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날 전날 밤, 통장 잔고 보기

월급 날 전날 밤, 통장 잔고 보기

월급 날 전날 밤, 통장 잔고를 본다

계산의 밤

새벽 1시 52분. 노트북 화면의 스프레드시트가 눈에 들어온다. 월급 날이 내일이다.

매달 이맘때면 어김없이 이 자리에 앉는다. 사무실 불도 꺼졌다. 성수동 공유오피스의 창밖으로 서울 야경이 흐릿하게 보인다. 밤샘 작업 중인 다른 팀들의 불빛이 띄엄띄엄 보인다. 저 불빛들 중 몇 개가 같은 심정일까.

계산기를 든다. 스마트폰의 기본 계산기 앱이다. 이미 엑셀로는 다 계산했지만, 손으로 다시 한 번 더 눌러본다. 손가락이 비현실적으로 움직인다.

매출 1200만원. 이건 확정이다. 어제 영업팀에서 최종 계약금이 들어왔다. 근데 1200만원이라는 숫자가 커 보이면서도 자꾸 작아 보인다. 숫자에 익숙해져서일까, 아니면 이미 심장이 굳어져서일까.

비용은? 이건 변수가 많다.

  • 사무실 월세: 180만원 (고정)
  • 직원 8명 월급: 4200만원 (고정, 보너스 제외)
  • 클라우드 비용: 320만원 (증가 추세)
  • 광고비: 800만원 (월별 유동)
  • 기타: 600만원 (미터기)

합계. 7100만원.

1200만원 - 7100만원 = -5900만원.

손가락이 멈춘다. 같은 식을 세 번을 더 눌렀다. 계산기가 잘못되길 바랐다. 근데 이미 엑셀에서 수십 번 본 숫자다. 내가 엑셀을 잘못 짰을 리도 없다. 나는 네이버에서 기획자였고, 숫자를 읽고 그릴 줄 안다. 이 적자는 진짜다.

그래서 자본금이 있는 거다. 자본금 3억. 3개월마다 2500만원씩 빠진다. 런웨이 8개월.

8개월. 32주. 224일.

오늘이 12월 30일이니까… 8월 말쯤이다. 내년 8월 말.

8개월 안에 회사가 턴어라운드되든지, 투자를 또 받든지, 아니면 문을 닫든지.

직원들 모르게

직원들은 몰라도 된다. 절대 모르게 해야 한다.

내일 오후 2시, 급여 이체 시간. 직원들이 아마 확인할 거다. 한두 명은 슬랙 상태메시지로 ‘월급 왔다!’ 이러고 있을 거다. 나는 그 메시지들을 봐야 한다. 웃으면서. 아니면 “수고했어!” 이렇게 답장을 해야 한다.

4200만원. 여기에 사무실비, 클라우드비, 광고비… 다 떨어져나가고 나면 우리 통장에는 뭐가 남을까.

아, 맞다. 음수다.

그래서 월초부터 현금흐름 관리를 하는 거다. 지난주 수금이 100만원 지연됐으니 그 돈은 다음주에 들어온다. A사 계약금 1500만원은 1월 초다. B사와의 미팅은 아직 진전이 없다. 예정된 매출이 안 들어올 확률은 15% 정도. 그럼 매출이 1020만원이 되는 건가.

1020만원 - 7100만원 = -6080만원.

계산기를 내려놓는다. 손가락이 떨린다.

이게 매달 반복되는 거다. 월말이 되면 스프레드시트를 켜고, 세 가지 시나리오를 그린다. 보수적 시나리오, 현실적 시나리오, 낙관적 시나리오. 근데 세 가지 모두 같다. 다 마이너스다. 상황이 좋으면 마이너스 4900만원, 나쁘면 마이너스 6500만원.

그 사이에서 산다. 그 사이에서 호흡한다.

아내한테는 말 못 했다. “괜찮아, 런웨이 8개월이면 괜찮아. 그 전에 시리즈A 받을 거야”라고만 했다. 아내의 봉급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고 나면 자괴감이 든다. 내가 가장인데, 왜 아내 월급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딸이 어제 “아빠, 일요일에도 일해?” 물었다. 3살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아내가 나를 봐도 불안한 티가 난다고 했다. “얼굴이 계속 그런 거 같아”라고.

그래서 나는 팀원들 앞에서는 절대 그 얼굴을 드러내면 안 된다. 회의에서도, 슬랙에서도. 항상 “일단 해보자”, “데이터로 보여줘”, “런웨이가 충분하니까 이 기회는 잡자”라고 말해야 한다.

직원들이 불안해하면 회사는 끝난다. 투자자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미팅 다섯 개가 보류 중이다. 그들은 “조금 더 트랙션을 보고 판단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번역하면 “아직 필요 없습니다”다. 근데 내 피치는 계속 자신감으로 가득 찬 척해야 한다. 회의실에서 나올 땐 다시 가슴이 철렁한다.

밤 11시 12분

노트북 화면의 엑셀을 닫으려다가 멈췄다. 한 가지를 더 확인해야 한다.

프리A 투자 진행 중인 VC가 있다. 순환투자 형태로, 성공적인 스타트업들의 투자를 모아서 새로운 회사들에 넣는 방식이다. 그들은 “좋은 프로덕트고, 팀도 좋다”고 했다. 근데 “시리즈A는 아직 이르고, 프리A는 조건이 좋아야”라고 했다.

조건이 좋다는 게 뭘까. 우리가 빨리 회수 가능해야 한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빨리 유니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우리 지표는?

  • MRR: 1200만원 (성장률: 월 8%)
  • CAC: 550만원 (개선 추세 없음)
  • Churn: 월 4% (괜찮은 편)
  • Runway: 8개월 (나쁜 편)

이 지표를 보면 투자자들이 뭐라고 할까. “좋은 프로덕트지만, 성장이 느려요”, “CAC가 높네요”, “시장이 좀 작은 것 같은데요”라고 할 것 같다.

우리가 시장을 잘못 짚었을까? 아니면 마케팅을 잘못 했을까? 아니면 그냥 우리가 부족한 걸까.

새벽 2시 34분. 나는 여전히 사무실에 있다.

직원들이 얼마 전에 “대표님, 너무 늦으니까 나가세요”라고 했다. 고마운데 구차했다. 넌 집에 갈 집이 있잖아. 나도 집이 있고, 아내가 있고, 딸이 있다. 근데 마음이 여기 있다. 자본금 3억이 여기 있다. 런웨이 8개월이 여기 있다.

월급 날이 내일이다.

직원들이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그냥 자기 월급이 들어온 줄만 알면 된다. 우리 회사가 매달 5900만원을 까먹는다는 건 몰라도 된다. 근데 난 알아야 한다. 그게 CEO의 일이다.

실패한 스타트업들의 기사를 자꾸만 검색한다. “급속 성장, 갑자기 문을 닫다.” “잘나가던 스타트업이 왜 망했나.” “투자 라운드 실패 후 폐업.” 새벽 3시에 이런 기사들을 읽다 보면 무서워진다.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해야 한다. 내일 팀미팅은 오전 10시다. 그때 난 밝은 표정으로 이번 달 OKR을 리뷰하고, 다음 달 전략을 얘기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니,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척. 확신 있는 척.

“괜찮아, 될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 번.

통장 잔고는 여전히 음수다. 근데 내일은 4200만원이 또 빠져나간다.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8개월 동안 계속.

계산기 앱을 내렸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아내가 또 뭔가 말하겠지. “얼굴이 좀…”

그럼 나는 웃을 거다. “일 많아. 괜찮아.”


월급 날 전날 밤, 또 다른 CEO도 아마 같은 계산을 하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