. 런웨이도 안 나온다. 그냥 밥 먹는다. 이게 좋다. 중간쯤 현우가 말한다. "대표님, 요즘 많이 힘드시죠?" 갑자기 나온 질문이다. "응?" 내가 답한다. "아니 그냥... 표정이 좀..." 민수가 끼어든다. "형, 우리 알아요. 투자 받으려고 뛰어다니시는 거." 지은이도 말한다. "저희도 도울 수 있는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목이 메인다. 안 그래야 하는데. "괜찮아." 내가 웃는다. "다 잘 될 거야." "저희 믿어요." 민수가 말한다. "대표님이 포기 안 하시면 저희도 안 할 거예요." 현우가 덧붙인다. 된장찌개 한 입 더 먹는다. 뜨겁다. "고맙다." 내가 말한다. "진짜로."후식 식혜 나왔다. 서비스다. 할머니가 주신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식혜 마신다. 달다. 차갑다. 지은이가 말한다. "이번 주 스프린트 잘 끝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진짜?" 내가 묻는다. "네. 기획 거의 다 정리했어요." 민수가 말한다. "개발도 70% 왔어요." 현우가 덧붙인다. "다음 주면 QA 들어갈 수 있어요." 좋은 소식이다. 오랜만에. "잘하고 있네." 내가 말한다. "당연하죠." 민수가 웃는다. 식혜 다 마셨다. 컵 내려놓는다. 시계 본다. 1시 20분. 50분 지났다. "슬슬 가야겠다." 내가 말한다. "네." 다들 답한다. 계산하면서 카운터 앞에 선다. 할머니가 웃으신다. "28000원이에요." 카드 꺼낸다. 회사 법인카드.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맛있게 먹었어요." 내가 답한다. 밖으로 나온다. 햇빛 눈부시다. 민수가 말한다. "배불러요." "나도." 현우가 답한다. 지은이가 웃는다. "오후에 졸리겠다." "커피 마시자." 내가 말한다. 사무실로 걸어간다. 네 명이. 사무실 앞 엘리베이터 탄다. 4층 누른다. 문 열린다. 사무실 보인다. 다시 시작이다. 개발. 기획. 회의. 슬랙 메시지. 하지만 괜찮다. 조금은. 아까 그 50분이 있었으니까. 팀원들이랑 밥 먹었으니까. 회사 얘기 안 하고 그냥 밥만 먹었으니까. 민수가 자리 앉는다. 현우도. 지은이도. 나도 앉는다. 노트북 연다. 슬랙 알림 17개. 한숨 쉰다. 작게. 하지만 웃는다. 조금. 오늘 점심은 좋았다. 3시쯤 슬랙에 민수가 메시지 보냈다. "대표님, 아까 점심 맛있었어요. 내일도 같이 가요!" "ㅋㅋ 그래." 내가 답한다. 지은이도 이모지 단다. 하트. 현우도 답한다. "저도요!" 내일도 된장찌개일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 50분이 있으니까. 회사 얘기 안 해도 되는 그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만 숨 쉴 수 있으니까.점심 시간, 내가 대표가 아닌 순간.

새벽 2시, 창업 실패 사례 검색하기

새벽 2시, 창업 실패 사례 검색하기

새벽 2시, 창업 실패 사례 검색하기 잠이 안 온다 새벽 2시 13분.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내는 옆에서 자고 있다. 딸은 작은방에서 쿨쿨. 나만 깨어있다. 오늘도 눈이 떠졌다. 3시간 자고. 런웨이가 8개월 남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다. 거실로 나왔다. 맥북을 폈다. 화면 밝기를 최소로. 슬랙을 확인했다. 새벽 1시에 개발팀 민수가 올린 메시지. "내일 배포 일정 하루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한숨이 나왔다. 고객사 데모가 내일인데.검색창에 치는 단어들 구글을 켰다. "스타트업 실패 사례" 엔터를 눌렀다. 이상하다. 밤에 이런 걸 검색하는 게. 우울해지는 걸 알면서. 그런데 자꾸 찾게 된다. 첫 번째 기사. "유망 스타트업 OO, 시리즈A 직후 폐업... 직원 25명 실직" 클릭했다. 기사를 읽었다. 투자 받고 6개월 만에 망했다. 번레이트가 너무 높았다고. 고객 확보에 실패했다고. 우리랑 비슷하다. 우리도 시드 받고 1년 반 지났다. 매출은 1200만원. 번레이트는 월 2800만원. 계산기를 켰다. 8개월이면 2억 2400만원. 통장에 2억 8000만원. 여유 있어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검색. "SaaS 스타트업 폐업" 또 클릭했다. 29개 기업이 나왔다. 작년 한 해만. 대부분 B2B. 스크롤을 내렸다. 하나하나 읽었다. "초기 트랙션은 좋았으나 이탈률이..." "투자 유치 실패로 자금난..." "팀 내부 갈등으로..." 새벽 2시 38분. 커피를 타러 갔다. 디카페인. 카페인 마시면 아침까지 못 잔다. 그런데 어차피 잠은 안 온다. 내 사업도 저렇게 거실 소파에 앉았다. 노트북 화면을 봤다. "실패한 스타트업의 공통점 7가지" 클릭.시장 수요 오판 자금 관리 실패 팀 구성원 이탈 경쟁사 대응 실패 피봇 타이밍 놓침 투자 유치 실패 번아웃7개 중에 우리는 몇 개? 시장 수요. 있긴 한데, 생각보다 작다. 우리 솔루션 쓸 만한 기업이 한국에 500개 정도? 그중에 지금 30개 쓰고 있다. 자금 관리. 번레이트 줄이려고 했는데 안 줄어든다. 개발자 한 명이라도 빼면 제품 개발이 멈춘다. 팀 이탈. 아직 없다. 그런데 프리A 못 받으면? 경쟁사. 요즘 똑같은 거 만드는 팀이 3개 생겼다. 돈 더 많이 받은 곳도 있다. 피봇. 해야 하나? 6개월 전부터 고민 중. 근데 방향을 모르겠다. 투자 유치. 지금 10군데 진행 중. 5군데는 거절. 5군데는 "검토 중". 번아웃. 나는 이미. 7개 중에 5개.댓글을 읽는다 기사 하단에 댓글이 있었다. 읽었다. "창업이 뭐가 대단한가요. 망하면 직원들만 피해" "투자 받았으면 책임지고 해야지" "요즘 창업 너무 쉽게 생각함" 숨이 막혔다. 우리 직원 8명. 민수는 네이버 다니다가 왔다. 연봉 깎고. 지원이는 결혼 앞두고 있다. 영업팀 수진이는 대학원 포기하고 합류했다. 다들 나를 믿고 왔다. "박대표님이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그 말들이 떠올랐다. 새벽 3시 5분. 다른 기사를 열었다. "나는 왜 창업에 실패했나 - 전 OO 대표 회고" 장문의 글이었다. 읽었다. 전부. "처음엔 자신 있었습니다. 시장도 있었고, 팀도 좋았고, 기술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얘기 같았다. "투자자들은 '다음 라운드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다음 라운드는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주 VC 미팅이 떠올랐다. "트랙션이 조금 더 필요해 보이네요. 3개월 뒤에 다시 연락드리죠." 3개월. 런웨이는 8개월인데. 스프레드시트를 연다 검색을 멈췄다. 구글 시트를 열었다. "시나리오 분석 v47" 매번 수정하는 파일이다. 세 가지 시나리오. 보수: 월 매출 성장률 5%, 6개월 내 투자 실패 중립: 월 매출 성장률 15%, 4개월 내 프리A 5억 낙관: 월 매출 성장률 30%, 3개월 내 프리A 10억 보수 시나리오를 봤다. 10개월 후 현금 소진. 팀원 4명으로 축소. 제품 개발 중단. 좀비 상태로 6개월. 폐업.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직원 정리 비용: 4500만원" "사무실 위약금: 360만원" "투자금 반환 압박: 예상 불가"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마셨다. 소파에 다시 앉았다. 화면을 봤다. 아까 그 기사들. "저들도 처음엔 잘될 거라고 생각했겠지." 다들 시작은 비슷했을 것이다. 투자 받고, 팀 꾸리고, 사무실 얻고, 제품 만들고. 데모데이에서 발표하고, 언론에 나오고, "유망 스타트업" 타이틀 받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매출이 안 늘고, 투자가 안 되고, 직원이 나가고, 돈이 떨어지고. 끝.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아니, 될 확률이 더 높다. 통계를 봤다. 시드 투자 받은 스타트업의 생존율. 5년 후 10%. 우리는 지금 2년 6개월. 10%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새벽 3시 42분. 검색창에 또 쳤다. "창업 실패 후 재취업" 엔터. 기사가 나왔다. "전 스타트업 대표, 대기업 복귀 어려워... 경력 단절 위험" 읽었다. 36세. 나이. 창업 경력 3년. 실패하면 공백. 대기업 재입사. 어렵다. 중견기업. 연봉 많이 깎인다. 다시 창업. 투자 받기 더 어렵다. "실패한 창업가" 낙인. 그래도 검색한다 왜 이런 걸 찾는 걸까. 새벽마다. 실패 사례, 폐업 통계, 최악의 시나리오. 우울해지는 걸 알면서. 생각해봤다. 준비하는 건가. 실패를 미리 경험해보는 건가. 아니면. 확인하는 건가. 내가 느끼는 불안이 진짜라는 걸. 모르겠다. 그냥 자꾸 찾게 된다. 밤에 혼자 있으면. 낮에는 팀원들 앞에서 웃는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이번 달 MRR 15% 늘었잖아." "투자 곧 될 거야." 그런데 혼자 있으면. 검색한다. "스타트업 망하는 이유" "투자 유치 실패 후기" "창업 후회" 기사를 읽는다. 댓글을 읽는다. 숫자를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 새벽 4시 8분. 노트북을 덮었다. 침대로 돌아갔다. 아내 옆에 조용히 누웠다. 천장을 봤다. 8시간 후면 출근이다. 팀원들을 만나면 또 웃어야 한다. "오늘도 화이팅!" 그런데 지금은. 혼자 무섭다.새벽의 검색 기록은 아무도 모른다. 낮의 나는 괜찮은 척하고, 밤의 나는 실패를 검색한다. 그게 창업가의 이중생활이다.

스프레드시트에 보수/중립/낙관 3가지 시나리오

스프레드시트에 보수/중립/낙관 3가지 시나리오

새벽 2시, 스프레드시트오늘도 잠이 안 온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 보다가 결국 노트북 켰다. 시간 확인했더니 새벽 2시 17분. 아내는 옆에서 자고 있다. 딸은 아까 한 번 뒤척이더니 다시 잠들었다. 구글 시트 열었다. 파일명은 "2025 시나리오 분석 v47". 버전이 47이다. 거의 매주 수정한다는 뜻이다. 세 개 탭이 있다. 보수/중립/낙관. 항상 보수부터 본다. 최악의 경우를 먼저 봐야 마음이 편하다. 이상하지만 그렇다. 보수 시나리오 보수 시나리오는 간단하다. "모든 게 안 풀리면?"신규 고객 월 1개 (현재 2~3개) 이탈률 15% (현재 8%) 단가 인상 실패 (현재 월 150만원 → 목표 200만원) 추가 투자 실패이렇게 놓고 계산하면 런웨이가 5개월로 줄어든다. 8개월이 5개월이 된다. 5개월이면 10월이다. 10월까지 투자 못 받으면 뭘 해야 하나. 직원 절반 내보내나. 사무실 빼고 재택하나. 아니면 내 월급을 0으로 만드나. 계산기 두드린다. 4명으로 줄이면 인건비가 월 1800만원. 지금은 3200만원이니까 1400만원 아낀다. 사무실 180만원 빼면 1580만원. 그럼 런웨이가... 10개월로 늘어난다. 10개월이면 내년 3월까지 버틴다. 숫자 보면서 한숨 나온다. 근데 동시에 안도감도 든다. "최악의 경우에도 내년 3월까지는 간다." 이 문장이 위로가 된다.중립 시나리오 중립은 "지금 추세대로 가면?"이다.신규 고객 월 2개 (현재 수준 유지) 이탈률 8% (현재 수준) 단가 50% 성공 (신규는 200만원, 기존은 150만원 유지) 투자 50% 확률 (프리A 5억, 6개월 내)이 시나리오에서는 투자 못 받아도 버틴다. MRR이 서서히 오르면서 12개월 뒤에는 월 2500만원쯤 된다. 손익분기까지는 아니어도 적자폭이 줄어든다. 투자 받으면 당연히 채용한다. 개발자 2명, 세일즈 1명. 그럼 성장 속도가 빨라진다. 중립 시나리오 볼 때는 기분이 괜찮다. "할 만하네." 이런 생각 든다. 근데 이게 함정이다. 중립이 너무 낙관적일 수 있다. 시장이 생각보다 차갑다. 경쟁사가 생각보다 빠르다. 우리 제품이 생각보다 느리다. 그래서 중립 시나리오는 참고만 한다. 믿지는 않는다. 낙관 시나리오 낙관은 "모든 게 잘 풀리면?"신규 고객 월 4개 (현재의 2배) 이탈률 5% (개선) 단가 100% 성공 (전체 200만원) 투자 100% (프리A 7억, 3개월 내)이렇게 되면 12개월 뒤 MRR이 4000만원 넘는다. 손익분기 돌파한다. 팀을 15명까지 키울 수 있다. 낙관 시나리오는... 솔직히 거의 안 본다. 보면 기분은 좋은데 위험하다. 기대하게 된다. 기대하면 실망이 크다. 창업하고 배운 게 하나 있다. 기대를 낮추면 실망도 작다. 기대를 버리면 모든 게 보너스다. 그래도 가끔 본다. 힘들 때. "이렇게 될 수도 있어"라고 스스로 위로할 때. 왜 세 개나 만드나팀원들한테는 이런 거 안 보여준다. 월요일 아침 회의에서는 중립 시나리오 기반으로 얘기한다. "우리 이대로 가면 12개월 뒤 MRR 2500 찍습니다. 투자 받으면 더 빠르고요." 낙관은 절대 안 보여준다. 기대감 주면 안 된다. 실망시키기 싫다. 보수는 더더욱 안 보여준다. 팀원들 불안해한다. 불안하면 이력서 쓴다. 이력서 쓰면 집중 안 된다. 대표는 혼자 불안해야 한다. 그게 내 역할이다. 근데 이 스프레드시트 작업이 나를 살린다. 진짜다. 숫자로 정리하면 불안이 줄어든다. "막연한 불안"이 "구체적인 문제"로 바뀐다. 구체적이면 대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돈 떨어지면 어쩌지" → 막연함, 해결 불가 "5개월 뒤 런웨이 끝남, 3개월 내 투자 받거나 인건비 1400만원 줄여야 함" → 구체적, 해결 가능 스프레드시트는 나한테 지도다. 어두운 길 걸을 때 손전등이다. 투자자 미팅 전날 투자자 만나기 전날은 항상 세 시나리오 다시 본다. IR 덱에는 중립 시나리오 넣는다. 12개월 뒤 MRR 2500만원, 24개월 뒤 7000만원. 합리적인 숫자다. 근데 VC들은 낙관을 원한다. "3년 뒤 매출 100억" 이런 거. 그래서 IR 덱 마지막에 "Upside Scenario" 슬라이드 하나 넣는다. 낙관 시나리오를 조금 더 부풀린 버전. 3년 뒤 150억. 믿나요? 아니다. 근데 보여줘야 한다. 안 보여주면 "스케일 고민 안 하네"라고 생각한다. 투자자들도 안다. 저 숫자가 뻥이라는 거. 근데 필요하다. 그들도 LP한테 보고해야 하니까. 게임이다. 다들 알지만 하는 게임. 미팅 끝나고 나오면 허무하다. 근데 해야 한다. 런웨이는 안 기다려준다. 새벽 3시 지금 시간 보니까 3시 12분이다. 스프레드시트 수정 몇 개 했다. 보수 시나리오에서 이탈률 12%로 올렸다. 15%는 너무 비관적인 것 같아서. 12%면 런웨이가 6개월 나온다. 6개월. 나쁘지 않다. 중립 시나리오는 그대로 뒀다. 지금 추세가 나쁘지 않다. 이번 달 신규 고객 3개 들어왔다. 한 곳은 연 계약으로 전환 가능성 있다. 낙관 시나리오는... 그냥 꿈이다. 근데 지우지는 않는다. 가끔 필요하다. 꿈도. 파일 저장했다. "2025 시나리오 분석 v48". 노트북 덮으려다가 한 번 더 봤다. 보수 시나리오의 마지막 셀. "6개월". 속으로 중얼거렸다. "6개월이면 된다. 그때까지 뭐든 하나는 터뜨린다." 아침 7시 알람 울렸다. 4시간 잤다. 씻고 나와서 커피 내렸다. 딸이 일어나서 안아달라고 한다. 안아줬다. "아빠 졸려?"라고 묻는다. "아니, 안 졸려"라고 거짓말했다. 아내가 아침 차리면서 물었다. "어젯밤에 또 스프레드시트 봤어?" "응. 조금." "박대표님, 그거 보면 잠이 와요 안 와요?" "안 오면 보고, 보면 또 안 오고 그래." 아내가 웃었다. "미친 거 아니에요?" "미쳤지. 근데 이게 날 안정시켜." 아내는 더 이상 안 물었다. 이제 익숙하다. 내가 숫자로 불안을 다스린다는 걸 안다. 출근 준비하면서 슬랙 확인했다. 개발팀에서 어젯밤에 배포했다. 에러 없다고 한다. 좋다. 세일즈 팀에서 오늘 미팅 2건 있다고 보고했다. 하나는 데모, 하나는 클로징. 클로징 건이 성사되면 이번 달 신규 4개째다. 4개면 중립 시나리오보다 좋다. 낙관으로 가는 길이다. 현관문 나서면서 생각했다. "오늘 하루도 버티자. 숫자는 거짓말 안 한다. 시나리오는 날 배신 안 한다."최악을 계산하면 최선을 준비할 수 있다. 그게 내가 버티는 방법이다.

개발 일정이 밀렸을 때, 나는 코더가 된다

개발 일정이 밀렸을 때, 나는 코더가 된다

개발 일정이 밀렸을 때, 나는 코더가 된다 목요일 오후 4시, 슬랙 알림 "창업님, 이번 주 배포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심장이 멈췄다. 클라이언트한테는 이미 말했다. 이번 주 금요일 배포한다고. 데모 일정도 잡혔다. 월요일 오전 10시. "어느 정도 밀릴 것 같아요?" "최소 3일은요. API 연동에서 예상 못 한 이슈가..." 3일이면 월요일이다. 데모 당일 아침에 배포한다는 소리다. 미친 짓이다. 하지만 연기는 불가능하다. 이 클라이언트가 우리 분기 목표의 40%다. 이게 무산되면 투자 미팅에서 할 말이 없다. "알았어요. 제가 도울게요." 개발팀장 민수가 당황한다. "아니, 창업님이 직접요?" "네. 어차피 전 PM 출신이잖아요." 거짓말이다. 도울 수 있어서가 아니다. 도와야만 해서다.5년 만에 다시 연 IDE 마지막으로 코드 짠 게 언제였나. 네이버 퇴사하기 직전이니까 3년 전쯤? IDE 열었다. VS Code.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Git 클론 받고 로컬 환경 세팅하는데 30분 걸렸다. 옛날엔 10분이면 했는데. 민수가 브랜치 따주고 태스크 할당해줬다. "이 부분 API 응답값 파싱하는 로직이요. 단순 작업인데 손이 부족해서..." 단순 작업. 고맙다. 그래도 나한테 할 수 있는 걸 준 거다. 오후 6시. 팀원들 퇴근 시작한다. "창업님 먼저 들어가세요." "아니, 나 좀 더 있을게." "그럼 저희도..." "아니야. 너희는 내일 아침 일찍 와. 새벽에 내가 푸시 올려놓을게." 거짓말 반이다. 새벽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팀원들까지 야근시킬 순 없다. 월급은 내가 주는데, 야근은 같이 하면 뭔가 미안하다.밤 11시, 디버깅 지옥 에러가 안 잡힌다. API는 200을 뱉는다. 근데 프론트에서 undefined가 뜬다. 뭐가 문제인가. 콘솔 찍어봤다. 네트워크 탭 열어봤다. 데이터는 온다. 근데 파싱이 안 된다. 30분 째 같은 코드만 본다. const data = response.data.results뭐가 문제야. results는 배열이다. 분명히. 그런데. console.log(typeof response.data.results) // undefined아. results가 아니라 result였다. 끝에 s가 없었다. API 문서를 잘못 봤다. 30분을 날렸다. 예전엔 이런 실수 안 했는데. 감이 무뎌졌다. 대표 하면서 코드 안 짜니까, 이제 junior 개발자만도 못하다. 자괴감이 온다. 새벽 2시, 푸시 완료 git push origin feature/api-parsing-fix떨리는 손으로 슬랙에 메시지 남긴다. "민수님, 푸시 올렸습니다. 내일 아침에 확인 부탁드려요." 읽음 표시는 안 뜬다. 당연하다. 자고 있을 시간이다. 사무실을 나선다. 성수역은 텅 비었다. 택시를 탄다. 기사님이 말을 건다. "야근하셨어요?" "네." "요즘 회사들이 왜 이렇게 직원을 갈아요." 대답을 못 했다. 나는 직원이 아니라 대표라서. 그리고 아무도 날 갈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간 거다.금요일 오후 3시, 배포 완료 "배포 성공했습니다." 민수의 메시지에 안도한다. 클라이언트한테 연락한다. "금요일 배포 완료했습니다. 월요일 데모 문제없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죠." 끊고 나니 허무하다. 내가 짠 코드는 전체의 5%도 안 된다. 그것도 단순 작업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쳐있나. 대표가 코딩하는 이유 팀원들은 모른다. 내가 목요일 밤에 코딩한 걸. 민수만 안다. 커밋 로그에 남아있으니까. 그런데 민수는 아무 말 안 한다. 그냥 "확인했습니다" 한 줄만 보냈다. 고맙다. 괜히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 대표가 왜 코딩을 하나. 개발팀장이 있는데. 개발자가 4명이나 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책임이 내 거니까. 클라이언트한테 약속한 건 나다. 투자자한테 보고할 것도 나다. 직원들 월급 주는 것도 나다. 일정이 밀리면, 손해는 회사가 본다. 그 회사는 내 거다. 그러니까 내가 움직인다.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한다. 없어도 만든다. 코딩이든, 디자인이든, 영업이든. 잘하지 못해도 코드는 형편없었다. 변수명도 일관성 없고, 주석도 없고, 리팩토링 여지 많고. 민수가 다음날 내 코드 고쳤을 거다. 분명히. 그래도 괜찮다. 내 코드가 좋아서 한 게 아니니까. 일정을 맞추려고 한 거니까. 팀원들한테 "대표도 같이 고생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 거니까. PM 출신 대표라서 코딩 할 줄 안다고 자랑하려는 거 아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직성이 풀린다. 안 하고 기다리는 게 더 힘들다. 다음 주 또 밀리면 이번 주도 일정 빡빡하다. 또 밀릴 수도 있다. 그럼 또 코딩할 거다. 새벽에 사무실 나와서, 민수가 준 태스크 할 거다. 팀원들은 또 모를 거다. 그게 더 편하다. 괜히 미안해하니까. 대표가 코딩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표는 비전 제시하고, 투자 받고, 전략 짜는 게 일 아닌가요?" 맞다. 근데 그건 회사가 잘 돌아갈 때 얘기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일정 지키는 게 전략이다. 클라이언트 놓치지 않는 게 비전이다. 그러니까 코딩한다.월요일 데모는 성공했다. 계약 이어진다. 다행이다. 민수한테 커피 쿠폰 보냈다. 고맙다고. 그는 "?" 만 보냈다. 괜찮다. 알 필요 없다.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벽 3시 41분 또 눈 떴다. 슬랙 알림은 없다. 당연하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건 나뿐이니까. 스프레드시트를 연다. 어제 저녁에 닫았던 그 파일. "시나리오 분석 v23.xlsx" MRR 그래프를 본다. 지난달 1050만원, 이번 달 1200만원. 성장은 하고 있다. 14% 성장. 나쁘지 않다. 그런데. 런웨이는 8개월. 14%씩 성장하면 프리A 받을 만한 트랙션까지 12개월 걸린다. 계산이 안 맞는다. 4개월이 모자라. "피봇해야 하나." 이 생각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시작한다. 매일.출근길 계산기 7시 21분 지하철. 어제 만난 VC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된다. "방향은 좋은데요, 시장이 너무 작지 않나요?" TAM 3000억이라고 했다. IR 덱에 그렇게 썼다. 근데 솔직히 그 숫자 믿냐고 물으면 나도 자신 없다. 리서치 회사 보고서 짜깁기한 거다. 실제로 우리가 공략할 수 있는 시장은 얼마나 될까. B2B SaaS, 중소기업 타겟, 업무 자동화. 경쟁사 4개. 우리 차별점은 '사용성'. 그런데 고객들은 "가격이 중요해요"라고 한다. 우리 강점을 고객이 안 본다. 이게 문제다. 피봇 시나리오 A: 타겟을 대기업으로. 단가 높이기. 피봇 시나리오 B: 기능 줄이고 가격 낮추기. 볼륨 게임. 피봇 시나리오 C: 완전히 다른 버티컬로. HR? 재무? 계산기 두드린다. 시나리오별 매출 예측. 대기업 타겟하면 영업 사이클 6개월. 런웨이가 안 된다. 가격 낮추면 단위경제학이 안 맞는다. 다른 버티컬은... 처음부터 다시? "망했네." 혼잣말이 나온다. 옆 사람이 쳐다본다. 아침 스탠드업 9시 30분. 팀원들 모였다. "어제 A사 미팅 어땠어요?" 개발팀장 민수가 묻는다. "잘 됐어. 긍정적이야." 거짓말이다. A사는 "검토해보겠습니다" 했다. 이건 거절이다. 20번 들어봐서 안다. "다음 주 B사 데모 준비하자. 이번엔 자동화 케이스 3개 더 보여주고." 팀원들이 고개 끄덕인다. 민수가 말한다. "근데 대표님, B사는 대기업이잖아요. 우리 솔루션이 엔터프라이즈급으로 준비됐나요?" 준비 안 됐다. 보안 인증도 없고, 온프레미스 배포도 안 된다. "일단 관심 보이면 커스터마이징 들어가는 거지 뭐." 민수가 약간 불안한 표정이다. 눈치챘나. 회의 끝나고 민수를 붙잡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 방향." 민수가 잠깐 망설인다. "솔직히요... 중소기업 고객들 반응이 생각보다 안 좋잖아요. 이탈률도 높고. 대기업 가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준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준비 시간. 그게 없다는 게 문제지.점심, 데이터와 직관 사이 팀원들이랑 성수동 국밥집. 밥 먹으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돌아간다. 데이터를 본다.신규 고객 획득 비용(CAC): 180만원 고객 생애 가치(LTV): 320만원 LTV/CAC 비율: 1.78책에서는 3 이상이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1.78. 그런데 이탈률이 문제다. 6개월 리텐션 45%. 절반이 떠난다. 왜 떠나나. 고객 인터뷰 10개 다시 읽어봤다. "너무 복잡해요." "우리가 원하는 기능이 없어요." "가격 대비 효과가 안 보여요." 복잡하다고? 우리는 사용성이 강점인데. 민수 말대로 타겟을 잘못 잡은 건가. 중소기업은 '쉬운 것'을 원하는데, 우리는 '강력한 것'을 만들었나. 그럼 대기업으로 가야 하나. 대기업은 강력한 걸 원한다. 맞다. 근데 우리 솔루션이 정말 대기업급인가. 데이터는 '피봇하라'고 한다. 직관은 '조금만 더 버텨봐'라고 한다. 국밥 반도 못 먹었다. 오후 3시, VC 전화 "대표님,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부 검토 들어갔는데요." 기대한다. 제발. "트랙션이 나쁘지 않은데, 시장 포지셔닝이 애매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또 이거다. "중소기업 타겟인데 가격은 비싸고, 대기업용이라고 하기엔 기능이 부족하고. 타겟을 명확히 하시면 다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 끊었다. 책상에 머리를 박는다. 진짜로. 5분 정도 그러고 있었나. 민수가 다가온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민수가 알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간다. 노트북 열어서 IR 덱을 연다. 슬라이드 12번. "Target Market" 중소기업 500~1000명 규모라고 써있다. Delete 키를 누른다. 지워진다. 그럼 뭐라고 쓰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춘다. 10분 동안. 원복한다. Ctrl+Z. 아직은 아니다. 확신이 없다.저녁 8시, 시뮬레이션 팀원들 퇴근했다. 나만 남았다. 새 엑셀 파일 연다. "피봇 시뮬레이션 최종.xlsx" 시나리오 A: 대기업 타겟 전환영업 사이클: 6개월 첫 계약까지 예상 기간: 8개월 런웨이: 8개월 결론: 망함시나리오 B: 프리미엄 축소, 가격 인하월 구독료: 15만원 → 8만원 예상 고객 증가: 2배 매출 증가: 1200만원 → 1600만원 CAC는 그대로 결론: 단위경제학 더 나빠짐시나리오 C: 버티컬 변경 (HR 자동화)시장조사 기간: 2개월 MVP 재개발: 3개월 런웨이: 8개월 결론: 런웨이 부족시나리오 D: 현재 방향 유지MRR 14% 성장 유지 가정 12개월 후 예상 MRR: 4000만원 프리A 가능 여부: 애매 8개월 후 런웨이 소진 결론: 도박네 개 시나리오 모두 답이 없다. "미친." 혼자 웃는다. 웃음이 나온다. 진짜로. 계산이 안 맞는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한 번 더 계산하면 답이 나올까 했다. 안 나온다. 편의점 간다. 삼각김밥 2개, 바나나우유. 돌아와서 먹는다. 모니터 보면서. 검색한다. "스타트업 피봇 성공 사례" 배달의민족: 배달 대행 → 배달 플랫폼 인스타그램: 위치 기반 체크인 → 사진 공유 트위터: 팟캐스트 플랫폼 → 마이크로블로깅 다들 피봇했다. 성공했다. 그럼 우리도? 다음 검색. "스타트업 피봇 실패 사례" 결과가 더 많다. 훨씬 많다. 아, 그렇지. 실패한 회사들은 뉴스가 안 되니까. 데이터가 없는 거다. 생존자 편향. 경영학 수업 때 배웠다. 성공한 회사들은 피봇했다고 말한다. 근데 피봇한 회사 중 몇 %가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시계 본다. 밤 10시 42분. 아내한테 카톡 온다. "언제 와? 딸이 아빠 기다려" "30분 후에 출발할게" 거짓말이다. 1시간은 더 있을 거다. 밤 11시 50분, 결정 아닌 결정 결론을 내려야 한다. 내일 아침 민수가 또 물어볼 거다. A4 용지 꺼낸다. 펜 든다. 왼쪽에 "피봇 해야 하는 이유"현재 트랙션으로는 투자 어려움 타겟 시장 반응 미온적 경쟁사들과 차별화 약함 단위경제학 개선 필요 VC들도 포지셔닝 문제 지적오른쪽에 "피봇 하면 안 되는 이유"런웨이 부족, 피봇할 시간 없음 팀원들 혼란, 사기 저하 우려 누적 데이터/고객 관계 리셋 새 방향 성공 보장 없음 피봇은 도망일 수도두 개 리스트 본다. 둘 다 맞다. 둘 다 틀리다. 데이터는 피봇하라 한다. 직관은 버티라 한다. 그럼 뭐가 답인가. 답은 없다. 알았다. 대신 질문을 바꾼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나?" 적는다.다음 주 B사 미팅 - 대기업 반응 테스트 기존 고객 10명 전화 - 이탈 이유 재확인 가격 A/B 테스트 - 소규모로 개발 리소스 20% - 엔터프라이즈 기능 준비피봇인가, 유지인가? 둘 다 아니다. 검증이다. 4주 준다. 4주 후 데이터 보고 결정한다. 완벽한 답은 아니다. 그냥 다음 스텝이다. 펜 내려놓는다. 좀 후련하다. 조금. 가방 챙긴다. 불 끈다. 나간다. 지하철에서 아내한테 카톡한다. "지금 출발함. 미안" 답 온다. "조심히 와. 사랑해" 핸드폰 본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왜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피곤해서 그런가. 새벽 1시 12분 집 도착했다. 조용하다. 딸은 벌써 잤다. 방에 들어가서 본다. 작은 숨소리. 이마에 키스한다. "아빠가 뭘 하고 있는지 너도 언젠가 알겠지." 침대에 눕는다. 내일도 묻겠지. 피봇할까? 그럼 또 답하겠지. 모르겠다고. 그게 솔직한 답이다. 확신이 없다. 그래도 간다. 데이터 보고, 고객 만나고, 계산하고, 고민한다. 언젠가 답이 나올까. 모르겠다. 정말. 눈 감는다. 3시간 후면 또 눈 뜰 거다. 스프레드시트 열 거다. 피봇할까? 또 물을 거다. 그게 내 일이다.답은 없다. 그래도 내일은 온다. 계산기는 계속 두드린다.

투자자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투자자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투자자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오늘도 '검토' 하나 추가 오전 10시. 강남역 근처 카페. 투자자 앞에서 45분 발표했다. 준비는 3주 했다. "좋네요. 팀 구성도 괜찮고. 일단 검토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웃으면서 악수했다.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카페 나와서 스프레드시트 열었다. 'VC 미팅 현황' 시트. F열. '진행 상태'. "검토 중"이라고 입력했다. 10번째다.점심은 굶었다. 입맛이 없다. 사무실 돌아와서 CTO한테 물었다. "미팅 어땠어요?" "괜찮았어. 긍정적이었어." 거짓말이다. 긍정적이면 바로 다음 미팅 잡는다. 2주 후, 1달 후 이런 소리 안 한다. "검토해보겠습니다"는 70% 확률로 거절이다. 경험상. 나머지 30%는 진짜 검토 중이거나, 아니면 더 긴 거절이다. 5개 거절의 패턴 지난 2달. 거절 5개 받았다. 패턴이 있다. 1번 거절: "아직 이르다" 시드 투자자였다. 2억 제안했다. "좋은데, 트랙션이 조금 더 필요해요. 6개월 후 다시 봐요." 6개월이면 런웨이 끝난다. 그 얘긴 안 했다. 2번 거절: "우리 포트폴리오랑 안 맞다" 이건 솔직한 거절이다. 고맙다. 시간 낭비 안 하게 해줬다. 3번 거절: "내부 검토 결과..." 이메일로 왔다. 3주 걸렸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나머지는 안 읽었다. 4번 거절: 연락 두절 제일 최악이다. 문자 3번, 이메일 2번. 답 없다. 카톡 읽씹. 그냥 거절이라고 해주면 되는데. 5번 거절: "다음 라운드에서" "지금은 어렵고요, 프리A 할 때 다시 연락주세요." 프리A 하려고 지금 투자 받으려는 건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거절은 그래도 낫다. 끝이니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검토 중'은 지옥이다. 끝도 아니고 시작도 아니다. 매일 기다린다. 카톡 알림 올 때마다 확인한다. 아니다. 광고 문자다. 10개 보류의 무게 현재 '검토 중' 10개. 스프레드시트에 정리돼 있다. A사: 1차 미팅 후 3주째. 답 없음. B사: "2주 후 파트너 미팅 잡자" - 3주 지남. C사: "실사 들어가겠다" - 자료 보낸 지 2주. D사: "다음 주 전화" - 전화 안 옴. E사: "긍정적으로 검토" - 4주 지남. F사: 오늘 추가. 방금. G사: "투자위원회 상정" - 한 달째. H사: "관심 있다" - 구체적 얘기 없음. I사: "조건 맞으면..." - 조건 얘기 안 나옴. J사: "파운더 일정 보고" - 2주째 일정 안 나옴. 10개. 확률 계산해봤다. 30% 가정하면 3개. 3개 중 1개라도 성사되면 된다. 아니다. 2개는 돼야 한다. 목표 금액 5억이니까. 매일 확률 계산한다. 의미 없는 짓이다.목요일 밤. 아내가 물었다. "투자 어떻게 돼가?" "진행 중이야. 잘 될 것 같아." "진짜?" "응. 여러 군데 긍정적이야." 또 거짓말했다. '긍정적'과 '검토 중'은 다른 말이다. 나는 안다. 아내는 믿고 싶어 한다. 나도 믿고 싶다. 버티는 법 1: 숫자 보기 패닉 올 때. 스프레드시트 연다. '재무 현황' 시트. 현금: 6800만원. 월 소진: 850만원. (인건비 650 + 사무실 180 + 기타 20) 런웨이: 8개월. 8개월. 투자 못 받으면 어떻게 되나. 시나리오 짰다. 3개. 최악 시나리오:5개월 후 투자 불발 급여 50% 삭감 3개월 더 버팀 결국 정리중립 시나리오:3개월 내 브릿지 투자 1억 6개월 연장 프리A 준비낙관 시나리오:2개월 내 5억 투자 유치 팀 2명 충원 매출 집중확률은? 최악 40%, 중립 30%, 낙관 30%. 숫자 보면 정신 차린다. 감정 빠지면 끝이다. 숫자만 보면 된다. 버티는 법 2: 병렬 처리 10개 검토 중이면? 10개 더 미팅 잡는다. 목표는 항상 파이프라인 20개. 상단 10개 (진행 중), 하단 10개 (신규 컨택). 하나 떨어지면 하나 채운다. VC 리스트 100개 만들었다. A급 (원하는 곳): 15개 - 10개 미팅 완료, 5개 대기. B급 (괜찮은 곳): 30개 - 컨택 중. C급 (일단 만나는 곳): 55개 - 명단 정리. 매일 아침. 이메일 3개 보낸다. "안녕하세요, 저희 솔루션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답장률 20%. 100개 보내면 20개 답장. 10개 미팅. 3개 진행. 1개 성사. 깔때기다. Funnel. 위에서 계속 부어야 아래로 떨어진다. 멈추면 끝난다. 버티는 법 3: 루틴 유지 무너지면 안 된다. 아침 7시 출근. 변함없다. 팀원들 보면 웃는다. "오늘도 화이팅!" 점심 같이 먹는다. 투자 얘기 안 한다. "어제 고객사 미팅 어땠어?" "데모 반응 좋았어요." "좋네. 클로징까지 가보자." 밝게 말한다. 리더니까. 불안은 전염된다. 내가 흔들리면 팀이 흔들린다. 혼자 있을 때만 한숨 쉰다. 밤 11시. 사무실 불 끈다. 집 가는 지하철. 스마트폰 본다. 새 메일 없다. 카톡 없다. 내일도 똑같을 거다. 그래도 된다. 루틴만 지키면 된다. 버티는 법 4: 작은 승리 챙기기 투자 성사는 Big Win이다. 근데 당장은 안 온다. 그럼 Small Win 챙긴다. 이번 주 Small Wins:신규 고객사 계약 1건 (월 50만원) MAU 8% 증가 개발 일정 안 밀림 VC 2곳 신규 미팅 확정작다. 근데 이게 쌓인다. 매주 금요일. 노션에 기록한다. '이번 주 잘한 것' 리스트. 안 보면 다 까먹는다. 보면 '아, 그래도 뭔가 하고 있네' 싶다. 투자 못 받아도. 회사는 돌아간다. 매출은 오른다. 느려도. 이게 트랙션이다. 오늘 밤도 밤 12시. 아직 사무실이다. IR 덱 또 수정한다. 51번째 버전. 슬라이드 8번. '트랙션'. 그래프 조금 올랐다. 각도 2도. 의미 있나? 모르겠다. 투자자들은 '하키스틱 그로스' 원한다. 우린 '완만한 우상향'이다. 그래도 상승은 상승이다. 내일 또 미팅이다. K사. "검토해보겠습니다" 들을 확률 70%. 그래도 간다. 20% 확률에 거는 거다. 창업이 원래 그렇다.검토는 끝이 아니다. 다음 미팅까지 버티는 거다.

경쟁사 뉴스레터를 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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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15분 잠이 안 와서 노트북을 열었다. 슬랙에 아직 안 읽은 메시지 47개. 메일함에 미팅 요청 3건. 그리고 뉴스레터 하나. "○○테크, 시리즈A 120억 투자 유치" 심장이 멈췄다.정확히는 3초간 숨을 못 쉬었다. 화면을 다시 봤다. 120억. 시리즈A. 리드 투자자가 저기네. 우리가 3번 거절당한 그 VC. 마우스 커서가 떨렸다. 기사를 클릭했다. "월 매출 3000만원 돌파, 전년 대비 400% 성장" "기업 고객 80곳 확보" "시장 점유율 1위 목표" 우리 월 매출은 1200만원이다. 기업 고객은 23곳. 시드 투자 3억 받은 게 1년 반 전이다. 새벽 4시에 이걸 보고 있다. 스크롤을 내렸다 대표 인터뷰가 나왔다. 사진도 있다. 밝게 웃고 있다. 팀원들이랑 같이 찍은 단체 사진. 다들 행복해 보인다. 사무실은 강남 어딘가. 창문이 크다. "시장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고객들이 먼저 찾아오는 단계죠." 읽으면서 욕이 나왔다. 우리는 영업팀 2명이 발로 뛴다. 한 곳 계약하는 데 평균 3개월. 데모 10번 하면 1곳 계약. 그것도 소액 플랜. 핸드폰을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기사를 캡처했다. 슬랙 '경영진' 채널에 올릴까 말까 고민했다. 올리지 않았다. 대신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비교하기 시작했다 우리 MRR: 1200만원 저기 MRR: 3000만원 우리 성장률: 월평균 8% 저기 성장률: 전년 대비 400% 우리 투자금: 3억 (1년 6개월 전) 저기 투자금: 120억 (지금) 런웨이 계산을 다시 했다. 현금 2억 4000만원 남음. 월 번레이트 3200만원. 7.5개월 남음. 7.5개월 안에 시리즈A를 따내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저기는 120억으로 2년은 버틴다. 마케팅 돌리고 개발자 더 뽑고 영업 조직 키우고. 그러면 시장 점유율은 더 벌어진다. 우리는 7.5개월. 키보드에 이마를 박았다. 5시 30분 커피를 내렸다. 다섯 번째다. 위가 쓰리다. 약 먹어야 하는데 귀찮다. 기사를 다시 읽었다. 댓글도 봤다. "축하합니다!" "대단하시네요" "부럽습니다 ㅠㅠ" 링크드인도 확인했다. 저기 대표 포스팅. 좋아요 430개. 댓글 68개. 다들 축하한다고 난리다. 우리가 시드 받았을 때는 좋아요 12개였다. 핸드폰을 뒤집었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깜빡인다. 바꿔야 하는데 계속 미뤘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저 회사는 뭐가 달랐을까. 우리 제품이 나쁜 건가. 세일즈를 못 한 건가. IR을 못 한 건가. 타이밍이 나빴나. 운이 없는 건가. 아니면 내가 부족한 건가.출근 시간 7시가 됐다. 첫 출근은 보통 개발팀 막내다. 7시 40분쯤 온다. 화장실 가서 세수했다. 거울을 봤다. 눈 밑이 까맣다. 36살 얼굴이 아니다. '괜찮은 척'을 준비했다. 슬랙에 들어갔다. 저녁에 올라온 개발 진행 상황 확인. 댓글 달았다. "고생했어요 👍" 이모티콘까지. 메일 3통 답장 썼다. IR 자료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 43페이지 중 6페이지 숫자 수정. 경쟁사 분석 문서를 만들었다. 저기 강점: 자금력, 팀 규모, 마케팅 예산 우리 강점: 제품 완성도, 고객 만족도, 운영 효율 거짓말은 아니다. 우리 NPS 점수가 더 높다. 78점. 저기는 65점. 고객들은 우리 제품을 좋아한다. 문제는 고객 수가 23곳이란 거다. 7시 50분. 문 여는 소리. "대표님 벌써 오셨어요?" 웃었다. "응, 일찍 일어나서." "커피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너 먼저 마셔." 모니터를 닫았다. 경쟁사 뉴스는 안 보이게. 아침 스탠드업 9시 30분. 전체 회의. 다들 모였다. 8명. 개발 4명 기획 1명 디자인 1명 영업 2명. 평균 나이 29살. 다들 열심히 한다. 월급은 시장 평균의 70%. 스톡옵션으로 메꿨다. "이번 주 목표 공유할게요." 개발팀: 대시보드 개편 80% 완료 영업팀: 신규 미팅 6건 잡음 기획팀: 사용자 인터뷰 3건 진행 다들 잘하고 있다. 진짜로. "수고하고 있어요. 이번 주도 화이팅!" 회의 끝. 다들 흩어졌다. 영업팀 리드가 다가왔다. "대표님, ○○테크 투자 소식 보셨어요?" 심장이 또 떨렸다. 티 안 냈다. "응, 봤어." "우리도... 괜찮을까요?" 3초 멈췄다. "우리는 우리 길 가는 거야. 제품이 더 좋잖아. 고객들 반응 봐. 다들 만족한다고 하잖아." "그렇긴 한데... 저기가 마케팅 돌리기 시작하면..." "그래서 우리가 더 빨리 움직여야지. 프리A 준비 잘하고 있어. 다음 주에 VC 2곳 더 만나." "알겠습니다." 돌아갔다.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나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한숨 쉬었다. 3초만 쉬고 나왔다. 오후 2시 점심 먹고 카페에 나왔다. 혼자. 노트북 열었다. 경쟁사 웹사이트 들어갔다. 하나하나 클릭해봤다. UI는 우리가 낫다. 기능은 비슷하다. 가격은 저기가 20% 비싸다. 그런데도 고객이 3배 많다. 이유를 생각했다. 브랜딩인가. 마케팅인가. 영업력인가. 네트워크인가. 아니면 투자금의 차이인가. VC 미팅 때마다 듣는다. "트랙션이 더 필요합니다." 트랙션 만들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 뽑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 받으려면 트랙션이 필요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저기는 120억으로 그 고리를 끊었다. 우리는 7.5개월 안에 끊어야 한다. 핸드폰이 울렸다. VC 파트너. "대표님, 다음 주 화요일 미팅 가능하세요?" "네, 가능합니다." "IR 자료 미리 보내주시면 검토하고 만나죠." "지금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끊었다. 43페이지 IR 덱을 열었다. 다시 봤다. "시장 규모 5조원" 맞다. "월 MRR 성장 8%" 맞다. "고객 만족도 78점" 맞다. 그런데 옆 슬라이드에 경쟁사 현황 넣어야 하나. "경쟁사 ○○테크, 시리즈A 120억 유치" 넣으면 솔직한 거다. 안 넣으면 숨기는 거다. 고민했다. 넣었다. 그 밑에 한 줄 더. "차별점: 제품 완성도 및 고객 밀착 운영 모델" 저장했다. PDF로 내보냈다. 메일 보냈다. 노트북을 닫았다. 커피를 다 마셨다. 식었다. 퇴근길 밤 11시. 사무실을 나왔다. 지하철에 앉았다. 핸드폰 열었다. 링크드인 알림 17개. 다 저 회사 관련이다. 업계 사람들이 공유하고 댓글 달고 난리다. "게임 체인저" "시장 판도가 바뀔 듯" "이제 진짜 시작이네요" 핸드폰을 껐다. 창밖을 봤다. 지하철은 어둠 속을 달린다. 집에 도착했다. 12시. 아내는 자고 있다. 딸도 자고 있다. 조용히 씻었다. 침대에 누웠다. 내일 할 일을 생각했다. VC 미팅 준비. 제품 로드맵 점검. 영업 파이프라인 확인. 개발 일정 체크. 그리고 프리A 마감. 7.5개월. 눈을 감았다. 저기는 120억으로 2년을 달린다. 우리는 2억 4000만원으로 7.5개월. 그런데 포기는 안 한다. 아직은.새벽엔 패배자가 됐다가, 아침엔 대표가 된다. 매일.

월급 날 전날 밤, 통장 잔고 보기

월급 날 전날 밤, 통장 잔고 보기

월급 날 전날 밤, 통장 잔고를 본다 계산의 밤 새벽 1시 52분. 노트북 화면의 스프레드시트가 눈에 들어온다. 월급 날이 내일이다. 매달 이맘때면 어김없이 이 자리에 앉는다. 사무실 불도 꺼졌다. 성수동 공유오피스의 창밖으로 서울 야경이 흐릿하게 보인다. 밤샘 작업 중인 다른 팀들의 불빛이 띄엄띄엄 보인다. 저 불빛들 중 몇 개가 같은 심정일까. 계산기를 든다. 스마트폰의 기본 계산기 앱이다. 이미 엑셀로는 다 계산했지만, 손으로 다시 한 번 더 눌러본다. 손가락이 비현실적으로 움직인다. 매출 1200만원. 이건 확정이다. 어제 영업팀에서 최종 계약금이 들어왔다. 근데 1200만원이라는 숫자가 커 보이면서도 자꾸 작아 보인다. 숫자에 익숙해져서일까, 아니면 이미 심장이 굳어져서일까. 비용은? 이건 변수가 많다.사무실 월세: 180만원 (고정) 직원 8명 월급: 4200만원 (고정, 보너스 제외) 클라우드 비용: 320만원 (증가 추세) 광고비: 800만원 (월별 유동) 기타: 600만원 (미터기)합계. 7100만원. 1200만원 - 7100만원 = -5900만원.손가락이 멈춘다. 같은 식을 세 번을 더 눌렀다. 계산기가 잘못되길 바랐다. 근데 이미 엑셀에서 수십 번 본 숫자다. 내가 엑셀을 잘못 짰을 리도 없다. 나는 네이버에서 기획자였고, 숫자를 읽고 그릴 줄 안다. 이 적자는 진짜다. 그래서 자본금이 있는 거다. 자본금 3억. 3개월마다 2500만원씩 빠진다. 런웨이 8개월. 8개월. 32주. 224일. 오늘이 12월 30일이니까... 8월 말쯤이다. 내년 8월 말. 8개월 안에 회사가 턴어라운드되든지, 투자를 또 받든지, 아니면 문을 닫든지. 직원들 모르게 직원들은 몰라도 된다. 절대 모르게 해야 한다. 내일 오후 2시, 급여 이체 시간. 직원들이 아마 확인할 거다. 한두 명은 슬랙 상태메시지로 '월급 왔다!' 이러고 있을 거다. 나는 그 메시지들을 봐야 한다. 웃으면서. 아니면 "수고했어!" 이렇게 답장을 해야 한다. 4200만원. 여기에 사무실비, 클라우드비, 광고비... 다 떨어져나가고 나면 우리 통장에는 뭐가 남을까. 아, 맞다. 음수다. 그래서 월초부터 현금흐름 관리를 하는 거다. 지난주 수금이 100만원 지연됐으니 그 돈은 다음주에 들어온다. A사 계약금 1500만원은 1월 초다. B사와의 미팅은 아직 진전이 없다. 예정된 매출이 안 들어올 확률은 15% 정도. 그럼 매출이 1020만원이 되는 건가. 1020만원 - 7100만원 = -6080만원. 계산기를 내려놓는다. 손가락이 떨린다. 이게 매달 반복되는 거다. 월말이 되면 스프레드시트를 켜고, 세 가지 시나리오를 그린다. 보수적 시나리오, 현실적 시나리오, 낙관적 시나리오. 근데 세 가지 모두 같다. 다 마이너스다. 상황이 좋으면 마이너스 4900만원, 나쁘면 마이너스 6500만원. 그 사이에서 산다. 그 사이에서 호흡한다. 아내한테는 말 못 했다. "괜찮아, 런웨이 8개월이면 괜찮아. 그 전에 시리즈A 받을 거야"라고만 했다. 아내의 봉급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고 나면 자괴감이 든다. 내가 가장인데, 왜 아내 월급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딸이 어제 "아빠, 일요일에도 일해?" 물었다. 3살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아내가 나를 봐도 불안한 티가 난다고 했다. "얼굴이 계속 그런 거 같아"라고. 그래서 나는 팀원들 앞에서는 절대 그 얼굴을 드러내면 안 된다. 회의에서도, 슬랙에서도. 항상 "일단 해보자", "데이터로 보여줘", "런웨이가 충분하니까 이 기회는 잡자"라고 말해야 한다. 직원들이 불안해하면 회사는 끝난다. 투자자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미팅 다섯 개가 보류 중이다. 그들은 "조금 더 트랙션을 보고 판단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번역하면 "아직 필요 없습니다"다. 근데 내 피치는 계속 자신감으로 가득 찬 척해야 한다. 회의실에서 나올 땐 다시 가슴이 철렁한다. 밤 11시 12분 노트북 화면의 엑셀을 닫으려다가 멈췄다. 한 가지를 더 확인해야 한다. 프리A 투자 진행 중인 VC가 있다. 순환투자 형태로, 성공적인 스타트업들의 투자를 모아서 새로운 회사들에 넣는 방식이다. 그들은 "좋은 프로덕트고, 팀도 좋다"고 했다. 근데 "시리즈A는 아직 이르고, 프리A는 조건이 좋아야"라고 했다. 조건이 좋다는 게 뭘까. 우리가 빨리 회수 가능해야 한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빨리 유니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우리 지표는?MRR: 1200만원 (성장률: 월 8%) CAC: 550만원 (개선 추세 없음) Churn: 월 4% (괜찮은 편) Runway: 8개월 (나쁜 편)이 지표를 보면 투자자들이 뭐라고 할까. "좋은 프로덕트지만, 성장이 느려요", "CAC가 높네요", "시장이 좀 작은 것 같은데요"라고 할 것 같다. 우리가 시장을 잘못 짚었을까? 아니면 마케팅을 잘못 했을까? 아니면 그냥 우리가 부족한 걸까.새벽 2시 34분. 나는 여전히 사무실에 있다. 직원들이 얼마 전에 "대표님, 너무 늦으니까 나가세요"라고 했다. 고마운데 구차했다. 넌 집에 갈 집이 있잖아. 나도 집이 있고, 아내가 있고, 딸이 있다. 근데 마음이 여기 있다. 자본금 3억이 여기 있다. 런웨이 8개월이 여기 있다. 월급 날이 내일이다. 직원들이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그냥 자기 월급이 들어온 줄만 알면 된다. 우리 회사가 매달 5900만원을 까먹는다는 건 몰라도 된다. 근데 난 알아야 한다. 그게 CEO의 일이다. 실패한 스타트업들의 기사를 자꾸만 검색한다. "급속 성장, 갑자기 문을 닫다." "잘나가던 스타트업이 왜 망했나." "투자 라운드 실패 후 폐업." 새벽 3시에 이런 기사들을 읽다 보면 무서워진다.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해야 한다. 내일 팀미팅은 오전 10시다. 그때 난 밝은 표정으로 이번 달 OKR을 리뷰하고, 다음 달 전략을 얘기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니,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척. 확신 있는 척. "괜찮아, 될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 번. 통장 잔고는 여전히 음수다. 근데 내일은 4200만원이 또 빠져나간다.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8개월 동안 계속. 계산기 앱을 내렸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아내가 또 뭔가 말하겠지. "얼굴이 좀..." 그럼 나는 웃을 거다. "일 많아. 괜찮아."월급 날 전날 밤, 또 다른 CEO도 아마 같은 계산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새벽 3시, 슬랙 알림이 울릴 때

새벽 3시, 슬랙 알림이 울릴 때

새벽 3시, 슬랙 알림이 울릴 때 알람이 울린다. 3시 12분. 눈을 뜨고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자동으로 손이 움직인다. 베개 옆 폰을 집는다. 화면이 얼굴을 때린다. 슬랙. 빨간 점. 1개. '누가 또?' 침대 옆에 아내가 자고 있다.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부럽다. 정말 부럽다. 조용히 거실로 나간다. 아이 깨울까봐 슬리퍼를 벗는다. 지나가는 방 문 살짝 열어본다. 딸이 팔 벌리고 자고 있다. 몸 짱 길어진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컸지. 거실 소파에 앉는다. 2시간 반 더 자야 출근 시간인데. 폰을 켠다. 빨간 점의 정체 개발팀 리드 김준수. 오늘 밤 9시쯤 채용공고를 들었다. 오후 미팅에서. "런웨이가 8개월이고, 투자자들이 헤드수를 봐요. 지금 인원으로는 피치 덱에 설득력이 없어서..." 당연히 의사결정이 빠르다. 스타트업의 장점이라고 했다. 팀원들 앞에서는 밝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추가 연봉. 사무실 확장 가능성. 사회보험료. 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아, 김준수가 리드하면서 누군가를 더 끌어오는 게 맞아. 신입이나 경력이나. 팀 규모 성장이 곧 스케일링이야." 슬랙 메시지. "대표님, 이 채용공고 좀 봐줄 수 있을까요? 내가 초안 작성했는데. 한 번 검토해주면..." 시간이 13분 전이다. '3시에 이걸 왜 보내지?' 다시 읽는다. "지금 보내도 괜찮을까봐서... 내일 아침 보면 어때요?" 그 뒤에 다섯 개의 이모지. 죄송함의 이모지들. 알 것 같다. 김준수는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밤 11시에 퇴근했으니까. 늦어도 자정 즈음에. 그 후로 계속 생각했을 것이다. 채용공고. IR. 트랙션. 다음 분기. 나처럼. 그래서 3시에 보냈을 거다. 자다 깼거나, 아니면 계속 일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폰을 내려놨다가 다시 집는다.3시의 의무감 회신할까. 말 그대로 반 초 정도만에 끝난다. 'ㅇㅋ 내일 아침에 보자' Enter. '읽음' 표시가 떠야 해야 마음이 놓인다. 말도 안 된다. 뭐가 어떻게 놓인단 말인가. 어차피 내일 아침에 봐야 하는 거고, 밤 3시에 확인했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건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대표'니까. 대표는 2시간 빨리 본다. 대표는 밤 3시에도 본다. 대표는 항상 온라인이다. 대표는 언제나 응답 대기 중이다. 대표는 어떤 상황에서든 '다 괜찮아'라고 말한다. 쓸데없는 심리 전쟁이다. 근데 이긴다. 항상 이긴다. 스프레드시트를 다시 켠다. 런웨이 계산 시뮬레이션. A 시나리오. 보수적. 매출 성장 없음. 인원 추가. 결과. 5개월. B 시나리오. 중립. 월 15% 성장 유지. 인원 추가. 결과. 7개월. C 시나리오. 낙관적. 월 20% 성장. 인원 추가. 신규 고객 확보. 추가 투자 체결. 결과. 무한. C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C만 가능해야 한다. 기찻길 위에 가만히 누워 있는 기분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움직이면 부술 수도 있다. 그런데 움직일 수밖에 없다. 김준수 말고도 다른 팀원들은? 영업팀은 어떻게 되나. 영업이 제대로 안 되면 채용은 무슨 채용인가. 그런데 채용을 안 하면 더 영업이 안 된다. 악순환. 이걸 누가 전해줄까. 누가 알아줄까. 아내는 몰라도 된다. 걱정만 시킬 테니까. 투자자들한테는 절대 이런 생각이 있는 척 하면 안 된다. '검토해보겠습니다'라는 거절은 '당신은 관리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피드백과 다르지 않다. 혼자다. 정확히는, 함께 있어야 하지만 혼자다. 슬랙의 중독성 시간이 간다. 3시 28분. 스프레드시트를 닫는다. 새로 켠다. 경쟁사 분석. 요즘 라운드를 본 스타트업들. 우리와 비슷한 지표. 우리와 다른 지표.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성장이 빨라?' 메모리로 다시 돌아간다. 정보량이 굉장하다. 혹은 거짓말일 수도 있다. 스타트업 업계는 거짓말 많다. 나도 IR 덱에서는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전략이면 충분히 시장을 장악할 수 있어' '우리 팀이면 가능합니다' 슬랙이 또 울린다. 4시 02분. 이번엔 영업팀이다. "대표님, 내일 고객 미팅 좀 대신 봐주실 수 있을까요? A사인데, 뭔가 이번 달 의사결정이 빨라진 것 같아서..." 아. 이건 좋은 뉴스다. 그런데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한다. 내가 뛰어야 한다는 거. 영업도 못하는 팀원들. 아니다. 못한 게 아니라 못해본 거다. 신입이 많으니까. 경험이 부족하니까. 그래서 내가 뛴다. 내일 아침 9시. A사 미팅. 오후 3시. 투자자 미팅. 저녁 6시. 개발 일정 리뷰. 이미 정해진 일정 위에 또 덮인다. '다 해야지. 뭘.'회신한다. "좋아, 내가 봐줄게. 우리 팀이 먼저 한 번 더 대면한 다음에 나랑 세 명이 함께 들어가자. 좋은 기회야." 밝게. 항상 밝게. 현실은 이거다. 내일 9시에 못 본다. 왜냐하면 난 지금 3시에도 못 자니까. 그리고 아침에 눈 떠서 이메일 50개를 봐야 한다. 그 다음에 스프레드시트 업데이트. 그 다음에 회의 준비. 9시 미팅에서 내가 밝게 웃고 있을까. 아마도. 아마도 그럴 거다. 왜냐하면 '대표'니까. 잠들지 못하는 이유 4시 30분. 컵라면을 끓인다. 물소리가 작게 들린다. 가스렌지. 밤 시간에 우리 집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 스마트폰은 계속 켜 있다. 또 뭐가 올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왔는데 못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경우의 수들이 자꾸 떠오른다. 네이버에 있을 땐 이런 게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했다. 정해진 시간에 퇴근했다. 누군가 상위 레벨에서 결정을 했고, 나는 그 아래에서 일했다. 책임감이 있었지만 이런 책임은 없었다. 이건 다른 종류의 무게다. 돈이다. 직원들의 월급이다. 내 아내의 미래고, 아이의 미래고, 부모님의 신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게 전부 내 판단에 달렸다는 거다. '피봇해야 하나?' 이 질문은 3시마다 돈다. 새벽 2시에도 돈다. 저녁 11시에도 돈다. 주말 아침에도 돈다. 지금 우리 프로덕트가 맞나. 지금 우리 마켓이 맞나. 지금 우리 팀이 맞나. 지금 우리 펀딩 전략이 맞나. 모든 게 의문이다. 그리고 모든 게 내 몫이다. 라면을 먹는다. 국물이 덜 식어서 입이 데인다. 아무 맛이 없다.아침까지 1시간 반 4시 47분. 아내가 일어나지 않을까 봐 거실 불을 끈다. 폰의 불빛만 남는다. 슬랙. 메일. 뉴스. 또 슬랙. 어떤 창업가 인터뷰를 읽다가 멈춘다. "성공의 비결은 충분한 수면과 명확한 전략이었습니다." '우리 여긴 얼마나 성공했길래.' 자조적이다. 근데 이런 마음가짐이 사람을 죽인다. 근데 죽지 않을 수가 없다. 5시 20분. 출근까지 1시간 40분. 침대로 돌아갈까. 아니다. 이제는 잠들기 어렵다. 이 상태로 누우면 더 답답하다. 그래서 그냥 여기 있다. 소파에. 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면서.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메모장 앱. 오늘의 할 일 목록.A사 고객 미팅 (09:00) - 제안서 재점검 팀 미팅 (10:30) - 일정 조정 투자자 미팅 (15:00) - IR 덱 최종 수정 개발 리뷰 (18:00) - 런웨이 시뮬레이션 공유 채용공고 검토 (따로 시간 잡기)8개월의 런웨이를 쪼개는 일정들이다. 하나하나가 번인이다. '이거 다 될까?' 음악을 켠다.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lo-fi beats for productivity' 누군가 이미 같은 시간대에 같은 상태로 음악을 만들었을 거다. 같은 새벽 3시에 깨있는 누군가. 그 누군가도 뭔가를 못 해서, 뭔가를 놓쳐서, 뭔가를 잃을까봐 깨있을 거다. 혼자가 아니라는 게 조금 낫다. 근데 별로 낫지도 않다. 5시 50분 전자 알람이 울린다. 이번엔 밤이 아니라 아침이다. 차이가 뭘까. 3시에 깨는 것과 6시에 자동으로 깨는 것. 결국 같은 잠 부족인데. 침대에서 나온다. 샤워를 한다. 거울을 본다. '피곤해 보이네.' 아내가 말한 적 있다. "왜 자꾸 짙게 보여?" "뭐, 일 때문에." "오케이..." 그 다음은 침묵이었다. 걱정하는 침묵. 더 이상 뭔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안다. 7시. 출근한다. 오피스는 비어있다. 내가 가장 먼저다. 항상 그렇다. 노트북을 켠다. 슬랙. 메일. 뉴스. '오늘도 시작된다.' 그리고 밤 11시. 퇴근한다. 혹은 퇴근했다고 치기로 한다. 집에 가서 이불을 덮는다. 새벽 3시. 또 뭔가가 울린다.내일도 똑같을 거다. 그 다음 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 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