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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의
- 22 Dec, 2025
'런웨이가...' - 대표의 가장 자주 하는 말
새벽 3시의 엑셀 또 눈이 떴다. 3시 12분. 손이 먼저 움직인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아이폰을 집는다. 슬랙을 켠다. 새 메시지는 없다. 당연하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게 나뿐이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간다. 노트북을 연다. 습관이다. 엑셀 파일 하나를 연다. 파일명은 "현금흐름_2024_v32". 버전이 32다. 그만큼 많이 봤다는 뜻이다.런웨이 8개월. 237일. 5688시간. 계산한다. 월급 5800만원. 사무실 180만원. 서버비 320만원. 마케팅 500만원. 기타 200만원. 월 7000만원 나간다. 매출은 1200만원. 적자 5800만원. 8개월이면 4억 6400만원이 증발한다. 프리A 투자 받아야 한다. 5억 받으면 런웨이가 16개월이 된다. 10억 받으면 25개월. 그 안에 시리즈A 받으면 된다. "받으면 된다." 혼자 중얼거린다. 문제는 "받으면"이다. 딸이 방에서 뒤척인다. 소리가 들린다. 깼나 싶어서 노트북을 닫을 뻔했다. 다시 조용해진다. 다행이다. 엑셀 시트를 하나 더 연다. "시나리오 분석"이라는 이름이다. 세 가지 케이스가 있다. 보수: 투자 못 받음. 런웨이 8개월 후 폐업. 중립: 3억 받음. 런웨이 13개월. 피봇 1회. 낙관: 7억 받음. 런웨이 20개월. MRR 3배 성장. 보수 시나리오는 안 봐도 안다. 8개월 후 직원들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내한테 다시 취업한다고 말하고, 부모님한테 전화한다. "죄송합니다. 접을게요." 상상하기 싫다. 다음 시트로 넘어간다. 투자자 미팅에서 "런웨이는 어느 정도 남았나요?" VC 파트너가 묻는다. IR 자료 17페이지를 보면서. "충분합니다." 나는 대답한다. 미소를 짓는다. 자신감 있게. "구체적으로요?" "현재 기준 12개월 이상입니다." 거짓말이다. 8개월인데 12개월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8개월이라고 하면 다급해 보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다급한 스타트업을 싫어한다. "MRR 성장률이 좋네요. 그런데 CAC가 조금 높은데?" "네. 초기 시장 확보 단계라서 그렇습니다. 6개월 내 30% 절감 목표입니다." 또 거짓말이다. 어떻게 절감할지 모른다. 일단 말은 한다. 자신감 있게.미팅이 끝난다. 악수한다. "좋게 검토해보겠습니다." 파트너가 말한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혼자가 된다. 미소가 사라진다. 한숨이 나온다. "좋게 검토해보겠습니다." 이 말의 뜻을 안다. "관심 없습니다"라는 뜻이다. 20번 들었다. 20번 다 그랬다. 스타벅스에 들어간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오늘 네 번째다. 자리에 앉는다. 노트북을 연다. 다음 주 미팅 IR 자료를 수정한다. "런웨이 충분함" 슬라이드를 본다. 숫자를 바꿀까 생각한다. 12개월을 14개월로? 아니면 10개월로 솔직하게? 결정하지 못한다. 일단 12개월로 놔둔다. 핸드폰이 울린다. CFO가 문자를 보냈다. "대표님 이번 달 마케팅비 오버했어요. 120만원 더 나갔어요." 120만원. 작은 돈이다. 그런데 크다. 런웨이가 하루 줄어든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답장을 보낸다. 커피를 마신다. 쓰다. 팀원들 앞에서 월요일 오전 10시. 전체 회의다. "이번 주 목표 공유하겠습니다." 나는 말한다. 화이트보드에 쓴다. "신규 고객 5개. 데모 미팅 15건. 피처 론칭 2개." 개발팀장이 손을 든다. "대표님 론칭 2개는 무리인데요. 테스트 시간이 부족해요." "해야 합니다." 내 목소리가 조금 세진다. 의도한 건 아니다. "런웨이 생각하면 빨리 가야 해요. 고객 피드백 받으면서 수정하는 거로." "런웨이요?" 팀원들이 쳐다본다. 다들 아는 단어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처음이다. 보통 숨기니까. 말이 나왔으니 어쩔 수 없다. "우리 시간이 많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8개월 남았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진다."투자 받을 거 아닌가요?" 디자이너가 묻는다. "받으려고 하는데 시간이 걸려요. 그 전에 우리가 보여줄 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빨리 론칭하자는 거죠?" 개발팀장이 말한다. "네." 회의가 끝난다. 다들 자리로 돌아간다. 평소보다 조용하다. 키보드 소리만 들린다. 내가 실수했나 싶다. 런웨이 얘기를 안 했어야 했나. 팀원들한테 압박을 준 건가.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진짜니까. 점심시간이다. 같이 밥 먹으러 간다. 근처 김치찌개집이다. 7000원짜리. "대표님 괜찮으세요?" 기획자가 묻는다. "네. 괜찮습니다." "투자 받을 수 있을까요?" "받을 겁니다." 자신감 있게 말한다. 그런데 속으로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밥을 먹는다. 김치찌개가 맵다. 밥을 말아 먹는다. 빨리 먹는다. 30분 후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아내에게 못하는 말 밤 11시에 집에 들어간다. 조용하다. 딸은 잤다. 아내는 거실 소파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다. 회사 일인가 보다. "왔어?" "응." 냉장고를 연다. 맥주가 있다. 하나 꺼낸다. 마신다. "오늘도 힘들었어?" 아내가 묻는다. "아니. 괜찮아." 거짓말이다. 힘들었다. 투자자한테 거절당했고, 팀원들한테 압박 줬고, 런웨이 계산하면서 한숨 쉬었다. 그런데 말 안 한다. 왜냐하면 아내도 힘들다는 걸 아니까. 대기업 마케터는 야근이 많다. 딸 육아도 대부분 아내가 한다. 내가 주말에도 일하니까. "너는?" 내가 묻는다. "나도 괜찮아. 내일 PT 있어서 자료 좀 보는 중." 둘 다 거짓말하고 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한다. 맥주를 다 마신다. 샤워하러 간다. 뜨거운 물을 맞는다. 5분 정도. 생각을 비운다. 그런데 안 비워진다. 런웨이 생각이 난다. 8개월. 237일. 샤워를 끝낸다. 침실로 간다. 아내는 아직 거실에 있다. 나는 침대에 눕는다. 핸드폰을 본다. 메일이 왔다. 투자자한테서. "안녕하세요 대표님. 검토 결과 저희 투자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20번째 거절이다.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천장을 본다. 숨을 쉰다. "다음 기회." 다음 기회는 없을 수도 있다. 8개월 후에는. 생각하기 싫다. 눈을 감는다. 스프레드시트의 세계 주말이다. 토요일 오전 10시. 딸이랑 놀이터에 갔어야 한다. 약속했다. 그런데 못 갔다. "아빠 일 있어. 미안해." 딸은 울었다. 아내가 데리고 나갔다. 표정이 안 좋았다. 나는 집에 혼자 있다. 노트북을 연다. 엑셀 파일을 연다. 새로운 시트를 만든다. "극한 시나리오"라는 이름을 붙인다. 만약 4개월 안에 투자 못 받으면? 계산한다. 직원을 줄인다. 8명을 5명으로. 개발 2명, 영업 1명, 나, CFO. 월 인건비 5800만원이 3600만원이 된다. 사무실을 옮긴다. 성수에서 구로로. 월세 180만원이 80만원이 된다. 마케팅을 끊는다. 500만원 절감. 이렇게 하면 월 소모가 7000만원에서 4500만원이 된다. 런웨이가 12개월이 된다. 그런데. 직원을 자르면 개발 속도가 느려진다. 제품을 못 만든다. 고객을 못 받는다. 매출이 안 는다. 투자자가 안 좋아한다. 결국 죽는다. 느리게. 이 시트를 지운다. 보기 싫다. 다른 시트를 만든다. "공격 시나리오". 만약 마케팅을 2배로 늘리면? 월 500만원을 1000만원으로. 신규 고객이 2배 늘어난다고 가정한다. MRR이 1200만원에서 2400만원이 된다. 그러면 런웨이는? 월 소모가 7500만원. 적자 5100만원. 런웨이 7개월. 1개월 줄어든다. 이것도 안 된다. 도박이다. 시트를 또 지운다. 세 번째 시트. "현실 시나리오". 아무것도 안 바꾼다. 그냥 간다. 8개월. 그 사이 투자 받는다. 받아야 한다. 받을 것이다. "받을 것이다." 혼잣말이다. 주문이다. 정오가 됐다. 배가 고프다. 냉장고를 연다. 김치가 있다. 밥을 한다. 김치만 먹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아내다. "놀이터 왔어. 딸이 아빠 생각난대." 영상통화를 켠다. 딸 얼굴이 보인다. "아빠!" 웃는다. "미안해. 다음 주에 꼭 같이 가자." "응!" 통화를 끊는다. 미안하다. 정말. 다시 노트북을 본다. 엑셀 파일이 열려 있다. 런웨이 8개월. 237일. 숫자를 바꿀 수 없다. 시간은 흐른다. 멈출 수 없다. 경쟁사 뉴스 월요일 오전. 출근했다. 슬랙에 링크가 하나 올라와 있다. 개발팀장이 공유했다. "경쟁사 A사, 시리즈B 80억 투자 유치." 기사를 연다. 읽는다. "A사는 창업 3년 만에 누적 투자 120억을 유치하며 시장 선도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월 매출 3억, 직원 40명 규모로 성장했다." 3년. 우리는 2년 6개월. 6개월 차이. 투자 120억. 우리는 3억. 매출 3억. 우리는 1200만원. 숫자가 다르다. 너무 다르다. 화가 난다. 아니 슬프다. 아니 둘 다다. "우리도 할 수 있어요." 개발팀장이 말한다. "네." 대답은 하는데 자신이 없다. A사 대표를 안다. 대학 선배다. 같이 술 마신 적도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다. 나보다 나은가? 모르겠다. 운이 좋았나? 그것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는 지금 런웨이 걱정 안 한다는 것이다. 80억 받았으니까. 3년은 더 버틸 수 있다. 나는? 8개월. 비교하기 싫다. 그런데 자꾸 비교된다. 점심시간. 밥을 먹는다. 팀원들이 A사 얘기를 한다. "저기 제품 써봤는데 별로던데요." "UI가 우리보다 못한 것 같아요." "고객 리뷰 보면 불만 많더라." 팀원들이 위로한다. 나를. 그런데 위로가 안 된다. 제품이 좋고 나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투자를 받았다는 게 중요하다. 돈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시간이 있다는 게. 밥을 먹는다. 맛이 없다. 밤의 회의실 밤 10시. 팀원들은 다 퇴근했다. CFO만 남았다. "대표님 얘기 좀 해요." CFO가 말한다. 회의실로 들어간다. 문을 닫는다. "런웨이 얘기해요." "8개월 남았어요. 아시잖아요." "네. 그런데 실제로는 6개월이에요." "뭐?" "예비비 빼면요. 갑자기 서버 터지거나 직원 한 명 더 뽑거나 하면 6개월이에요." 6개월. 180일. 계산이 틀렸다. 내가 낙관적으로 본 거다. "투자 미팅 어때요?" CFO가 묻는다. "20개 했어요. 다 거절이요." "다음 계획은?" "10개 더 잡았어요. 이번 달 안에." "가능성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해봐야죠." CFO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없다. 나도 없다. "대표님." CFO가 말한다. "최악의 경우 생각해봤어요?" "폐업?" "네." 생각해봤다. 매일 생각한다. 새벽 3시마다. "그때 가서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야 해요. 법인 정리하는 데도 시간 걸려요. 직원들 정리 해고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CFO는 항상 맞는 말을 한다. 그래서 싫다. 아니 고맙다. 복잡하다. "알겠어요. 정리해둘게요." 회의가 끝난다. CFO가 퇴근한다. 나는 남는다.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다. 불을 끈다. 어둡다. 창밖에 성수동 야경이 보인다. 불빛이 예쁘다. 저 건물들에도 스타트업이 있을 것이다. 그 대표들도 런웨이 걱정할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위로가 안 된다. 핸드폰을 꺼낸다. 엑셀 앱을 연다. 파일을 연다. 숫자를 본다. 6개월. 180일. 4320시간. 카운트다운이다. 멈출 수 없는. 투자자의 질문 수요일. VC 미팅이다. 강남역 근처 빌딩 12층. IR을 한다. 20분. 준비한 대로 말한다. 자신감 있게. 숫자를 보여준다. 성장률을 강조한다. "질문 있습니다." 파트너가 말한다. "네." "만약 투자 못 받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예상 못한 질문이다. 준비 안 했다. "...투자 받을 겁니다." "가정입니다. 만약이요." "피봇을 고려하겠습니다." "피봇해서 될까요?" "해봐야 알겠죠." 대답이 약하다. 나도 안다. "런웨이는 얼마나 남았죠?" "12개월입니다." "정말요?" 정말 아니다. 6개월이다. 그런데 말 못 한다. "네. 충분합니다." 파트너가 노트북을 본다. 뭔가 계산하는 것 같다. "대표님 월 소모 추정해보니까 7000만원 정도 되는데. 투자 받은 게 3억이고 지금 1년 반 지났으면 런웨이가 3개월 아닌가요?" 들켰다. "...매출이 있습니다. 그래서 12개월입니다." "매출로 소모 못 막잖아요. 지금 MRR이 1200만원이면." 말문이 막힌다. 파트너가 웃는다. 비웃는 게 아니다. 그냥 웃는다.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더 좋아요." "...6개월 남았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급하시죠?" "네." "그럼 밸류에이션 조정 가능하세요?" 투자받고 싶으면 지분 더 내놓으라는 뜻이다. "...검토하겠습니다." 미팅이 끝난다.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친다. 피곤해 보인다. 늙어 보인다. 36세가 46세 같다. 딸의 그림 금요일 밤. 일찍 들어갔다. 9시. 딸이 안 자고 기다렸다. "아빠!" 뛰어온다. 안아준다. 가볍다. 13킬로. "이거 봐." 딸이 종이를 보여준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다. 세 명이 있다. 큰 사람 두 명. 작은 사람 한 명. 가족이다. "우리야. 아빠 엄마 나." "예쁘다." "근데 아빠 얼굴이 좀 슬퍼." 그림을 자세히 본다. 정말 슬퍼 보인다. 입이 아래로 그어져 있다. "왜 슬프게 그렸어?" "아빠가 맨날 한숨 쉬잖아." 말이 없다. "아빠 힘들어?" 딸이 묻는다. "아니야. 안 힘들어." "거짓말. 엄마가 그랬어. 아빠 요즘 힘들대." 아내가 얘기했나 보다. 딸한테까지.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나아질 거야." "진짜?" "진짜." 거짓말이다. 모르겠다. 6개월 후 어떻게 될지. 딸을 재운다. 동화책을 읽어준다. "아기돼지 삼형제". 늑대가 나온다. 집을 부순다. 돼지들이 도망간다. 딸이 잠든다. 숨소리가 고르다. 거실로 나온다. 아내가 있다. "그림 봤어?" 아내가 묻는다. "응." "미안해. 애한테까지 티가 났나봐." "괜찮아." "안 괜찮아. 나도 알아. 요즘 너 상태." 말이 없다. "투자 안 되고 있지?" "...응." 처음 인정한다. 아내한테. "그럼 어떡하려고?"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최악의 경우 접어도 돼. 나 월급 나오잖아. 우리 살 수 있어." 눈물이 날 뻔한다. 참는다. "조금만 더 해볼게." "6개월?" "응. 6개월."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 말 안 한다. 나는 그림을 본다. 딸이 그린. 슬픈 얼굴의 아빠. 바꾸고 싶다. 웃는 얼굴로. 6개월 안에. 다시 엑셀 앞에서 토요일 새벽 4시. 또 눈이 떴다. 노트북을 연다. 엑셀을 연다. 숫자를 본다. 6개월. 180일. 4320시간. 아니다. 하루 지났다. 179일. 4296시간. 시간은 흐른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새로운 계산을 한다. 만약 다음 주 VC 미팅에서 투자 받으면? DD 2주. 계약 2주. 입금 1주. 총 5주. 그러면 런웨이가 5개월 남았을 때 돈이 들어온다. 만약 안 받으면? 다음 미팅. 또 DD. 또 계약. 시간이 간다. 3개월 남았을 때 돈이 들어올 수도. 아니면 안 들어올 수도. 만약 끝까지 안 받으면? 6개월 후. 통장 잔고 0원. 직원들 월급 못 줌. 폐업 공고. 법인 정리. 빚 청산. 그 다음은? 이력서 쓴다. 취업한다. 37세 경력단절 전 창업자. 받아주는 데 있을까. 생각하기 싫다. 시트를 하나 더 만든다. "희망 시나리오". 만약 제품이 대박나면? 입소문 난다. 고객이 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