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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해보자' - 내 입버릇이 된 말

'일단 해보자' - 내 입버릇이 된 말

"일단 해보자" - 내 입버릇이 된 말 새벽 3시의 결정 또 눈이 떴다. 3시 17분. 슬랙을 켰다. 개발팀 대화방에 불이 켜져 있다. 민준이가 아직도 코드 짜고 있나 보다. '대표님, API 응답속도 개선안 3가지 나왔습니다. 어떤 걸로 할까요?' 메시지가 2시 38분에 왔다. 읽었다. 답을 못 하고 있다. 1안은 안전하지만 효과가 적다. 2안은 효과는 좋은데 개발 기간이 2주 더 필요하다. 3안은 도박이다. 잘되면 대박인데 실패하면 롤백하는 데만 일주일. 런웨이는 8개월. 고객사는 다음 주 월요일에 데모를 본다. 투자자는 '트랙션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확신이 없다. 그런데 결정은 해야 한다. "일단 3안으로 해보자. 금요일까지 프로토타입만 돌아가게. 안 되면 그때 2안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4시 12분. 확신은 없지만 움직이는 게 답이다. 언제나 그랬다.네이버를 나온 이유 5년 전에는 달랐다. 네이버 PM 5년차. 기획서 쓰고, 개발팀이랑 조율하고, 데이터 보고, 보고서 만들고. 그때는 확신이 있을 때만 움직였다. A/B 테스트 3번 돌리고, 사용자 인터뷰 20명 하고, 경쟁사 분석 30페이지 만들고. 그다음에 '이거다' 싶으면 기획서를 냈다. 승인 과정도 길었다. 팀장, 실장, 본부장. 3단계를 거쳐야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안전했다. 월급날은 정확했고, 복지는 좋았고, 커리어는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답답했다. '이거 해보면 될 것 같은데...' '지금 시작하면 경쟁사보다 3개월 빠른데...' '사용자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그런 생각들이 기획서 검토 단계에서 죽었다. 29살 여름, 퇴사했다. 상사가 물었다. "확신 있어?" "없습니다. 근데 일단 해보려고요." 그때부터였다. 이 말이 내 입버릇이 된 게.첫 실패, 그리고 두 번째 시작 처음 만든 서비스는 망했다. 6개월 만들었다. B2C 생산성 앱. 할 일 관리하고 습관 트래킹하고 목표 설정하고. 확신이 있었다. '이건 된다.' 런칭했다. 다운로드 132개. 유지율 8%. 매출 0원. 9개월 버텼다. 안 됐다. 돈이 떨어졌다. 팀원 2명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해산했다. 32살 겨울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다시 취업할래?" "아니." "그럼?" "일단 다시 해보려고." 확신은 없었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B2B로 갔다. 기업용 업무 자동화. 시장은 작지만 명확했다. 피봇이었다. 방향을 180도 틀었다. 주변에서 물었다. "이번엔 확신 있어?" "없어. 근데 일단 해보는 거지." 3개월 만에 첫 고객사가 생겼다. 월 30만원. 그다음 달에 2개 더. 6개월 뒤 시드 투자 3억. 지금 2년 6개월차다. 망하지 않았다. 아직은.매일 아침의 불확실성 월요일 아침 8시. 팀원들이 모였다. 주간 회의. "이번 주 목표입니다." 화이트보드에 썼다. 신규 고객사 미팅 3건. 제품 업데이트 2개. 투자자 IR 1건. 영업팀 수진이가 물었다. "대표님, A사랑 계약 될 것 같아요?" 모르겠다. 지난주 미팅 분위기는 좋았다. 근데 결정권자가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2주째 답이 없다. "일단 팔로업 계속하자. 수요일에 한 번 더 전화해봐." 개발팀 민준이가 말했다. "대표님, 신기능 QA 나왔는데요. 버그가 17개예요." 많다. 목요일까지 고객사 데모인데. "심각한 거 5개만 골라. 그거 먼저 고치고 나머지는 다음 주. 일단 돌아가게만." 기획팀 지은이가 물었다. "대표님, 다음 분기 로드맵 확정해야 하는데요." 확정? 다음 달 현금흐름도 확신 못 하는데 다음 분기? "일단 초안대로 가자. 투자 들어오면 조정하고." 회의가 끝났다. 1시간. 확신한 건 하나도 없다. 근데 다들 움직인다. 그게 스타트업이다. 투자자 앞에서 IR 자료를 50번 고쳤다. 슬라이드 18장. 문제 정의, 솔루션, 시장 규모, 비즈니스 모델, 트랙션, 팀 소개, 재무 계획. 숫자를 봤다. MRR 1200만원. 성장률 월 15%. 이탈률 8%.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경쟁사 데이터는 공개 안 돼서 비교도 안 된다. VC 미팅 20개를 잡았다. 10개는 첫 미팅에서 거절당했다. '아직 이르다', '시장이 작다', '팀이 약하다'. 5개는 '보류'. '트랙션 더 보고 싶다', '다음 분기에 다시 얘기하자'. 5개는 진행 중. 2차 미팅까지 갔다. 실사 요청받았다. 화요일 오후 3시. K벤처스 파트너님 미팅. "박 대표님, 확신 있으세요? 이 시장에서 1등 할 수 있다고?" 확신? 없다. 근데 대답했다. "확신보다는 실행력이라고 봅니다. 지난 2년간 월 평균 2.3개 가설을 테스트했고, 피봇도 3번 했습니다. 틀리면 빨리 인정하고 방향 바꾸는 게 저희 강점입니다." 파트너님이 웃었다. "솔직하시네요." "일단 해보고 데이터로 판단하는 게 저희 방식입니다." 미팅이 끝났다. 1시간 30분. 결과는 모른다. 2주 뒤에 답 준다고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한숨 쉬었다. 확신 있냐고? 매일 불안한데. 그래도 움직인다. 그게 답이니까. 금요일 밤 11시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팀원들은 9시에 다 갔다. "대표님도 들어가세요." 웃으면서 "곧 간다" 했다. 노트북을 켰다. 엑셀 파일. 'Cash Flow 2024-2025'. 시나리오를 3개 만들었다. 보수: A사 계약 무산. 신규 고객 월 1개. 런웨이 6개월. 9월 파산. 중립: A사 계약 성공. 신규 고객 월 2개. 투자 실패. 런웨이 11개월. 내년 2월 위기. 낙관: A사 계약 성공. 신규 고객 월 3개. 투자 5억 유치. 런웨이 24개월. 숨통. 숫자를 봤다. 보수 시나리오 확률 30%. 중립 50%. 낙관 20%. 계산기를 두드렸다. 보수로 가면 7월부터 월급 못 줄 수도 있다. 심장이 빨라진다. 그래도. 일단 내일 출근한다. 월요일 고객사 미팅 준비한다. 화요일 개발 스프린트 회의 한다. 수요일 A사한테 전화한다. 확신은 없다. 성공할지 망할지 모른다. 근데 멈추면 확실히 망한다. 움직이면 가능성이라도 있다. 노트북을 닫았다. 집에 가자. 내일도 '일단 해보자'고 말할 거다. 그게 내 입버릇이니까. 확신 없이 걷는 법 창업한 지 2년 6개월. 확신했던 날은 하루도 없다. '이 기능이 맞을까?' 모른다. 만들어본다. 고객 반응 본다. 틀리면 고친다. '이 가격이 적정할까?' 모른다. 테스트해본다. 이탈률 본다. 조정한다. '이 사람을 뽑아야 할까?' 모른다. 일단 채용한다. 3개월 보면 안다. '투자가 들어올까?' 모른다. 계속 만난다. 거절당한다. 다시 만난다. 네이버 다닐 때는 확신이 있어야 움직였다. 지금은 반대다. 움직여야 확신이 생긴다. 아니, 확신은 안 생긴다. 그냥 다음 단계가 보인다. 그럼 된 거다. 밤 11시 47분. 집 앞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조용하다. 다들 잤나 보다. 딸 방문을 열었다. 자고 있다. 3살. 토요일에 놀아줘야지. 침대에 누웠다. 아내가 자면서 중얼거렸다. "늦었네." "응. 미안." "괜찮아. 힘들어?" "응." "그래도 할 거지?" "응. 일단 해보는 거지 뭐." 아내가 웃었다. 다시 잤다. 나도 눈을 감았다. 내일 또 '일단 해보자'고 말할 거다. 확신은 없다. 근데 괜찮다. 확신 없이 걷는 법을 배웠으니까.확신은 움직인 뒤에 온다. 아니, 안 와도 된다. 그냥 다음 발자국만 보이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