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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 13 Dec, 2025
팀원들 앞에서는 절대 불안한 티 안 낸다
오전 9시, 스탠드업 미팅 "다들 모였지? 시작하자." 회의실에 들어서면서 목소리 톤을 올린다. 어제 새벽 3시까지 런웨이 계산하느라 3시간 잤지만 티 내면 안 된다. 개발팀 김 대리가 일정 지연 보고한다. 서버 이슈. 예상했다. "괜찮아. 우선순위 조정하면 돼. 고객사 A는 다음 주로 미루고, B사 건부터 마무리하자." 차분하게 말한다. 속으론 '이번 주 데모 미팅 어떡하지' 생각하지만 표정은 관리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안 된다. 대표가 흔들리면 배가 침몰한다. 영업팀 박 과장이 신규 리드 3건 보고. 좋은 소식이다. 진심으로 웃는다. "잘했어. 이번 주 전환율 목표 달성 가능하겠는데? 모두 수고했어." 미팅 끝. 30분. 웃으면서 나온다. 화장실 가서 세면대에 손 짚고 한숨 쉰다. 5초. 다시 얼굴 올린다. 거울에 비친 내가 피곤해 보인다. 물로 얼굴 씻는다.혼자 있는 점심시간 팀원들은 다 같이 밥 먹으러 갔다. 나는 "미팅 준비해야 돼" 핑계 댔다. 사실 혼자 있고 싶었다. 회의실에 남아서 편의점 삼각김밥 뜯는다. 1300원. 노트북 열어서 스프레드시트 본다. 현금흐름표. 8개월. 정확히는 7.8개월. 다음 달 직원 월급 나가면 7.3개월. 손가락으로 셀 하나하나 계산한다. "프리A 6월까지는 받아야 하는데..." 혼잣말. VC 미팅 일정표 본다. 이번 주 2건, 다음 주 3건. 답장 안 온 곳이 7곳. '검토 중'이라던 곳은 2주째 감감무소식. 슬랙 메시지 다시 보낸다. 정중하게. "안녕하세요, 지난주 미팅 후속입니다. 추가 자료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보내고 나서 한숨. 제발 답장 오길. 삼각김밥 반밖에 못 먹었는데 목이 막힌다. 물 마신다. 창밖 본다. 성수동 거리. 사람들 바쁘게 걷는다. 나도 저렇게 보이나. 핸드폰 진동. 아내 카톡. "저녁 몇 시에 와? 서윤이가 아빠 기다려" "오늘 야근. 9시쯤? 미안"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미안하다는 말 또 하고 싶은데 그냥 하트 이모티콘 보낸다. 몇 번째 미안인지 모르겠다.오후 3시, 투자자 미팅 강남역 카페. 20분 일찍 도착했다. 항상 일찍 온다. IR 덱 마지막 점검. 51번째 버전. 슬라이드 32장. 트랙션, MAU 성장률, LTV/CAC 비율, 로드맵. 숫자 하나하나 외웠다. 투자자 들어온다. 40대 중반. 명함 교환. 정중하게 인사.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자료 봤어요. 시장 흥미롭더라고요. 설명 부탁드려요." 15분 발표. 목소리에 힘 준다. 자신감. 데이터로 보여준다. 그래프 우상향. 고객 인터뷰 인용. 팀 소개할 땐 자랑스럽게. "저희 CTO는 전 카카오 출신입니다." 사실이다. 실력 좋다. 연봉은 못 줘서 미안하지만. 질문 들어온다. "경쟁사 대비 차별점이 뭔가요?" 준비한 답변. "저희는 B2B에 특화된 UX와 온보딩 자동화에 집중했습니다. 경쟁사들은..." "번 레이트 어떻게 되죠?" "월 평균 3.2%입니다. 업계 평균 5%보다 낮고..." "시리즈A 목표는?" "30억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프리A로 5억 모집 중이고요." 대화는 30분. 분위기 나쁘지 않다. 그가 고개 끄덕인다. "검토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추가 자료 있으면 메일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악수. 웃으면서 헤어진다. 카페 나와서 지하철역까지 걷는다. 5분. 웃음 사라진다. '검토해보겠습니다.' 이 말 이제 20번째쯤 들었다. 10번은 거절이었다. 5번은 아직 답 없다. 5번은 진행 중. 이번은? 모르겠다. 지하철 타고 사무실 간다. 창밖 본다. 내 얼굴 비친다. 피곤하다. 오후 6시, 팀원과 커피 사무실 돌아오니까 디자이너 이 주임이 물어본다. "대표님 미팅 어떠셨어요?" "응, 괜찮았어. 반응 좋았어." 거짓말 아니다. 실제로 반응은 좋았다. 결과가 어떨지 모를 뿐. "다행이네요! 저희 이번 달 목표 달성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MAU 목표 5000명인데 지금 4200명이잖아. 이번 주 마케팅 캠페인 나가면 충분히 가능해. 너무 걱정하지 마." 그가 웃는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같이 커피 타러 간다. 공용 주방. 캡슐커피 넣는다. 나는 다섯 번째. 이 주임은 두 번째. 젊다. 26살. 나도 10년 전엔 저랬다. "요즘 힘든 거 없어?" "아뇨, 재밌어요. 배우는 게 많아요." 순수하다. 런웨이가 뭔지, 번 레이트가 뭔지 모른다. 그냥 좋은 제품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맞다. 내가 그 걱정 다 하면 된다. "그래, 좋은 마인드야. 계속 그렇게 해." 사무실 돌아온다. 내 자리 앉는다. 모니터 켠다. 슬랙 메시지 47개. 하나씩 답장한다. 긍정적으로. 명확하게. 팀원들이 방향 잃으면 안 된다.밤 10시, 혼자 남은 사무실 팀원들 다 퇴근했다. "먼저 가봐도 될까요?" "그래, 수고했어." 일곱 번 말했다. 여덟 번째는 내가 먼저 말했다. "오늘 일찍 들어가. 내일 봐." 이제 혼자다. 사무실 조용하다. 에어컨 소리만 들린다. 책상 불만 켜놨다. 노트북 화면 밝다. 눈 아프다. 엑셀 시트 연다. 시나리오 분석. 세 가지 버전. 보수적: 월 성장률 15%, 프리A 실패, 시드 연장 3억 추가 조달 → 런웨이 12개월 연장, 내년 3월 시리즈A 재도전. 중립적: 월 성장률 25%, 프리A 5억 성공, 6월 유치 → 런웨이 18개월, 직원 3명 추가 채용, 내년 9월 시리즈A. 낙관적: 월 성장률 35%, 프리A 7억 성공, 전략적 투자자(SI) 포함 → 런웨이 24개월, 팀 두 배, 내년 말 시리즈A 20억. 숫자 만지작거린다. 함수 고친다. 셀 색깔 바꾼다. 의미 없다. 이미 100번 계산했다. 결과는 같다. 투자 받아야 한다. 시간 없다. 핸드폰 본다. 아내 카톡. "서윤이 재웠어. 오늘도 늦네?" "응, 미안. 곧 갈게" "건강 챙겨. 너무 무리하지 마" 고맙다. 눈물 날 것 같다. 나오진 않는다. 그냥 목이 멘다. 창밖 본다. 성수동 밤 풍경. 불 켜진 건물들. 저기도 누군가 야근하겠지. 나만 힘든 건 아니다. 위안 안 된다. "될 거야." 혼잣말. 다짐인지 기도인지 모르겠다. 매일 하는 말. 믿는지도 모르겠다. 믿어야 한다. 안 믿으면 끝이다. 가방 싼다. 노트북 닫는다. 불 끈다. 사무실 나온다. 문 잠근다. 엘리베이터 기다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36살. 피곤하다. 내일 아침엔 또 웃어야 한다. 지하철 탄다. 집까지 40분. 앉아서 눈 감는다. 다음날 아침 9시 "좋은 아침! 다들 주말 잘 보냈지?" 회의실. 월요일 스탠드업. 팀원들 모였다. 나는 웃는다. 커피 들고 있다. 여섯 번째. 아니다. 첫 번째다. 집에서 마신 건 안 센다. "이번 주 목표 공유할게. 우선 MAU 5000명 달성. 둘째, B사 온보딩 완료. 셋째, 신규 리드 10건 확보. 할 수 있지?" 팀원들 고개 끄덕인다. 개발팀 김 대리가 말한다. "저희 이번 주 배포 일정 빠듯한데, 가능할까요?" "가능해. 우선순위 정리하면 돼.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말해." 자신감 있게 말한다. 어제 밤 혼자 런웨이 계산하며 한숨 쉰 건 아무도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자, 시작하자. 화이팅!" 미팅 끝. 팀원들 흩어진다. 나는 내 자리로 간다. 앉는다. 모니터 켠다. 이메일 확인한다. 어제 만난 투자자한테서 메일 왔다. "검토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상했다. 실망 안 한다. 거짓말이다. 조금 실망한다. 많이는 아니다. 익숙하다. 다음 메일 연다. 또 다른 VC. 미팅 요청. 다음 주 화요일 가능하냐고. "네, 가능합니다. 시간 조율해서 답변드리겠습니다." 답장 보낸다. 정중하게. 희망적으로. 커피 마신다. 일곱 번째. 모니터 본다. 슬랙 메시지 12개. 답장 시작한다. 혼자 있을 땐 한숨 쉰다. 미팅 땐 웃는다. 이게 내 일이다.대표가 흔들리면 배가 기운다. 그래서 나는 안 흔들리는 척한다.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