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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진다

주말에도 노트북은 켜진다

주말에도 노트북은 켜진다

주말에도 노트북은 켜진다 토요일 오전 10시 딸이 내 무릎에 올라탄다. "아빠, 놀이터 가자."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다. IR 자료 37페이지. 투자자 미팅이 월요일이다. "응, 조금만 기다려." 세 번째 하는 말이다. 딸이 내려간다. 거실로 간다. 아내가 딸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간다. 문 닫히는 소리. 나는 타겟 마켓 사이즈를 수정한다. 3조에서 2.8조로. 보수적으로 잡는 게 낫다. 창밖을 본다. 햇빛이 좋다. 놀이터 가기 딱 좋은 날씨다. 다시 화면을 본다.런웨이 8개월 통장 잔고를 확인한다. 8개월이다. 직원 8명 월급, 사무실 월세, 서버 비용. 계산은 이미 했다. 스프레드시트에 다 있다. 시나리오 A: 프리A 투자 성공, 15억 유치. 런웨이 24개월 확보. 시나리오 B: 브릿지 투자 5억, 런웨이 14개월. 시나리오 C: 투자 실패, 3개월 후 팀 축소. C는 생각하기 싫다. 하지만 준비는 해야 한다. 월요일 미팅. 이번이 열두 번째 VC다. 지난주에 세 곳한테 거절당했다. "트랙션이 아직..." "마켓 사이즈가..." "경쟁사 대비..."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주말에도 노트북을 켠다. 37페이지를 보는 시간 MRR 그래프를 수정한다. 지난달 1200만원. 이번 달 1350만원. 성장률 12.5%. 나쁘지 않다. 하지만 충분하지도 않다. 투자자들이 원하는 건 월 30% 성장이다. 우리는 10~15% 사이를 오간다. 느리다. 알고 있다. 개발팀장한테 메시지 보낸다. "월요일 미팅 전에 데모 한 번 더 체크 부탁드립니다." 토요일 오전인데 답장이 온다. "넵, 오후에 확인하겠습니다." 미안하다. 주말인데. 하지만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딸 웃음소리가 들린다. 돌아왔나 보다. 아내가 부엌에서 점심 준비하는 소리. 나는 경쟁사 분석 슬라이드를 본다.아빠는 뭐 해? 점심을 먹는다. 딸이 묻는다. "아빠는 놀이터 안 가?" "아빠 일 있어서." "주말인데?" "응, 주말인데도 일해야 해." 딸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3살이다. 이해 못 한다. 당연하다. 아내가 말한다. "밥이나 제대로 먹어." 짜증 섞인 목소리다. 이해한다. 나도 화날 것 같다. "미안."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다. 밥을 먹는다. 맛을 모르겠다. 머릿속은 IR 자료다. 유닛 이코노믹스 슬라이드. CAC 대비 LTV 비율. 3.2:1. 괜찮은 숫자다. 하지만 페이백 기간이 14개월. 좀 길다. 딸이 내 옆에 온다. "아빠, 이따 놀아줘." "응, 조금 있다가." 거짓말이다. 오늘 못 놀아줄 거다. 알고 있다. 오후 3시의 스프레드시트 재무 모델을 본다. 3개월, 6개월, 12개월 예측. 숫자를 바꿔본다. 영업 효율을 20% 올리면? 이탈률을 5% 낮추면? 시뮬레이션한다. 계산한다. 다시 계산한다. 핸드폰이 울린다. 대학 동기다. "야, 저녁에 맥주 한 잔 어때?" "미안, 오늘 좀..." "또? 너 요즘 얼굴도 못 보겠다." "다음에. 꼭." 끊는다. 미안하다. 하지만 갈 수 없다. 창밖을 본다. 날씨가 여전히 좋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탄다. 부모들이 벤치에 앉아 있다. 웃는다. 나는 노트북을 본다.될 거다, 아마도 저녁이다. 딸이 잔다. 아내가 설거지한다. 나는 여전히 노트북 앞이다. 메시지가 온다. 개발팀장이다. "데모 체크 완료했습니다. 월요일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답장을 보낸다. IR 자료를 저장한다. 버전 47이다. 다시 연다. 뭔가 빠진 것 같다. 항상 그렇다. 아내가 옆에 선다. "언제까지 할 거야?" "조금만 더." "매번 그래." "미안." "미안하다고 해결돼?" 말이 없다. 해결 안 된다. 알고 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8개월이다. 런웨이가. 직원 8명이다. 가족들이 있다. 믿고 따라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말에도 노트북을 켠다. 딸이 '아빠 놀자'라고 해도. 날씨가 좋아도. 친구가 술 먹자고 해도. IR 자료를 본다. 38페이지. 팀 소개 슬라이드. 우리 팀 사진이 있다. 다들 웃고 있다. 나도 웃고 있다. 그때는. 저장한다. 버전 48. 밤 11시 딸 방에 들어간다. 자고 있다. 이불을 덮어준다. 머리를 쓰다듬는다. "미안해." 작게 말한다. 나온다. 거실 불을 끈다. 침대에 눕는다. 아내는 벌써 잔다. 등을 보이고. 핸드폰을 본다. 슬랙 확인. 팀 채널. 조용하다. 다들 주말 보내는 중이겠지. 투자자 리스트를 본다. 월요일 미팅. 화요일 미팅. 수요일 미팅. 될 거다. 되어야 한다. 안 되면... 생각하기 싫다.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 숫자가 떠다닌다. 8개월. 1350만원. 12.5%. 3.2:1. 잠이 안 온다. 노트북을 다시 켠다. 거실에서. 불은 끄고. 화면 불빛만 있다. 나만 있다. IR 자료를 다시 연다. 버전 48. 1페이지부터 다시 본다.주말이 지나간다. 노트북은 여전히 켜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