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봇할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벽 3시 41분

또 눈 떴다.

슬랙 알림은 없다. 당연하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건 나뿐이니까.

스프레드시트를 연다. 어제 저녁에 닫았던 그 파일. “시나리오 분석 v23.xlsx”

MRR 그래프를 본다. 지난달 1050만원, 이번 달 1200만원. 성장은 하고 있다. 14% 성장. 나쁘지 않다. 그런데.

런웨이는 8개월.

14%씩 성장하면 프리A 받을 만한 트랙션까지 12개월 걸린다. 계산이 안 맞는다. 4개월이 모자라.

“피봇해야 하나.”

이 생각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시작한다. 매일.

출근길 계산기

7시 21분 지하철.

어제 만난 VC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된다.

“방향은 좋은데요, 시장이 너무 작지 않나요?”

TAM 3000억이라고 했다. IR 덱에 그렇게 썼다. 근데 솔직히 그 숫자 믿냐고 물으면 나도 자신 없다. 리서치 회사 보고서 짜깁기한 거다.

실제로 우리가 공략할 수 있는 시장은 얼마나 될까.

B2B SaaS, 중소기업 타겟, 업무 자동화. 경쟁사 4개. 우리 차별점은 ‘사용성’.

그런데 고객들은 “가격이 중요해요”라고 한다.

우리 강점을 고객이 안 본다. 이게 문제다.

피봇 시나리오 A: 타겟을 대기업으로. 단가 높이기. 피봇 시나리오 B: 기능 줄이고 가격 낮추기. 볼륨 게임. 피봇 시나리오 C: 완전히 다른 버티컬로. HR? 재무?

계산기 두드린다. 시나리오별 매출 예측.

대기업 타겟하면 영업 사이클 6개월. 런웨이가 안 된다. 가격 낮추면 단위경제학이 안 맞는다. 다른 버티컬은… 처음부터 다시?

“망했네.”

혼잣말이 나온다. 옆 사람이 쳐다본다.

아침 스탠드업

9시 30분. 팀원들 모였다.

“어제 A사 미팅 어땠어요?”

개발팀장 민수가 묻는다.

“잘 됐어. 긍정적이야.”

거짓말이다. A사는 “검토해보겠습니다” 했다. 이건 거절이다. 20번 들어봐서 안다.

“다음 주 B사 데모 준비하자. 이번엔 자동화 케이스 3개 더 보여주고.”

팀원들이 고개 끄덕인다.

민수가 말한다. “근데 대표님, B사는 대기업이잖아요. 우리 솔루션이 엔터프라이즈급으로 준비됐나요?”

준비 안 됐다. 보안 인증도 없고, 온프레미스 배포도 안 된다.

“일단 관심 보이면 커스터마이징 들어가는 거지 뭐.”

민수가 약간 불안한 표정이다. 눈치챘나.

회의 끝나고 민수를 붙잡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 방향.”

민수가 잠깐 망설인다.

“솔직히요… 중소기업 고객들 반응이 생각보다 안 좋잖아요. 이탈률도 높고. 대기업 가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준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준비 시간. 그게 없다는 게 문제지.

점심, 데이터와 직관 사이

팀원들이랑 성수동 국밥집.

밥 먹으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돌아간다.

데이터를 본다.

  • 신규 고객 획득 비용(CAC): 180만원
  • 고객 생애 가치(LTV): 320만원
  • LTV/CAC 비율: 1.78

책에서는 3 이상이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1.78.

그런데 이탈률이 문제다. 6개월 리텐션 45%. 절반이 떠난다.

왜 떠나나. 고객 인터뷰 10개 다시 읽어봤다.

“너무 복잡해요.” “우리가 원하는 기능이 없어요.” “가격 대비 효과가 안 보여요.”

복잡하다고? 우리는 사용성이 강점인데.

민수 말대로 타겟을 잘못 잡은 건가. 중소기업은 ‘쉬운 것’을 원하는데, 우리는 ‘강력한 것’을 만들었나.

그럼 대기업으로 가야 하나.

대기업은 강력한 걸 원한다. 맞다. 근데 우리 솔루션이 정말 대기업급인가.

데이터는 ‘피봇하라’고 한다. 직관은 ‘조금만 더 버텨봐’라고 한다.

국밥 반도 못 먹었다.

오후 3시, VC 전화

“대표님,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부 검토 들어갔는데요.”

기대한다. 제발.

“트랙션이 나쁘지 않은데, 시장 포지셔닝이 애매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또 이거다.

“중소기업 타겟인데 가격은 비싸고, 대기업용이라고 하기엔 기능이 부족하고. 타겟을 명확히 하시면 다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 끊었다.

책상에 머리를 박는다. 진짜로.

5분 정도 그러고 있었나. 민수가 다가온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민수가 알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간다.

노트북 열어서 IR 덱을 연다. 슬라이드 12번. “Target Market”

중소기업 500~1000명 규모라고 써있다.

Delete 키를 누른다. 지워진다.

그럼 뭐라고 쓰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춘다. 10분 동안.

원복한다. Ctrl+Z.

아직은 아니다. 확신이 없다.

저녁 8시, 시뮬레이션

팀원들 퇴근했다. 나만 남았다.

새 엑셀 파일 연다. “피봇 시뮬레이션 최종.xlsx”

시나리오 A: 대기업 타겟 전환

  • 영업 사이클: 6개월
  • 첫 계약까지 예상 기간: 8개월
  • 런웨이: 8개월
  • 결론: 망함

시나리오 B: 프리미엄 축소, 가격 인하

  • 월 구독료: 15만원 → 8만원
  • 예상 고객 증가: 2배
  • 매출 증가: 1200만원 → 1600만원
  • CAC는 그대로
  • 결론: 단위경제학 더 나빠짐

시나리오 C: 버티컬 변경 (HR 자동화)

  • 시장조사 기간: 2개월
  • MVP 재개발: 3개월
  • 런웨이: 8개월
  • 결론: 런웨이 부족

시나리오 D: 현재 방향 유지

  • MRR 14% 성장 유지 가정
  • 12개월 후 예상 MRR: 4000만원
  • 프리A 가능 여부: 애매
  • 8개월 후 런웨이 소진
  • 결론: 도박

네 개 시나리오 모두 답이 없다.

“미친.”

혼자 웃는다. 웃음이 나온다. 진짜로.

계산이 안 맞는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한 번 더 계산하면 답이 나올까 했다. 안 나온다.

편의점 간다. 삼각김밥 2개, 바나나우유.

돌아와서 먹는다. 모니터 보면서.

검색한다. “스타트업 피봇 성공 사례”

배달의민족: 배달 대행 → 배달 플랫폼 인스타그램: 위치 기반 체크인 → 사진 공유 트위터: 팟캐스트 플랫폼 → 마이크로블로깅

다들 피봇했다. 성공했다.

그럼 우리도?

다음 검색. “스타트업 피봇 실패 사례”

결과가 더 많다. 훨씬 많다.

아, 그렇지. 실패한 회사들은 뉴스가 안 되니까. 데이터가 없는 거다.

생존자 편향. 경영학 수업 때 배웠다.

성공한 회사들은 피봇했다고 말한다. 근데 피봇한 회사 중 몇 %가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시계 본다. 밤 10시 42분.

아내한테 카톡 온다.

“언제 와? 딸이 아빠 기다려”

“30분 후에 출발할게”

거짓말이다. 1시간은 더 있을 거다.

밤 11시 50분, 결정 아닌 결정

결론을 내려야 한다. 내일 아침 민수가 또 물어볼 거다.

A4 용지 꺼낸다. 펜 든다.

왼쪽에 “피봇 해야 하는 이유”

  • 현재 트랙션으로는 투자 어려움
  • 타겟 시장 반응 미온적
  • 경쟁사들과 차별화 약함
  • 단위경제학 개선 필요
  • VC들도 포지셔닝 문제 지적

오른쪽에 “피봇 하면 안 되는 이유”

  • 런웨이 부족, 피봇할 시간 없음
  • 팀원들 혼란, 사기 저하 우려
  • 누적 데이터/고객 관계 리셋
  • 새 방향 성공 보장 없음
  • 피봇은 도망일 수도

두 개 리스트 본다.

둘 다 맞다. 둘 다 틀리다.

데이터는 피봇하라 한다. 직관은 버티라 한다.

그럼 뭐가 답인가.

답은 없다. 알았다.

대신 질문을 바꾼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나?”

적는다.

  1. 다음 주 B사 미팅 - 대기업 반응 테스트
  2. 기존 고객 10명 전화 - 이탈 이유 재확인
  3. 가격 A/B 테스트 - 소규모로
  4. 개발 리소스 20% - 엔터프라이즈 기능 준비

피봇인가, 유지인가?

둘 다 아니다. 검증이다.

4주 준다. 4주 후 데이터 보고 결정한다.

완벽한 답은 아니다. 그냥 다음 스텝이다.

펜 내려놓는다.

좀 후련하다. 조금.

가방 챙긴다. 불 끈다. 나간다.

지하철에서 아내한테 카톡한다.

“지금 출발함. 미안”

답 온다.

“조심히 와. 사랑해”

핸드폰 본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왜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피곤해서 그런가.

새벽 1시 12분

집 도착했다. 조용하다.

딸은 벌써 잤다. 방에 들어가서 본다. 작은 숨소리.

이마에 키스한다.

“아빠가 뭘 하고 있는지 너도 언젠가 알겠지.”

침대에 눕는다.

내일도 묻겠지. 피봇할까?

그럼 또 답하겠지. 모르겠다고.

그게 솔직한 답이다.

확신이 없다. 그래도 간다.

데이터 보고, 고객 만나고, 계산하고, 고민한다.

언젠가 답이 나올까.

모르겠다. 정말.

눈 감는다.

3시간 후면 또 눈 뜰 거다. 스프레드시트 열 거다.

피봇할까? 또 물을 거다.

그게 내 일이다.


답은 없다. 그래도 내일은 온다. 계산기는 계속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