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동기 모임, 유일하게 솔직해질 수 있는 곳

창업 동기 모임, 유일하게 솔직해질 수 있는 곳

월요일 밤 9시 30분

성수동 작은 술집. 창업 동기 4명이 모였다. 나, 이수진(헬스케어 앱), 김민준(푸드테크), 정하늘(에듀테크). 2년 전 같은 액셀러레이터 출신이다.

“박창업 왔네. 요새 어때?” “그냥 굴러간다. 너희는?”

첫 맥주 한 잔은 늘 이렇게 시작한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서로 눈치 본다.

두 번째 잔부터 달라진다.

“사실 이번 달 월급 내가 월급 받을까 말까다.” 민준이가 먼저 터뜨렸다.

“나도. 통장에 2300만원 남았어. 런웨이 두 달.” 수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웃긴데 웃기지 않았다.

“우리 8개월. 그것도 프리A 못 받으면.” 내가 말했다.

하늘이가 소주를 따랐다. “우리 팀은 핵심 개발자가 나간대. 카카오 제안 받았다고.”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이게 우리의 진짜 이야기다.

다른 데선 못 하는 말들

부모님 만나면 “잘 돼가”라고 한다. 투자자 미팅에선 “성장세 가파릅니다”라고 한다. 대학 동기들 만나면 “바쁘긴 한데 재밌어”라고 한다. 아내한테는 “곧 나아질 거야”라고 한다.

전부 거짓말은 아니다. 그냥 전부 진실도 아닐 뿐.

여기선 다르다.

“시리즈A 받은 회사 보면 배아프지 않아?” “개나 소나 시리즈B 받더라. 우린 시드도 간당간당한데.” “경쟁사 IR 덱 봤어? 우리보다 숫자 별로던데 투자 받았어.” “공동창업자랑 지분 문제로 싸웠어. 진짜 헤어질 뻔했어.”

이런 말 할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다.

민준이가 물었다. “너희 팀원들한테 회사 상황 얼마나 솔직하게 말해?”

“반만.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수진이가 답했다.

“나도. 괜히 이직 준비하면 어쩌나.” 내가 말했다.

“근데 솔직하게 말 안 하면 더 불안해하더라.” 하늘이가 소주잔을 비웠다.

“맞아. 이번에 직원 한 명이 사실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대표 얼굴만 봐도 안다고.”

우리는 웃었다. 쓴웃음.

숫자로 말하는 고독

“이번 달 MRR 얼마?” 민준이가 물었다.

“1200. 지난달이랑 비슷해.” “나는 800. 두 달째 제자리.” “우리 400. 작년보다 줄었어.” “나는… 150.”

하늘이가 말을 아꼈다. 우리도 더 안 물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못 한다. 그래서 더 무겁다.

“근데 MRR 낮다고 망하는 건 아니잖아.” 수진이가 말했다.

“맞아. 토스도 처음엔.” “배민도 5년 적자였고.” “쿠팡은 10년.”

우리는 이런 이야기로 서로를 위로한다. 성공한 회사들의 과거를 끄집어낸다.

근데 속으론 안다. 저 회사들은 살아남았지만, 수천 개는 죽었다는 걸.

“그래도 해야지 뭐.” 민준이가 말했다.

“응. 해야지.”

3차는 편의점

11시 넘어서 나왔다. 술집 문 닫을 시간.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캔맥주 하나씩 들고.

“진짜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도 돼?” 하늘이가 물었다.

“뭔데?”

“너희 망하면 뭐 할 거야?”

공기가 무거워졌다. 우리 다 생각해본 질문이다.

“취업? 근데 나이가.” “프리랜서? 근데 커리어가.” “또 창업? 근데 돈이.”

답은 없었다.

“그냥 안 망하면 되는 거 아냐?” 내가 말했다.

“개논리네.” 민준이가 웃었다.

“근데 맞는 말 같기도.” 수진이도 웃었다.

우리는 캔을 부딪쳤다. 딸각. 얇은 알루미늄 소리.

“그래. 안 망하자.” “건배.”

집으로 가는 택시 안

12시 10분. 택시 뒷좌석.

휴대폰 확인했다. 슬랙 알림 3개. 개발팀에서 버그 리포트. 내일 아침 확인하면 된다.

아내한테 카톡 왔다. “언제 와?” “지금 가는 중” “조심히 와”

딸 사진도 보내줬다. 이불 킥오프하고 자는 모습.

화면 끄고 창밖 봤다. 한강 다리 지나간다.

오늘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 런웨이, MRR, 투자, 직원 이탈, 경쟁사.

전부 무거운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혼자 아닌 것 같아서. 나만 힘든 게 아니라서. 같이 버티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음 달 모임 날짜

단톡방에 메시지 왔다.

“다음 달 셋째 주 월요일?” “ㅇㅋ” “ㄱㄱ” “+1”

나도 답장했다. “ㅇㅇ”

별 말 아닌데 중요한 약속이다.

이 모임이 없었으면, 작년에 이미 접었을 수도 있다.

수진이가 시리즈A 받기 직전에 포기하려 했을 때, 민준이가 공동창업자랑 싸워서 회사 나가려 했을 때, 하늘이가 피봇 3번째 하면서 무너졌을 때,

우리가 붙잡았다.

“조금만 더.” “지금 그만두면 아깝다.” “다음 달에 또 보자.”

그렇게 버텼다. 지금도 버티고 있다.

새벽 1시

집 도착했다. 조용히 문 열고 들어갔다.

딸은 자고 있고, 아내는 거실 소파에서 노트북 보고 있다.

“왔어?” “응. 안 자?” “기다렸지.”

미안했다.

“동기들은 잘 있어?” “응. 다들 바쁘대.”

“바쁘다”는 말 속에 숨은 진짜 이야기들. 아내는 모른다. 아니, 알까? 눈치챘을 수도.

“씻고 자.” “응.”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다음 주엔 투자사 미팅 2개. 다다음 주엔 제품 업데이트. 월말엔 또 월급날.

버텨야 한다. 동기들도 버티는데.

핸드폰 다시 켰다. 단톡방 확인했다.

민준: “오늘 고마웠어들” 수진: “ㅇㅇ 힘 났다” 하늘: “다음 달까지 살아있자”

나도 답장했다. “ㄱㄱ”

화면 껐다.

창업은 외롭다. 대표는 더 외롭다.

근데 가끔은 덜 외롭다. 이런 날 때문에.


다음 달 셋째 주 월요일까지. 또 버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