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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슬랙 알림이 울릴 때

새벽 3시, 슬랙 알림이 울릴 때

새벽 3시, 슬랙 알림이 울릴 때 알람이 울린다. 3시 12분. 눈을 뜨고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자동으로 손이 움직인다. 베개 옆 폰을 집는다. 화면이 얼굴을 때린다. 슬랙. 빨간 점. 1개. '누가 또?' 침대 옆에 아내가 자고 있다.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부럽다. 정말 부럽다. 조용히 거실로 나간다. 아이 깨울까봐 슬리퍼를 벗는다. 지나가는 방 문 살짝 열어본다. 딸이 팔 벌리고 자고 있다. 몸 짱 길어진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컸지. 거실 소파에 앉는다. 2시간 반 더 자야 출근 시간인데. 폰을 켠다. 빨간 점의 정체 개발팀 리드 김준수. 오늘 밤 9시쯤 채용공고를 들었다. 오후 미팅에서. "런웨이가 8개월이고, 투자자들이 헤드수를 봐요. 지금 인원으로는 피치 덱에 설득력이 없어서..." 당연히 의사결정이 빠르다. 스타트업의 장점이라고 했다. 팀원들 앞에서는 밝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추가 연봉. 사무실 확장 가능성. 사회보험료. 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아, 김준수가 리드하면서 누군가를 더 끌어오는 게 맞아. 신입이나 경력이나. 팀 규모 성장이 곧 스케일링이야." 슬랙 메시지. "대표님, 이 채용공고 좀 봐줄 수 있을까요? 내가 초안 작성했는데. 한 번 검토해주면..." 시간이 13분 전이다. '3시에 이걸 왜 보내지?' 다시 읽는다. "지금 보내도 괜찮을까봐서... 내일 아침 보면 어때요?" 그 뒤에 다섯 개의 이모지. 죄송함의 이모지들. 알 것 같다. 김준수는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밤 11시에 퇴근했으니까. 늦어도 자정 즈음에. 그 후로 계속 생각했을 것이다. 채용공고. IR. 트랙션. 다음 분기. 나처럼. 그래서 3시에 보냈을 거다. 자다 깼거나, 아니면 계속 일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폰을 내려놨다가 다시 집는다.3시의 의무감 회신할까. 말 그대로 반 초 정도만에 끝난다. 'ㅇㅋ 내일 아침에 보자' Enter. '읽음' 표시가 떠야 해야 마음이 놓인다. 말도 안 된다. 뭐가 어떻게 놓인단 말인가. 어차피 내일 아침에 봐야 하는 거고, 밤 3시에 확인했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건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대표'니까. 대표는 2시간 빨리 본다. 대표는 밤 3시에도 본다. 대표는 항상 온라인이다. 대표는 언제나 응답 대기 중이다. 대표는 어떤 상황에서든 '다 괜찮아'라고 말한다. 쓸데없는 심리 전쟁이다. 근데 이긴다. 항상 이긴다. 스프레드시트를 다시 켠다. 런웨이 계산 시뮬레이션. A 시나리오. 보수적. 매출 성장 없음. 인원 추가. 결과. 5개월. B 시나리오. 중립. 월 15% 성장 유지. 인원 추가. 결과. 7개월. C 시나리오. 낙관적. 월 20% 성장. 인원 추가. 신규 고객 확보. 추가 투자 체결. 결과. 무한. C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C만 가능해야 한다. 기찻길 위에 가만히 누워 있는 기분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움직이면 부술 수도 있다. 그런데 움직일 수밖에 없다. 김준수 말고도 다른 팀원들은? 영업팀은 어떻게 되나. 영업이 제대로 안 되면 채용은 무슨 채용인가. 그런데 채용을 안 하면 더 영업이 안 된다. 악순환. 이걸 누가 전해줄까. 누가 알아줄까. 아내는 몰라도 된다. 걱정만 시킬 테니까. 투자자들한테는 절대 이런 생각이 있는 척 하면 안 된다. '검토해보겠습니다'라는 거절은 '당신은 관리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피드백과 다르지 않다. 혼자다. 정확히는, 함께 있어야 하지만 혼자다. 슬랙의 중독성 시간이 간다. 3시 28분. 스프레드시트를 닫는다. 새로 켠다. 경쟁사 분석. 요즘 라운드를 본 스타트업들. 우리와 비슷한 지표. 우리와 다른 지표.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성장이 빨라?' 메모리로 다시 돌아간다. 정보량이 굉장하다. 혹은 거짓말일 수도 있다. 스타트업 업계는 거짓말 많다. 나도 IR 덱에서는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전략이면 충분히 시장을 장악할 수 있어' '우리 팀이면 가능합니다' 슬랙이 또 울린다. 4시 02분. 이번엔 영업팀이다. "대표님, 내일 고객 미팅 좀 대신 봐주실 수 있을까요? A사인데, 뭔가 이번 달 의사결정이 빨라진 것 같아서..." 아. 이건 좋은 뉴스다. 그런데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한다. 내가 뛰어야 한다는 거. 영업도 못하는 팀원들. 아니다. 못한 게 아니라 못해본 거다. 신입이 많으니까. 경험이 부족하니까. 그래서 내가 뛴다. 내일 아침 9시. A사 미팅. 오후 3시. 투자자 미팅. 저녁 6시. 개발 일정 리뷰. 이미 정해진 일정 위에 또 덮인다. '다 해야지. 뭘.'회신한다. "좋아, 내가 봐줄게. 우리 팀이 먼저 한 번 더 대면한 다음에 나랑 세 명이 함께 들어가자. 좋은 기회야." 밝게. 항상 밝게. 현실은 이거다. 내일 9시에 못 본다. 왜냐하면 난 지금 3시에도 못 자니까. 그리고 아침에 눈 떠서 이메일 50개를 봐야 한다. 그 다음에 스프레드시트 업데이트. 그 다음에 회의 준비. 9시 미팅에서 내가 밝게 웃고 있을까. 아마도. 아마도 그럴 거다. 왜냐하면 '대표'니까. 잠들지 못하는 이유 4시 30분. 컵라면을 끓인다. 물소리가 작게 들린다. 가스렌지. 밤 시간에 우리 집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 스마트폰은 계속 켜 있다. 또 뭐가 올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왔는데 못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경우의 수들이 자꾸 떠오른다. 네이버에 있을 땐 이런 게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했다. 정해진 시간에 퇴근했다. 누군가 상위 레벨에서 결정을 했고, 나는 그 아래에서 일했다. 책임감이 있었지만 이런 책임은 없었다. 이건 다른 종류의 무게다. 돈이다. 직원들의 월급이다. 내 아내의 미래고, 아이의 미래고, 부모님의 신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게 전부 내 판단에 달렸다는 거다. '피봇해야 하나?' 이 질문은 3시마다 돈다. 새벽 2시에도 돈다. 저녁 11시에도 돈다. 주말 아침에도 돈다. 지금 우리 프로덕트가 맞나. 지금 우리 마켓이 맞나. 지금 우리 팀이 맞나. 지금 우리 펀딩 전략이 맞나. 모든 게 의문이다. 그리고 모든 게 내 몫이다. 라면을 먹는다. 국물이 덜 식어서 입이 데인다. 아무 맛이 없다.아침까지 1시간 반 4시 47분. 아내가 일어나지 않을까 봐 거실 불을 끈다. 폰의 불빛만 남는다. 슬랙. 메일. 뉴스. 또 슬랙. 어떤 창업가 인터뷰를 읽다가 멈춘다. "성공의 비결은 충분한 수면과 명확한 전략이었습니다." '우리 여긴 얼마나 성공했길래.' 자조적이다. 근데 이런 마음가짐이 사람을 죽인다. 근데 죽지 않을 수가 없다. 5시 20분. 출근까지 1시간 40분. 침대로 돌아갈까. 아니다. 이제는 잠들기 어렵다. 이 상태로 누우면 더 답답하다. 그래서 그냥 여기 있다. 소파에. 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면서.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메모장 앱. 오늘의 할 일 목록.A사 고객 미팅 (09:00) - 제안서 재점검 팀 미팅 (10:30) - 일정 조정 투자자 미팅 (15:00) - IR 덱 최종 수정 개발 리뷰 (18:00) - 런웨이 시뮬레이션 공유 채용공고 검토 (따로 시간 잡기)8개월의 런웨이를 쪼개는 일정들이다. 하나하나가 번인이다. '이거 다 될까?' 음악을 켠다.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lo-fi beats for productivity' 누군가 이미 같은 시간대에 같은 상태로 음악을 만들었을 거다. 같은 새벽 3시에 깨있는 누군가. 그 누군가도 뭔가를 못 해서, 뭔가를 놓쳐서, 뭔가를 잃을까봐 깨있을 거다. 혼자가 아니라는 게 조금 낫다. 근데 별로 낫지도 않다. 5시 50분 전자 알람이 울린다. 이번엔 밤이 아니라 아침이다. 차이가 뭘까. 3시에 깨는 것과 6시에 자동으로 깨는 것. 결국 같은 잠 부족인데. 침대에서 나온다. 샤워를 한다. 거울을 본다. '피곤해 보이네.' 아내가 말한 적 있다. "왜 자꾸 짙게 보여?" "뭐, 일 때문에." "오케이..." 그 다음은 침묵이었다. 걱정하는 침묵. 더 이상 뭔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안다. 7시. 출근한다. 오피스는 비어있다. 내가 가장 먼저다. 항상 그렇다. 노트북을 켠다. 슬랙. 메일. 뉴스. '오늘도 시작된다.' 그리고 밤 11시. 퇴근한다. 혹은 퇴근했다고 치기로 한다. 집에 가서 이불을 덮는다. 새벽 3시. 또 뭔가가 울린다.내일도 똑같을 거다. 그 다음 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 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