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도 노트북은 켜진다
- 26 Dec, 2025
주말에도 노트북은 켜진다
토요일 오전 10시
딸이 내 무릎에 올라탄다. “아빠, 놀이터 가자.”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다. IR 자료 37페이지. 투자자 미팅이 월요일이다.
“응, 조금만 기다려.” 세 번째 하는 말이다.
딸이 내려간다. 거실로 간다. 아내가 딸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간다. 문 닫히는 소리. 나는 타겟 마켓 사이즈를 수정한다. 3조에서 2.8조로. 보수적으로 잡는 게 낫다.
창밖을 본다. 햇빛이 좋다. 놀이터 가기 딱 좋은 날씨다.
다시 화면을 본다.

런웨이 8개월
통장 잔고를 확인한다. 8개월이다. 직원 8명 월급, 사무실 월세, 서버 비용. 계산은 이미 했다. 스프레드시트에 다 있다.
시나리오 A: 프리A 투자 성공, 15억 유치. 런웨이 24개월 확보. 시나리오 B: 브릿지 투자 5억, 런웨이 14개월. 시나리오 C: 투자 실패, 3개월 후 팀 축소.
C는 생각하기 싫다. 하지만 준비는 해야 한다.
월요일 미팅. 이번이 열두 번째 VC다. 지난주에 세 곳한테 거절당했다. “트랙션이 아직…” “마켓 사이즈가…” “경쟁사 대비…”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주말에도 노트북을 켠다.
37페이지를 보는 시간
MRR 그래프를 수정한다. 지난달 1200만원. 이번 달 1350만원. 성장률 12.5%. 나쁘지 않다. 하지만 충분하지도 않다.
투자자들이 원하는 건 월 30% 성장이다. 우리는 10~15% 사이를 오간다. 느리다. 알고 있다.
개발팀장한테 메시지 보낸다. “월요일 미팅 전에 데모 한 번 더 체크 부탁드립니다.” 토요일 오전인데 답장이 온다. “넵, 오후에 확인하겠습니다.”
미안하다. 주말인데. 하지만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딸 웃음소리가 들린다. 돌아왔나 보다. 아내가 부엌에서 점심 준비하는 소리. 나는 경쟁사 분석 슬라이드를 본다.

아빠는 뭐 해?
점심을 먹는다. 딸이 묻는다. “아빠는 놀이터 안 가?”
“아빠 일 있어서.”
“주말인데?”
“응, 주말인데도 일해야 해.”
딸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3살이다. 이해 못 한다. 당연하다.
아내가 말한다. “밥이나 제대로 먹어.” 짜증 섞인 목소리다. 이해한다. 나도 화날 것 같다.
“미안.”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다.
밥을 먹는다. 맛을 모르겠다. 머릿속은 IR 자료다. 유닛 이코노믹스 슬라이드. CAC 대비 LTV 비율. 3.2:1. 괜찮은 숫자다. 하지만 페이백 기간이 14개월. 좀 길다.
딸이 내 옆에 온다. “아빠, 이따 놀아줘.”
“응, 조금 있다가.”
거짓말이다. 오늘 못 놀아줄 거다. 알고 있다.
오후 3시의 스프레드시트
재무 모델을 본다. 3개월, 6개월, 12개월 예측. 숫자를 바꿔본다. 영업 효율을 20% 올리면? 이탈률을 5% 낮추면?
시뮬레이션한다. 계산한다. 다시 계산한다.
핸드폰이 울린다. 대학 동기다. “야, 저녁에 맥주 한 잔 어때?”
“미안, 오늘 좀…”
“또? 너 요즘 얼굴도 못 보겠다.”
“다음에. 꼭.”
끊는다. 미안하다. 하지만 갈 수 없다.
창밖을 본다. 날씨가 여전히 좋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탄다. 부모들이 벤치에 앉아 있다. 웃는다.
나는 노트북을 본다.

될 거다, 아마도
저녁이다. 딸이 잔다. 아내가 설거지한다. 나는 여전히 노트북 앞이다.
메시지가 온다. 개발팀장이다. “데모 체크 완료했습니다. 월요일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답장을 보낸다.
IR 자료를 저장한다. 버전 47이다. 다시 연다. 뭔가 빠진 것 같다. 항상 그렇다.
아내가 옆에 선다. “언제까지 할 거야?”
“조금만 더.”
“매번 그래.”
“미안.”
“미안하다고 해결돼?”
말이 없다. 해결 안 된다. 알고 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8개월이다. 런웨이가. 직원 8명이다. 가족들이 있다. 믿고 따라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말에도 노트북을 켠다. 딸이 ‘아빠 놀자’라고 해도. 날씨가 좋아도. 친구가 술 먹자고 해도.
IR 자료를 본다. 38페이지. 팀 소개 슬라이드. 우리 팀 사진이 있다. 다들 웃고 있다.
나도 웃고 있다. 그때는.
저장한다. 버전 48.
밤 11시
딸 방에 들어간다. 자고 있다. 이불을 덮어준다. 머리를 쓰다듬는다.
“미안해.” 작게 말한다.
나온다. 거실 불을 끈다. 침대에 눕는다. 아내는 벌써 잔다. 등을 보이고.
핸드폰을 본다. 슬랙 확인. 팀 채널. 조용하다. 다들 주말 보내는 중이겠지.
투자자 리스트를 본다. 월요일 미팅. 화요일 미팅. 수요일 미팅.
될 거다. 되어야 한다. 안 되면… 생각하기 싫다.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 숫자가 떠다닌다. 8개월. 1350만원. 12.5%. 3.2:1.
잠이 안 온다.
노트북을 다시 켠다. 거실에서. 불은 끄고.
화면 불빛만 있다. 나만 있다.
IR 자료를 다시 연다. 버전 48.
1페이지부터 다시 본다.
주말이 지나간다. 노트북은 여전히 켜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