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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11 Dec, 2025
창업 동기 모임, 유일하게 솔직해질 수 있는 곳
월요일 밤 9시 30분 성수동 작은 술집. 창업 동기 4명이 모였다. 나, 이수진(헬스케어 앱), 김민준(푸드테크), 정하늘(에듀테크). 2년 전 같은 액셀러레이터 출신이다. "박창업 왔네. 요새 어때?" "그냥 굴러간다. 너희는?" 첫 맥주 한 잔은 늘 이렇게 시작한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서로 눈치 본다.두 번째 잔부터 달라진다. "사실 이번 달 월급 내가 월급 받을까 말까다." 민준이가 먼저 터뜨렸다. "나도. 통장에 2300만원 남았어. 런웨이 두 달." 수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웃긴데 웃기지 않았다. "우리 8개월. 그것도 프리A 못 받으면." 내가 말했다. 하늘이가 소주를 따랐다. "우리 팀은 핵심 개발자가 나간대. 카카오 제안 받았다고."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이게 우리의 진짜 이야기다. 다른 데선 못 하는 말들 부모님 만나면 "잘 돼가"라고 한다. 투자자 미팅에선 "성장세 가파릅니다"라고 한다. 대학 동기들 만나면 "바쁘긴 한데 재밌어"라고 한다. 아내한테는 "곧 나아질 거야"라고 한다. 전부 거짓말은 아니다. 그냥 전부 진실도 아닐 뿐.여기선 다르다. "시리즈A 받은 회사 보면 배아프지 않아?" "개나 소나 시리즈B 받더라. 우린 시드도 간당간당한데." "경쟁사 IR 덱 봤어? 우리보다 숫자 별로던데 투자 받았어." "공동창업자랑 지분 문제로 싸웠어. 진짜 헤어질 뻔했어." 이런 말 할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다. 민준이가 물었다. "너희 팀원들한테 회사 상황 얼마나 솔직하게 말해?" "반만.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수진이가 답했다. "나도. 괜히 이직 준비하면 어쩌나." 내가 말했다. "근데 솔직하게 말 안 하면 더 불안해하더라." 하늘이가 소주잔을 비웠다. "맞아. 이번에 직원 한 명이 사실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대표 얼굴만 봐도 안다고." 우리는 웃었다. 쓴웃음. 숫자로 말하는 고독 "이번 달 MRR 얼마?" 민준이가 물었다. "1200. 지난달이랑 비슷해." "나는 800. 두 달째 제자리." "우리 400. 작년보다 줄었어." "나는... 150." 하늘이가 말을 아꼈다. 우리도 더 안 물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못 한다. 그래서 더 무겁다."근데 MRR 낮다고 망하는 건 아니잖아." 수진이가 말했다. "맞아. 토스도 처음엔." "배민도 5년 적자였고." "쿠팡은 10년." 우리는 이런 이야기로 서로를 위로한다. 성공한 회사들의 과거를 끄집어낸다. 근데 속으론 안다. 저 회사들은 살아남았지만, 수천 개는 죽었다는 걸. "그래도 해야지 뭐." 민준이가 말했다. "응. 해야지." 3차는 편의점 11시 넘어서 나왔다. 술집 문 닫을 시간.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캔맥주 하나씩 들고. "진짜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도 돼?" 하늘이가 물었다. "뭔데?" "너희 망하면 뭐 할 거야?" 공기가 무거워졌다. 우리 다 생각해본 질문이다. "취업? 근데 나이가." "프리랜서? 근데 커리어가." "또 창업? 근데 돈이." 답은 없었다. "그냥 안 망하면 되는 거 아냐?" 내가 말했다. "개논리네." 민준이가 웃었다. "근데 맞는 말 같기도." 수진이도 웃었다. 우리는 캔을 부딪쳤다. 딸각. 얇은 알루미늄 소리. "그래. 안 망하자." "건배." 집으로 가는 택시 안 12시 10분. 택시 뒷좌석. 휴대폰 확인했다. 슬랙 알림 3개. 개발팀에서 버그 리포트. 내일 아침 확인하면 된다. 아내한테 카톡 왔다. "언제 와?" "지금 가는 중" "조심히 와" 딸 사진도 보내줬다. 이불 킥오프하고 자는 모습. 화면 끄고 창밖 봤다. 한강 다리 지나간다. 오늘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 런웨이, MRR, 투자, 직원 이탈, 경쟁사. 전부 무거운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혼자 아닌 것 같아서. 나만 힘든 게 아니라서. 같이 버티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음 달 모임 날짜 단톡방에 메시지 왔다. "다음 달 셋째 주 월요일?" "ㅇㅋ" "ㄱㄱ" "+1" 나도 답장했다. "ㅇㅇ" 별 말 아닌데 중요한 약속이다. 이 모임이 없었으면, 작년에 이미 접었을 수도 있다. 수진이가 시리즈A 받기 직전에 포기하려 했을 때, 민준이가 공동창업자랑 싸워서 회사 나가려 했을 때, 하늘이가 피봇 3번째 하면서 무너졌을 때, 우리가 붙잡았다. "조금만 더." "지금 그만두면 아깝다." "다음 달에 또 보자." 그렇게 버텼다. 지금도 버티고 있다. 새벽 1시 집 도착했다. 조용히 문 열고 들어갔다. 딸은 자고 있고, 아내는 거실 소파에서 노트북 보고 있다. "왔어?" "응. 안 자?" "기다렸지." 미안했다. "동기들은 잘 있어?" "응. 다들 바쁘대." "바쁘다"는 말 속에 숨은 진짜 이야기들. 아내는 모른다. 아니, 알까? 눈치챘을 수도. "씻고 자." "응."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다음 주엔 투자사 미팅 2개. 다다음 주엔 제품 업데이트. 월말엔 또 월급날. 버텨야 한다. 동기들도 버티는데. 핸드폰 다시 켰다. 단톡방 확인했다. 민준: "오늘 고마웠어들" 수진: "ㅇㅇ 힘 났다" 하늘: "다음 달까지 살아있자" 나도 답장했다. "ㄱㄱ" 화면 껐다. 창업은 외롭다. 대표는 더 외롭다. 근데 가끔은 덜 외롭다. 이런 날 때문에.다음 달 셋째 주 월요일까지. 또 버티면 된다.
- 07 Dec, 2025
대학 동기 만남에서 '대표님~' 할 때
토요일 저녁 6시 동기 모임 단톡에 메시지가 왔다. "창업아 오늘 7시 강남 어때?" 3개월 만이다. 가야 한다. 안 가면 또 '바쁘시죠 대표님~' 소리 들을 거다.샤워하고 옷 입었다. 청바지에 후드티. 예전처럼. 근데 뭔가 맞지 않는다. 거울 속 나는 그냥 피곤해 보인다. 7시 10분 도착. 이미 5명이 와 있다. "어! 대표님 오셨네!" 시작됐다. 대표님 호칭의 무게 현우가 제일 먼저 반겼다. 대기업 과장 5년차. "대표님 요즘 어때요? 사업 잘되죠?" 대표님. 창업하기 전엔 그냥 '창업아'였다. "그냥 그래. 너는?" "저야 뭐... 회사 다니죠. 대표님처럼 멋진 일 못 하잖아요." 멋진 일. 웃긴다. 어제 새벽 3시에 현금흐름표 보면서 식은땀 흘린 건 멋진가.민수가 소주잔을 들었다. "창업이 형 대표 된 거 축하한다고! 늦었지만." 2년 반 전 일인데. 다들 잔을 들었다. 건배. 마셨다. "근데 직원 몇 명이에요 지금?" "8명." "우와... 8명 먹여 살리는 거네. 대단하다 진짜." 먹여 살린다. 그 표현이 칼처럼 박힌다. 이번 달 월급날이 5일 남았다. 통장 잔고는 6800만원. 월급이랑 4대보험, 사무실 월세, 서버비 나가면 2200만원 남는다. 다음 달 런웨이. 또 그다음 달. 성공했다는 착각 성민이가 물었다. "투자 많이 받았다며? 몇억?" "시드로 3억." "대박... 우리 연봉보다 많네." 웃음이 터졌다. 다들 부러워한다. 3억. 1년 반 전 일이다. 지금은 8개월 치 런웨이만 남았다. 프리A 투자 안 받으면 끝이다. 근데 그 얘긴 안 했다. 할 수가 없다. "요즘 매출은 어때요?" "월 천이백." "와... 월 천이백. 부럽다." MRR 1200만원. 들리는 것보단 별로다. 서버비, 마케팅비, 월세 빼면 마이너스다. 적자 운영이다. 계속 투자금 까먹는 중이다. 근데 이것도 말 안 했다.준호가 말했다. "나도 창업 할까 봐. 요즘 회사 너무 재미없어." "하지 마." 진심으로 말했다. "왜요? 대표님은 잘하시잖아요." 잘한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매일 불안하다. 투자자 미팅 때마다 떨린다. 직원들 월급날 되면 잠 못 잔다. 이게 잘하는 건가. 거리감의 정체 고기를 구웠다. 먹었다. 소주를 마셨다. 다들 자기 얘기를 했다. 회사 얘기, 승진 얘기, 연봉 얘기. 나도 웃으면서 들었다. 근데 뭔가 다르다. 예전엔 같이 욕했다. "과장 개새끼", "야근 또 시키네", "이직 할까?" 지금은 그런 얘기 안 한다. 내 앞에서. "대표님은 그런 거 없으시죠?" "야근이요? 매일 하는데." "아 그건 본인 회사니까 다르죠. 우린 남의 회사잖아요." 다르다. 맞다. 근데 왜 이렇게 외로운가.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든 거 없어요? 솔직히." 있다. 너무 많다. 어제 VC 미팅에서 또 거절당했다. "트랙션 더 보고 연락드릴게요." 지난주에 개발자 한 명이 퇴사 의사 밝혔다. 카카오에서 스카웃 왔다고. 이번 주에 경쟁사가 시리즈A 100억 받았다는 뉴스 봤다. 런웨이는 8개월밖에 안 남았다. 밤마다 '피봇해야 하나' 고민한다. 아내한테도 제대로 못 말한다. 딸이랑 놀아줄 시간도 없다. 근데 이 얘기를 어떻게 하나. "아니, 괜찮아. 재밌게 하고 있어." 웃으면서 말했다. 존경과 격리 2차는 안 갔다. "먼저 갈게. 내일 미팅 있어서." "역시 대표님은 바쁘시네요." "수고하세요!" "다음에 또 봐요!" 택시 탔다. 창밖을 봤다. 강남 거리는 밝다. 사람들이 많다. 다들 즐거워 보인다. 카톡이 왔다. 동기 단톡. "오늘 창업이 형 만나니까 좋았다" "역시 대표님 포스 대단함 ㅋㅋ"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지" 좋아요 5개. 포스. 웃긴다. 집에 도착했다. 11시. 아내랑 딸은 자고 있다. 노트북 켰다. 슬랙 확인했다. CTO가 메시지 남겼다. "내일 오전에 배포 이슈 논의 가능하신가요?" "가능. 9시 회의실." 답장 보냈다. IR 덱 파일을 열었다. 50번째 수정이다. 슬라이드 3번. "Our Traction." MRR 그래프가 올라간다. 느리지만. 이걸로 투자 받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커피 내렸다. 여섯 번째다. 오늘. 대표님이라는 이름 대표님. 동기들은 존경한다고 말한다. 부럽다고 말한다. 용기 있다고 말한다. 근데 나는 그냥 매일 불안하다. 이게 성공인지 실패인지도 모르겠다. 투자 받았으니까 성공? 아니다. 직원 8명 있으니까 성공? 그것도 아니다. 매출 나오니까 성공? 적자인데. 대표라는 직함이 나를 그들과 격리시킨다. 같이 술 마시지만 같은 얘기는 못 한다. 같이 웃지만 같은 걱정은 나누지 못한다.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벽이 된다. 예전엔 같이 야근하면서 라면 끓여 먹고 욕하던 친구들. 지금은 조심스럽게 존댓말한다. "힘내세요 대표님." 고맙다. 근데 외롭다. 새벽 1시. 스프레드시트를 본다. 보수 시나리오: 5개월 후 자금 고갈. 중립 시나리오: 3개월 내 브릿지 투자 필요. 낙관 시나리오: 2개월 내 프리A 클로징. 어느 게 현실이 될까. 모른다. 일단 내일 CTO랑 배포 이슈 논의한다. 다음 주 VC 미팅 준비한다. 그다음 주 직원들 월급 입금한다. 계속 간다. "대표님"이라고 불러도 된다. 멀게 느껴져도 된다.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대표는 외롭다. 친구들 앞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