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 투자 받고 1년 반, 여전히 돈 얘기다

시드 투자 받고 1년 반, 여전히 돈 얘기다

시드 투자 받고 1년 반, 여전히 돈 얘기다

새벽 3시, 엑셀을 켠다

또 깼다. 새벽 3시 12분.

슬랙 확인하고, 이메일 확인하고, 결국 노트북을 켠다. 오늘도 그 파일을 열었다. “캐시플로우_최종_진짜최종_v23.xlsx”

런웨이 8개월. 정확히는 247일.

직원 8명 월급 3,200만원. 사무실 월세 180만원. 서버비 120만원. 잡비 포함하면 월 소진 4,500만원. 현재 잔고 3억 6천.

계산기 두드린다. 8개월 맞다.

MRR은 1,200만원. 지난달보다 80만원 올랐다. 좋은 건가? 모르겠다. 투자자들은 “트랙션이 약하다”고 한다.

커피를 끓인다. 오늘 첫 잔. 아직 아침도 아닌데.

1년 반 전, 그날

시드 투자 받던 날 기억난다.

2023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3억 입금됐다. 아내한테 꽃 사줬다. 딸 장난감도 샀다. 팀원들이랑 고깃집 갔다.

“대표님, 이제 좀 숨통 트이겠네요!”

개발팀 막내 준석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웃었다.

“그러게. 이제 제품 개발만 집중하면 돼.”

거짓말이었다.

투자 받는 순간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3억은 많은 돈이 아니었다. 시간을 산 거다. 18개월.

처음 3개월은 괜찮았다. 개발에 집중했다. 베타 버전 나왔다. 초기 고객 5곳 확보했다.

6개월 차, 잔고 확인했다. 2억 남았다. 1억이 증발했다. 빨랐다.

9개월 차, 첫 번째 프리A 미팅 시작했다. VC 파트너가 물었다.

“MRR이 800만원이면, 성장률이…”

말을 흐렸다.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일단 트랙션 더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날 밤, 아내가 물었다.

“투자 잘됐어?”

“응, 검토 중이래.”

또 거짓말이었다.

지금, 프리A 레이스

현재 진행 중인 VC 미팅. 5곳.

  • A 펀드: 2차 미팅 대기 (3주째)
  • B 캐피탈: “시장 검증 더 필요” (사실상 거절)
  • C 벤처스: IR 자료 재요청 (7번째 수정)
  • D 인베스트먼트: 실사 진행 중 (희망 50%)
  • E 파트너스: 다음주 첫 미팅

목표 금액 10억. 최소 7억은 받아야 한다.

7억 받으면 런웨이 18개월 추가. 그때까지 PMF 찾아야 한다. 안 그러면 끝이다.

투자 IR 덱 열어본다. 53페이지. 지난주에 49페이지였다. 자꾸 늘어난다.

  • 문제 정의
  • 솔루션
  • 시장 규모
  • 비즈니스 모델
  • 트랙션
  • 팀 소개
  • 재무 계획
  • 투자 제안

다 외운다. 발표는 15분인데 준비는 100시간 했다.

어제 D 인베스트먼트 실사팀이 물었다.

“고객사 이탈률이 20%인데, 원인이 뭔가요?”

준비한 답변 나왔다.

“초기 고객사는 피봇 과정에서 이탈했습니다. 최근 3개월 신규 고객 이탈률은 5%입니다.”

숫자는 정확했다. 하지만 떨렸다.

집에 와서 아내가 물었다.

“실사 어땠어?”

“괜찮았어. 다음주에 또 보기로 했어.”

“그럼 잘된 거네?”

”…응.”

딸이 안겼다.

“아빠! 같이 놀자!”

“미안, 아빠 일 좀 해야 해.”

딸 표정 봤다. 실망했다.

방에 들어와서 노트북 켰다. 캐시플로우 파일 다시 열었다.

시나리오 A (낙관): 다음달 투자 유치 성공, 7억 확보 시나리오 B (중립): 3개월 내 투자 유치, 5억 확보
시나리오 C (보수): 6개월 지연, 브릿지 론 필요

시나리오 D는 안 만들었다. 만들기 싫었다.

돈 얘기를 하는 이유

창업 전에는 몰랐다.

스타트업이 이렇게 돈 얘기만 하는 줄.

제품 만들고, 고객 만나고, 문제 해결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맞다. 그것도 한다.

하지만 하루의 30%는 돈 얘기다.

월요일 오전, CFO 미팅. “이번 달 번률 82%입니다.”

화요일 오후, 투자자 콜. “다음 마일스톤은 언제쯤?”

수요일 저녁, 영업팀장. “이 고객사 계약하려면 2개월 무료 써보게 해야 해요.”

목요일 새벽, 혼자. 엑셀 파일. 런웨이 계산.

금요일 밤, 또 혼자. 이번엔 밸류에이션 고민.

시드 라운드 밸류에이션 30억이었다. 프리A는 80억 제시하려고 한다.

VC가 물을 거다.

“근거가 뭔가요?”

준비한 답변 있다.

“ARR 성장률, CAC 대비 LTV, 시장 점유율…”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르다.

‘그 정도는 받아야 우리가 산다.’

어젯밤 대학 동기 단톡방에 메시지 왔다.

“창업 형님들~ 요즘 잘되시죠? ㅋㅋ”

대기업 다니는 친구였다. 악의는 없었다. 그냥 궁금한 거였다.

답장 안 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잘돼!’ - 거짓말

‘힘들어’ - 오해 받음

‘보통?’ - 애매함

그냥 읽씹했다.

8개월, 충분한가

매일 계산한다.

8개월이면 뭘 할 수 있나.

  • 신규 고객 20곳 확보 (현실적?)
  • MRR 3,000만원 달성 (가능한가?)
  • 프로덕트 2.0 출시 (개발 일정 빠듯함)
  • 팀 확장 (돈 있어야 뽑음)

모순이다. 성장하려면 사람 뽑아야 하는데, 사람 뽑으면 런웨이 줄어든다.

영업팀장 민수가 지난주에 말했다.

“대표님, 영업 한 명만 더 뽑아주시면 매출 2배 만들 수 있어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못 뽑는다.

영업사원 1명 인건비 월 400만원. 연 4,800만원.

지금 뽑으면 런웨이 7개월로 줄어든다.

안 뽑으면 성장 더디다. 투자 더 어렵다.

이러나 저러나다.

밤에 민수한테 답장 보냈다.

“일단 우리가 더 뛰어보자. 조금만 기다려줘.”

미안했다. 민수도 알 거다. 돈 없다는 거.

개발팀은 또 다르다.

CTO 재훈이가 2주 전에 물었다.

“클라우드 인프라 업그레이드 해야 하는데, 예산 나올까요?”

견적 봤다. 월 200만원 추가.

“다음 분기에 검토하자.”

재훈이 표정 봤다. 실망했다.

그날 밤 재훈이한테 따로 연락했다.

“미안하다. 투자 받으면 바로 할게.”

“아니에요, 대표님. 이해해요.”

이해한다고 했지만,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팀원들 다 안다. 돈 없다는 거. 버티고 있다는 거.

그래서 더 미안하다.

숫자 뒤의 사람들

투자 유치가 안되면 어떻게 되나.

시나리오 C 실행한다.

1단계: 불필요한 지출 제거 (사무실 다운사이징, 복지 축소) 2단계: 팀 구조조정 (8명 → 5명) 3단계: 브릿지 론 (빚내서 버티기) 4단계: …

4단계는 생각 안 한다.

2단계에서 3명을 내보내야 한다.

누구를? 어떻게?

준석이? 입사 6개월. 젊고 열정 있다. 하지만 주니어다.

민수? 영업 실적 좋다. 하지만 연봉이 제일 높다.

디자이너 수진? 혼자서 모든 디자인 한다. 빼면 안 된다.

생각만 해도 잠이 안 온다.

이게 맞나. 창업이 이런 건가.

네이버 PM 할 때는 몰랐다.

팀원 구조조정 하는 게 이렇게 무거운 줄.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

준석이는 이번에 전세 계약한다고 했다.

민수는 다음달에 결혼한다.

수진이는 대출 갚고 있다.

다 안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더 투자 받아야 한다.

어제 아내가 물었다.

“당신,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 괜찮아?”

“응, 괜찮아.”

“거짓말. 얼굴에 다 써있어.”

말 없이 안겼다.

“투자 안 되면 어떡해?”

”…다시 취업하면 되지.”

“진심이야?”

대답 못 했다.

진심인지 모르겠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팀원들을…

내일도 VC 미팅이다

일정 확인한다.

내일 오후 3시, E 파트너스 첫 미팅.

IR 덱 다시 열어본다. 54페이지가 됐다. 어제 경쟁사 분석 슬라이드 추가했다.

발표 연습한다. 혼자 회의실에서.

“안녕하세요, 박창업입니다. 저희는 B2B SaaS…”

목소리 떨린다. 연습인데도.

다시.

“안녕하세요, 박창업입니다.”

좀 낫다.

핸드폰 꺼내서 녹음한다. 15분 발표 리허설.

들어본다. 어색하다. 7번 ‘음…’ 했다.

다시 연습한다.

밤 11시 넘었다. 사무실 비었다. 나만 남았다.

창밖 본다. 성수동 불빛 반짝인다. 다른 스타트업들도 저렇게 버티겠지.

누구는 성공했고, 누구는 망했고, 누구는 나처럼 버티고 있을 거다.

노트북 닫는다.

내일 VC 미팅. 또 ‘검토해보겠습니다’ 들을까. 아니면 이번엔 다를까.

모르겠다.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다.

런웨이 8개월. 아직 시간 있다.

퇴근한다. 아내랑 딸 자고 있을 거다.

조용히 들어가야지.


내일도 돈 얘기를 할 거다. 그게 내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