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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레드시트에
- 12 Dec, 2025
스프레드시트에 보수/중립/낙관 3가지 시나리오
새벽 2시, 스프레드시트오늘도 잠이 안 온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 보다가 결국 노트북 켰다. 시간 확인했더니 새벽 2시 17분. 아내는 옆에서 자고 있다. 딸은 아까 한 번 뒤척이더니 다시 잠들었다. 구글 시트 열었다. 파일명은 "2025 시나리오 분석 v47". 버전이 47이다. 거의 매주 수정한다는 뜻이다. 세 개 탭이 있다. 보수/중립/낙관. 항상 보수부터 본다. 최악의 경우를 먼저 봐야 마음이 편하다. 이상하지만 그렇다. 보수 시나리오 보수 시나리오는 간단하다. "모든 게 안 풀리면?"신규 고객 월 1개 (현재 2~3개) 이탈률 15% (현재 8%) 단가 인상 실패 (현재 월 150만원 → 목표 200만원) 추가 투자 실패이렇게 놓고 계산하면 런웨이가 5개월로 줄어든다. 8개월이 5개월이 된다. 5개월이면 10월이다. 10월까지 투자 못 받으면 뭘 해야 하나. 직원 절반 내보내나. 사무실 빼고 재택하나. 아니면 내 월급을 0으로 만드나. 계산기 두드린다. 4명으로 줄이면 인건비가 월 1800만원. 지금은 3200만원이니까 1400만원 아낀다. 사무실 180만원 빼면 1580만원. 그럼 런웨이가... 10개월로 늘어난다. 10개월이면 내년 3월까지 버틴다. 숫자 보면서 한숨 나온다. 근데 동시에 안도감도 든다. "최악의 경우에도 내년 3월까지는 간다." 이 문장이 위로가 된다.중립 시나리오 중립은 "지금 추세대로 가면?"이다.신규 고객 월 2개 (현재 수준 유지) 이탈률 8% (현재 수준) 단가 50% 성공 (신규는 200만원, 기존은 150만원 유지) 투자 50% 확률 (프리A 5억, 6개월 내)이 시나리오에서는 투자 못 받아도 버틴다. MRR이 서서히 오르면서 12개월 뒤에는 월 2500만원쯤 된다. 손익분기까지는 아니어도 적자폭이 줄어든다. 투자 받으면 당연히 채용한다. 개발자 2명, 세일즈 1명. 그럼 성장 속도가 빨라진다. 중립 시나리오 볼 때는 기분이 괜찮다. "할 만하네." 이런 생각 든다. 근데 이게 함정이다. 중립이 너무 낙관적일 수 있다. 시장이 생각보다 차갑다. 경쟁사가 생각보다 빠르다. 우리 제품이 생각보다 느리다. 그래서 중립 시나리오는 참고만 한다. 믿지는 않는다. 낙관 시나리오 낙관은 "모든 게 잘 풀리면?"신규 고객 월 4개 (현재의 2배) 이탈률 5% (개선) 단가 100% 성공 (전체 200만원) 투자 100% (프리A 7억, 3개월 내)이렇게 되면 12개월 뒤 MRR이 4000만원 넘는다. 손익분기 돌파한다. 팀을 15명까지 키울 수 있다. 낙관 시나리오는... 솔직히 거의 안 본다. 보면 기분은 좋은데 위험하다. 기대하게 된다. 기대하면 실망이 크다. 창업하고 배운 게 하나 있다. 기대를 낮추면 실망도 작다. 기대를 버리면 모든 게 보너스다. 그래도 가끔 본다. 힘들 때. "이렇게 될 수도 있어"라고 스스로 위로할 때. 왜 세 개나 만드나팀원들한테는 이런 거 안 보여준다. 월요일 아침 회의에서는 중립 시나리오 기반으로 얘기한다. "우리 이대로 가면 12개월 뒤 MRR 2500 찍습니다. 투자 받으면 더 빠르고요." 낙관은 절대 안 보여준다. 기대감 주면 안 된다. 실망시키기 싫다. 보수는 더더욱 안 보여준다. 팀원들 불안해한다. 불안하면 이력서 쓴다. 이력서 쓰면 집중 안 된다. 대표는 혼자 불안해야 한다. 그게 내 역할이다. 근데 이 스프레드시트 작업이 나를 살린다. 진짜다. 숫자로 정리하면 불안이 줄어든다. "막연한 불안"이 "구체적인 문제"로 바뀐다. 구체적이면 대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돈 떨어지면 어쩌지" → 막연함, 해결 불가 "5개월 뒤 런웨이 끝남, 3개월 내 투자 받거나 인건비 1400만원 줄여야 함" → 구체적, 해결 가능 스프레드시트는 나한테 지도다. 어두운 길 걸을 때 손전등이다. 투자자 미팅 전날 투자자 만나기 전날은 항상 세 시나리오 다시 본다. IR 덱에는 중립 시나리오 넣는다. 12개월 뒤 MRR 2500만원, 24개월 뒤 7000만원. 합리적인 숫자다. 근데 VC들은 낙관을 원한다. "3년 뒤 매출 100억" 이런 거. 그래서 IR 덱 마지막에 "Upside Scenario" 슬라이드 하나 넣는다. 낙관 시나리오를 조금 더 부풀린 버전. 3년 뒤 150억. 믿나요? 아니다. 근데 보여줘야 한다. 안 보여주면 "스케일 고민 안 하네"라고 생각한다. 투자자들도 안다. 저 숫자가 뻥이라는 거. 근데 필요하다. 그들도 LP한테 보고해야 하니까. 게임이다. 다들 알지만 하는 게임. 미팅 끝나고 나오면 허무하다. 근데 해야 한다. 런웨이는 안 기다려준다. 새벽 3시 지금 시간 보니까 3시 12분이다. 스프레드시트 수정 몇 개 했다. 보수 시나리오에서 이탈률 12%로 올렸다. 15%는 너무 비관적인 것 같아서. 12%면 런웨이가 6개월 나온다. 6개월. 나쁘지 않다. 중립 시나리오는 그대로 뒀다. 지금 추세가 나쁘지 않다. 이번 달 신규 고객 3개 들어왔다. 한 곳은 연 계약으로 전환 가능성 있다. 낙관 시나리오는... 그냥 꿈이다. 근데 지우지는 않는다. 가끔 필요하다. 꿈도. 파일 저장했다. "2025 시나리오 분석 v48". 노트북 덮으려다가 한 번 더 봤다. 보수 시나리오의 마지막 셀. "6개월". 속으로 중얼거렸다. "6개월이면 된다. 그때까지 뭐든 하나는 터뜨린다." 아침 7시 알람 울렸다. 4시간 잤다. 씻고 나와서 커피 내렸다. 딸이 일어나서 안아달라고 한다. 안아줬다. "아빠 졸려?"라고 묻는다. "아니, 안 졸려"라고 거짓말했다. 아내가 아침 차리면서 물었다. "어젯밤에 또 스프레드시트 봤어?" "응. 조금." "박대표님, 그거 보면 잠이 와요 안 와요?" "안 오면 보고, 보면 또 안 오고 그래." 아내가 웃었다. "미친 거 아니에요?" "미쳤지. 근데 이게 날 안정시켜." 아내는 더 이상 안 물었다. 이제 익숙하다. 내가 숫자로 불안을 다스린다는 걸 안다. 출근 준비하면서 슬랙 확인했다. 개발팀에서 어젯밤에 배포했다. 에러 없다고 한다. 좋다. 세일즈 팀에서 오늘 미팅 2건 있다고 보고했다. 하나는 데모, 하나는 클로징. 클로징 건이 성사되면 이번 달 신규 4개째다. 4개면 중립 시나리오보다 좋다. 낙관으로 가는 길이다. 현관문 나서면서 생각했다. "오늘 하루도 버티자. 숫자는 거짓말 안 한다. 시나리오는 날 배신 안 한다."최악을 계산하면 최선을 준비할 수 있다. 그게 내가 버티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