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한테 '힘들어'라고 못 하는 이유

아내한테 '힘들어'라고 못 하는 이유

밤 11시, 집 앞 편의점

집 앞 편의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11시 23분. 아내가 잔다. 딸도 잔다. 들어가면 조용히 씻고 누워야 한다. 그 전에 여기서 맥주 하나. 500ml짜리. 4500원.

오늘 투자자 미팅이 있었다. 세 번째 만남. “트랙션은 좋은데, 번율이 아쉽네요. 조금 더 지켜보고 연락드릴게요.” 번역하면 거절이다. 알아듣는다. 이미 열두 번 들었다.

런웨이 7개월 남았다. 정확히는 214일. 매일 계산한다. 직원 8명 월급, 사무실 임대료, 서버비, 마케팅비. 합치면 월 3800만원. 매출은 1200만원. 적자 2600만원씩 쌓인다. 시드 투자금이 녹는다. 눈 녹듯이.

편의점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친다. 36살. 눈 밑이 검다. 머리는 언제 감았더라. 어제? 그제? 기억이 안 난다. 넥타이는 안 맨 지 오래다. 후드 티에 청바지. 창업가 유니폼.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묻는다. “오늘은 어땠어?” 나는 대답한다. “응, 괜찮았어.” 거짓말이다. 매일 한다.

“어땠어?”라는 질문의 무게

아내는 똑똑하다. 대기업 마케팅팀 과장. 연봉 7800만원. 우리 집 주수입이다. 내가 창업하면서 “2년만 버텨줘”라고 했다. 2년 6개월이 지났다.

아내도 힘들다. 알고 있다. 아침 7시 출근, 저녁 8시 퇴근. 주말에는 딸 돌보기. 시댁 전화도 받아야 한다. “창업이 뭐 그리 오래 걸려?” 시어머니 말씀. 아내가 대신 받는다.

“오늘은 어땠어?”

이 질문에 진짜 대답하려면. “오늘 투자 미팅 망했어. 이번 달 말까지 프리A 못 받으면 직원들 월급 못 줄 수도 있어. 런웨이 7개월 남았는데 매출 성장이 너무 느려. 경쟁사는 20억 투자받았대. 우리는 언제쯤 될까. 밤마다 현금흐름표 보면서 잠 못 자. 무섭다. 실패할 것 같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지만 못 한다.

왜냐하면.

아내도 지쳤기 때문이다. 내가 창업한다고 했을 때 아내가 말했다. “믿을게. 당신이면 할 수 있어.”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배신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대답한다. “응, 괜찮았어. 미팅 잘 됐어.” 거짓말. 매일.

숫자로 말하기

팀원들한테는 숫자로 말한다. “이번 달 MRR 8% 성장했어. 좋은 흐름이야.” “신규 고객 12개 더 늘었어. 다음 달 목표는 15개.” “번율은 아직 낮지만, 개선 중이야. 다음 스프린트에서 온보딩 UX 바꾸자.”

희망적으로 말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안 되니까. 월급 받는 사람들이다. 가족이 있다. 내 불안을 전염시킬 수 없다.

그런데 집에서는.

아내한테는 숫자로 말할 수 없다. “런웨이 7개월”이라고 하면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7개월 후엔?” “투자 못 받으면?” “직원들은?”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나도 모르니까.

그래서 애매하게 말한다. “일은 잘 되고 있어.” “투자도 긍정적이야.”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야.” 구체적이지 않은 말들. 안개 같은 대답들.

아내는 눈치챈다. 알고 있다. 그래도 더 묻지 않는다. 물으면 내가 무너질까봐. 그 배려가 더 미안하다.

새벽 3시의 계산

오늘도 새벽 3시에 눈 떴다. 슬랙 확인. 알림 없음. 다행이다. 그럼 엑셀을 켠다. 현금흐름표.

시나리오 3개를 계산한다.

보수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5%. 7개월 후 프리A 실패. 직원 5명 정리. 3명만 남기고. 사무실 축소. 공유오피스에서 집으로. 런웨이 12개월로 연장. 그럼 아내한테 뭐라고 말하지.

중립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10%. 5개월 후 프리A 성공. 10억 투자. 직원 12명으로 확대. 사무실 확장. 그럼 2년 안에 시리즈A 가능할까.

낙관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20%. 3개월 후 프리A 성공. 15억 투자. 직원 20명. 그럼… 그럼 아내한테 말할 수 있을까. “봐, 내가 했잖아.”

세 개 다 불확실하다. 숫자만 다를 뿐 전부 추측이다. 그래도 계산한다. 안 하면 더 불안하니까.

옆에서 아내가 뒤척인다. 깬 건가. 아니다. 다시 잠든다. 나는 노트북 화면 밝기를 줄인다. 계속 계산한다. 새벽 4시까지.

“괜찮아”라는 거짓말

점심시간. 팀원들이랑 같이 먹는다. 성수동 식당. 제육볶음 7500원. 8명이니까 6만원. 회사 카드로 긁는다. 법인 통장 잔고 1억 2300만원. 숫자가 줄어든다. 매일.

개발팀 막내가 묻는다. “대표님, 투자는 어떻게 돼가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잘 되고 있어. 곧 좋은 소식 있을 거야.” 팀원들이 안도한다. 밥을 먹는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이직 준비한다. 이미 한 명이 물어봤다. “혹시 투자 안 되면 어떻게 되나요?” 조심스럽게. 나는 대답했다. “걱정 마. 플랜 B도 있어.” 플랜 B는 없다.

저녁 8시. 아내한테서 카톡 온다.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언제 와?” “10시쯤?” “알았어. 조심히 와.”

10시에 못 간다. 알고 있다. 오늘도 회의가 있다. 개발팀이랑 다음 스프린트 계획. 11시까지 걸린다. 그럼 집 가는 길 편의점. 맥주 한 캔. 시간 보내기. 11시 반에 들어간다.

아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기다렸다. “왔어?” “응.” “힘들지?” “괜찮아.”

괜찮지 않다. 하지만 말한다. 괜찮다고.

왜 말 못 하나

이유를 생각해봤다. 밤마다.

첫 번째 이유: 아내도 힘들다. 내 고민까지 떠안기면 너무 무겁다. 아내는 회사 일도 있고 육아도 있고 시댁 일도 있다. 거기에 내 불안까지 더하면 무너진다.

두 번째 이유: 가장이라는 환상.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착각. 30대 중반 가장.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불안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배웠다. 아버지도 그랬다.

세 번째 이유: 실패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힘들어”라고 말하면 “창업이 잘 안 되고 있어”라고 인정하는 거다. 그럼 진짜 실패가 된다. 말로 만들고 싶지 않다.

네 번째 이유: 해결책이 없어서. 고민을 말하면 아내가 묻는다. “어떻게 할 건데?” 나는 대답 못 한다. 모르니까. 해결책 없는 고민은 그냥 하소연이다. 투덜거림이다. 남자가 그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

다섯 번째 이유: 결정을 미루고 싶어서. “힘들어”라고 말하면 대화가 이어진다. “그만둘까?” “다시 취업할까?” “직원들 정리할까?” 그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여섯 번째 이유: 미안해서. 아내를 설득해서 창업했다. “2년만 믿어줘.” 2년이 지났다. 약속을 못 지켰다. 미안하다. 그래서 더 말 못 한다.

일곱 번째 이유: 자존심. 네이버 PM 5년 하고 나왔다. 연봉 9000만원 받았다. 사람들이 말했다. “너 잘될 거야.” “능력 있잖아.” 그 기대를 저버리기 싫다. 특히 아내한테.

여덟 번째 이유: 혼자 버티는 게 익숙해서. 어릴 때부터 그랬다. 고민은 혼자 한다. 해결도 혼자 한다. 도움 청하는 거 어색하다. 그게 몸에 배었다.

진짜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다 섞인 거겠지.

아내는 알고 있다

어제 아내가 말했다. 자기 전에. 불 끄고. 어둠 속에서.

“창업 그만둬도 괜찮아.”

나는 대답 못 했다. 한참 후에 말했다. “아직 아니야. 조금만 더 해볼게.”

아내가 말했다. “힘들면 말해. 혼자 버티지 말고.”

“응. 알았어.”

거짓말이다. 또.

아내는 알고 있다. 내가 힘든 거. 숫자는 몰라도 분위기는 안다. 새벽에 깨는 것도 알고. 편의점에서 시간 보내는 것도 알고. 맥주 마시고 들어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더 묻지 않는다.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미안하다.

딸의 질문

이번 주 일요일. 드물게 집에 있었다. 딸이 물었다. 3살. 말이 트였다.

“아빠, 왜 항상 피곤해?”

나는 웃었다. “피곤한 게 아니야. 아빠 일하는 거야.”

“일은 왜 해?”

“응… 돈 벌려고.”

“돈은 왜 벌어?”

“너 키우려고. 맛있는 거 사주려고.”

딸이 말했다. “난 아빠가 같이 놀아주는 게 좋은데.”

할 말이 없었다.

3살 애가 맞는 말을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러는가. 가족을 위한다면서 가족과 시간을 못 보낸다. 딸은 자란다. 매일. 나는 그걸 놓치고 있다.

아내가 옆에서 봤다. 아무 말 안 했다. 표정으로 알았다. “봐, 나만 힘든 게 아니야. 딸도 힘들어.”

미안했다. 딸한테도. 아내한테도. 그래도 변하지 못한다. 월요일 되면 또 출근한다. 새벽 7시.

투자자 앞에서는

투자자 미팅 때는 다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저희 MRR은 매달 평균 12% 성장하고 있습니다. 번율은 현재 38%지만 다음 분기 60%까지 개선할 계획입니다. TAM은 3조 규모로 추정되며 저희가 선점할 수 있는 시장은…”

자신감 넘친다. 데이터를 보여준다. 그래프는 우상향이다. 고객 사례를 말한다. “A사는 저희 솔루션 도입 후 업무 효율 40% 개선했습니다.”

투자자가 묻는다. “경쟁사는 20억 투자받았는데 어떻게 대응할 건가요?”

나는 웃는다. “저희는 차별화된 기술력이 있습니다. 특허 출원 완료했고요. 경쟁사보다 2년 앞섰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과장이다. 2년은 아니다. 6개월쯤? 하지만 투자자 앞에서는 확신에 차서 말한다.

미팅 끝나고 나온다. 엘리베이터 탄다. 혼자.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방금까지 웃었던 얼굴. 지금은 지쳤다. 연기 끝났다.

집에 가면 또 연기한다. “괜찮아.” 회사 가면 또 연기한다. “잘 되고 있어.” 어디서도 진짜 나를 보여주지 못한다.

창업 동기 모임

한 달에 한 번. 창업 동기들 만난다. 5명. 다들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거기서만 솔직해진다.

“런웨이 얼마 남았어?” “6개월.” “나는 4개월.” “투자는?” “다 거절당했어.” “나도.”

웃는다. 쓴웃음. 그래도 웃는다. 같이 힘드니까 덜 외롭다.

한 명이 말한다. “와이프한테 말 못 하겠어. 힘들다고.” 다들 고개 끄덕인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우리 와이프는 눈치챘어. 근데 더 안 물어봐.” “그게 더 미안하지.” “맞아.”

소주 마신다. 과음하지는 않는다. 내일 또 일해야 하니까. 10시 되면 헤어진다. “다음 달에 봐.” “그래. 버티자.”

집 가는 길. 조금 덜 외롭다. 한 시간쯤. 그리고 다시 혼자다.

부모님 전화

아버지한테 전화 왔다. 일요일 저녁.

“창업 언제까지 할 거냐.”

“조금만 더요.”

“조금이 얼마냐. 벌써 2년 넘었다.”

“투자 받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투자가 그렇게 쉽게 되냐. 내가 보기엔 안 될 것 같은데.”

”…”

“다시 취업 알아봐라. 네이버 있을 때가 좋았다. 연봉도 많이 받고.”

“아버지.”

“뭐.”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하다가 망하면 어쩔 건데. 애도 있고 와이프도 있는데.”

”…”

끊었다. 예의는 아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더 듣기 싫었다.

아버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현실적이다. 합리적이다. 그래서 더 듣기 싫다. 나도 같은 생각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밤 11시 30분, 또 편의점

오늘도 편의점이다. 집 앞. 11시 30분. 아내 잔다. 딸도 잔다. 들어가야 한다. 조금만 더. 맥주 한 캔 더.

편의점 알바생이 나를 안다. “또 오셨네요.” “응.” “힘드세요?” “아니. 괜찮아.”

거짓말. 또.

창밖을 본다. 우리 집 불이 꺼져 있다. 22평. 전세 3억. 아내 회사 대출로 얻었다. 내 신용으로는 안 됐다. 창업하면서 신용등급 떨어졌다.

내년에 전세 만기다. 집값 올랐다. 3억 5000만원 될 거다. 5000만원 더 구해야 한다. 어떻게 구하지. 투자 받으면 가능하다. 못 받으면? 모르겠다.

계산한다. 또. 머릿속으로. 런웨이 214일. 일 평균 적자 86만원. 프리A 목표 금액 12억. 확률은? 30%? 40%? 모르겠다.

맥주를 마신다. 500ml. 다 마셨다. 일어난다.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는 길

현관문 연다. 조용히. 신발 벗는다. 소리 안 나게. 거실 지난다. 소파에 뭔가 있다. 이불이다. 아내가 덮어놨다. 나 챙긴 거다.

미안하다. 또.

침실 문 연다. 아내 잔다. 딸도 옆에서 잔다. 평화롭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 내가 힘들게 하고 있는 것들.

씻는다. 조용히. 눕는다. 아내 옆에. 등을 보고.

아내가 뒤척인다. 깨진 않았다. 습관적으로 내 쪽으로 몸을 기댄다. 따뜻하다.

말하고 싶다. “힘들어.” “무서워.” “잘될 수 있을까.” “도와줘.”

하지만 못 한다. 오늘도.

언젠가는 말할 것이다. 언제일까. 성공하고 나서? 아니면 실패하고 나서? 그것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눈을 감는다. 내일 또 새벽 3시에 깰 것이다. 슬랙 확인하고. 엑셀 켜고. 계산하고.

그렇게 버틴다. 오늘도.


힘들다고 말 못 하는 게 더 힘들다. 그걸 아내도 안다. 나도 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 않는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