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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 덱 50번 수정, 아직도 모자란 기분

IR 덱 50번 수정, 아직도 모자란 기분

IR 덱 50번 수정, 아직도 모자란 기분 새벽 2시, 슬라이드 47번째 또 열었다. IR 덱. 투자자 미팅 3일 남았다. 이번이 26번째 VC다. 슬라이드 3번. "Market Size". 7조에서 12조로 바꿨다가 다시 9조로 내렸다. 숫자가 커야 관심 받지만, 너무 크면 "현실성 없다" 소리 들었다. 지난번에. 4번 슬라이드. "Traction". MRR 그래프. 떨어진 달이 하나 있다. 저번 VC가 거기만 계속 물어봤다. "왜 여기서 주춤했죠?" "일시적 이탈이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냥 전부는 아닐 뿐.커피 한 모금. 식었다. 슬라이드 8번. "Competitive Advantage". 우리만의 차별점. "AI 기반 자동화", "직관적 UI", "빠른 구축 속도". 맞는 말이다. 근데 경쟁사도 비슷한 거 쓴다. 투자자들도 안다. 그걸. 이걸 어떻게 다르게 보이게 만들지. 50번 고쳤는데 답이 안 나온다. 승률 20%, 변하지 않는 숫자 시드 투자 받을 때는 10번 만에 됐다. 프리A는 다르다. 26번 미팅. 5번 투자 검토 중. 승률 19.2%. 덱을 20번 고쳤을 때도 비슷했다. 30번 고쳤을 때도. 지금 50번인데 여전히. 문제가 덱이 아닌 건가. 트랙션이 부족한 건가. MRR 1200만원. 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프리A 치고는..." 말 끝을 흐린다. 투자자들. 시장이 안 좋은 건가. 다들 "시장 상황이..." 한다. 근데 우리 경쟁사는 최근에 30억 받았다. 결국 우리 문제다.지난주 목요일. 유명한 VC였다. 덱 넘기면서 발표했다. 15분. 연습한 대로. "시장 규모는 충분합니다. TAM 9조, SAM 2.1조..." 파트너가 끊었다. "창업자님, 솔직히 물어볼게요. 지금 번 레이트가 얼마죠?" "월 200만원 정도입니다." "6개월 전에는요?" "150만원이었습니다." 침묵. 5초 정도. "성장은 하고 계시네요. 근데 프리A 타이밍인지는 모르겠어요." 미팅 20분 만에 끝났다. 슬라이드에 없는 것들 집 가는 지하철에서 생각했다. 덱에 뭘 넣어야 하지. 뭘 빼야 하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투자자들이 보는 건 슬라이드가 아니다. 숫자 뒤의 스토리다. 창업자의 확신이다. 근데 나도 확신이 없다. 요즘. 매출은 오른다. 느리게. 고객은 만족한다. 이탈률 8%. 나쁘지 않다. 그런데 왜. 투자가 안 되지. "타이밍이 아직이다." "조금만 더 트랙션을 쌓아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 거절이다. 부드러운.사무실 돌아왔다. 새벽 3시. 슬라이드 12번. "Team". 우리 팀 사진. 개발팀장 경력 12년. 디자이너 전 카카오. 영업 2명 각각 B2B 7년차, 5년차. 좋은 팀이다. 진짜로. 근데 투자자들은 "팀은 훌륭한데요" 하고 넘어간다. 그게 다다. 덱 문제가 아니다. 확실히. 숫자만 올라가는 밤 슬라이드 3번 다시 봤다. Market Size. 9조를 11조로 올렸다. 레퍼런스 3개 더 찾았다. IDC 리포트, 가트너 자료, 국내 리서치 보고서. 근거는 충분하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가. 슬라이드 5번. 고객 케이스. "A사 업무 시간 37% 단축", "B사 월 운영비 420만원 절감". 숫자 예뻐 보이게 인포그래픽 다시 만들었다. 피그마 켜서 1시간. 그런데 이게 중요한가. 슬라이드 9번. Financial Projection. 3년 뒤 매출 50억. 5년 뒤 200억. 시나리오 3개로 만들었다. 보수적, 중립적, 낙관적. 보수적 시나리오도 사실 좀 낙관적이다. 아마. 투자자들도 안다. 이 숫자들이 희망 섞인 계산이라는 거. 그래도 넣어야 한다. 안 넣으면 "재무 계획이 없네요" 소리 들으니까. 덱은 점점 그럴듯해진다. 투자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팀원들 모르는 밤 월요일 오전. 출근했다. "대표님 주말 어떻게 보내셨어요?" "그냥 쉬었어. 너는?" 거짓말이다. IR 덱 슬라이드 6개 수정했다. 토요일 오후 4시간, 일요일 새벽 3시간. 팀원들 몰라도 된다. 아니, 알면 안 된다. 개발팀장은 모른다. 이번 달 월급 나가면 통장에 1800만원 남는다는 거. 다음 달 인건비 4200만원이라는 거. 디자이너는 모른다. 지난주 투자자가 "디자인은 좋은데 비즈니스 모델이 약하다"고 했다는 거. 영업팀은 모른다. 내가 매일 밤 현금흐름표 보면서 "8개월, 7개월, 6개월..." 세고 있다는 거. 대표는 혼자 알아야 한다. 이런 거. 그게 내 일이다. 점심 먹으면서 개발팀장이 물었다. "IR 준비 어떻게 돼가요?" "잘 되고 있어. 다음주 미팅 하나 더 잡혔어." "기대되네요!" 웃었다. 나도. 속으로는 생각했다. '이게 28번째인데 될까.' 밤마다 보는 경쟁사 뉴스 네이버 검색창. "기업용 업무 자동화". 우리 경쟁사 3개. 매일 검색한다. D사. 2주 전에 시리즈A 30억 유치. 기사 5개 떴다. "AI 기반 혁신", "폭발적 성장세", "업계 주목". 우리랑 뭐가 다른가. 솔직히 제품은 우리가 낫다. 기능도 더 많고, UI도 더 직관적이다. 고객 피드백도 우리가 좋다. 그런데 저쪽은 투자를 받았다. D사 대표 링크드인 봤다. "팀원들과 함께 이룬 성과입니다. 투자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좋아요 327개. 부럽다. 아니, 솔직히 질투 난다. E사는 3개월 전 시드 5억 받았다. 우리보다 늦게 시작했다. 트랙션도 우리보다 적다. 그런데 받았다. F사는 작년에 망했다. 런웨이 다 써서.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새벽 4시. 침대에 누워서. 아내가 옆에서 잔다. 딸도 옆방에서. 천장 본다. '덱이 문제가 아니야.' 알고 있다. 진짜 문제가 뭔지. 트랙션이 부족하다. 성장 속도가 느리다. 시장 타이밍이 안 맞다. 아니면 내가 투자자들을 설득 못 하는 거다. 덱을 100번 고쳐도 소용없다.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그래도 고친다. 내일도.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서. 51번째 수정 수요일 저녁. 사무실. 팀원들 다 퇴근했다. IR 덱 다시 열었다. 51번째. 슬라이드 1번. 제목 슬라이드. "기업의 업무 자동화를 재정의합니다." 진부하다. "생산성을 2배로 높이는 자동화 플랫폼." 흔하다. "일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애매하다. 30분 고민했다. 결국 원래대로 뒀다. 슬라이드 16번. "Why Now". "시장이 성숙했습니다", "기업들의 니즈가 높아졌습니다", "경쟁 환경이 유리합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근데 투자자 입장에서는 "그래서 왜 지금 투자해야 하는데?" 생각할 거다. 답이 없다. 이 슬라이드. 그래도 넣어야 한다. VC들이 보고 싶어 하니까. 저장했다. 버전 51. 내일 미팅에서 이걸로 간다. 모르는 척, 아는 척 목요일 오후 3시. 강남 VC 사무실. 회의실 들어갔다. 파트너 2명. "반갑습니다. 저희는..." 15분 발표. 슬라이드 18장. 버전 51. 50번 수정한 그거. 파트너가 물었다. "CAC는 얼마죠?" "고객 획득 비용은 현재 건당 68만원입니다." "LTV는요?" "평균 계약 기간 18개월 기준, 약 930만원입니다." 준비한 답이다. 예상한 질문. "그럼 유닛 이코노믹스는 괜찮네요. 근데 성장 속도가 좀..." "네, 현재는 PMF 확보에 집중하고 있고요, 3분기부터 본격적으로..." "보통 그 말 들으면 우려되거든요. 3분기까지 런웨이는 되세요?" "...네, 충분합니다." 거짓말이다. 8개월 남았다. 3분기까지는 간다. 근데 그 다음이 없다. 지금 투자 못 받으면. "일단 검토해보겠습니다. 연락드릴게요." 30분 만에 끝났다. 엘리베이터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덱 문제가 아니었어.' 혼자만 아는 숫자 사무실 돌아왔다. 오후 5시. 팀원들한테 물어봤다. "오늘 미팅 어땠어요?" "괜찮았어. 관심 있어 보이더라." 웃어줬다. 팀원들도 웃었다. 속으로는 안다. 안 될 거라는 거. 그 투자자 표정 봤다. 질문 톤 들었다. 끝날 때 악수하는 느낌 받았다. 안 된다. 27번째 탈락. 노트북 열었다. 엑셀 파일. "VC 미팅 현황" 27번 줄에 적었다. "보류 (사실상 탈락)". 승률 계산했다. 18.5%. 떨어졌다. 다음 줄에 적었다. "28. K벤처스, 11/24 목요일 오후 2시". 덱 다시 열었다. 뭘 고쳐야 하지. 아내가 모르는 밤 밤 11시. 집 도착. 딸은 잤다. 아내는 거실에 있었다. "오늘도 늦었네." "응, 미팅 있었어." "어떻게 됐어?" "잘 됐어. 긍정적이었어." 거짓말이다. 또. 아내가 물었다. "투자 언제쯤 될 것 같아?" "곧. 한두 달 안에는." 모르겠다. 진짜로. 아내 표정 봤다. 믿는 척하는 얼굴. 아내도 안다. 내가 힘들다는 거. 투자 쉽지 않다는 거. 그래도 안 물어본다. 배려인지 포기인지. 방 들어갔다. 노트북 켰다. IR 덱. 버전 51. 슬라이드 7번. "Problem & Solution". 고객들의 문제. 우리의 해법. 다 맞는 얘기다. 근데 투자자들한테는 안 먹힌다. 왜지. 새벽 1시까지 고쳤다. 슬라이드 4개. 버전 52 저장했다. 내일 또 고칠 거다. 끝나지 않는 수정 금요일 오전. 팀 회의. "이번 주 고생했어요. 다들." 개발팀 스프린트 리뷰. 신규 기능 3개 배포. 버그 12개 수정. 디자인팀 화면 개선안 발표. 전환율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영업팀 리드 8개 확보. 다음주 2건 계약 가능성 높다. 다들 잘한다. 그런데 투자는 안 된다. 회의 끝나고 개발팀장이 물었다. "대표님,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괜찮아. 신경 쓰지 마." "IR 때문인가요?" "아니야. 그냥 할 게 많아서." 거짓말. IR 때문이다. 점심 혼자 먹었다. 편의점. 휴대폰 봤다. 링크드인. 또 다른 스타트업 투자 뉴스. '축하드립니다', '응원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댓글들. 우리는 언제쯤. 오후 4시. 사무실 회의실. IR 덱 프린트했다. 52번 버전. 종이로 보면 다르게 보인다. 가끔. 슬라이드 넘기면서 봤다. 1번. 타이틀. - 괜찮다. 3번. 시장 규모. - 숫자 그럴듯하다. 5번. 트랙션. - 떨어진 달 빼고는 괜찮다. 8번. 경쟁 우위. - 약하다. 계속 약하다. 12번. 팀. - 좋다. 여기는 자신 있다. 16번. Why Now. - 여전히 애매하다. 18번. Closing. - 진부하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 그런데 뭔가 빠진 기분이다. 계속. 투자자들이 원하는 게 뭘까. 숫자? 스토리? 확신? 다 있다. 우리한테. 근데 왜 안 되지. 52번 고쳤는데. 답이 없는 밤 주말. 토요일 밤. 아내랑 딸 재웠다. 거실에 혼자 앉았다. 노트북 열었다. IR 덱. 또 열었다. 슬라이드 1번부터 18번까지 봤다. 고칠 데가 없다. 아니, 고칠 데는 있다. 항상 있다. 근데 고쳐도 똑같을 것 같다. 투자자들 반응. 20% 승률. 덱을 200번 고쳐도 20%일 것 같다. 문제는 덱이 아니다. 트랙션이다. 성장성이다. 타이밍이다. 그걸 안다. 머리로는. 근데 손은 자꾸 덱을 고친다. 다른 걸 할 수 없어서. 트랙션은 당장 못 올린다. 시간이 필요하다. 성장성은 증명해야 한다. 몇 개월 더. 타이밍은 내가 정할 수 없다. 시장이 정한다. 그래서 덱을 고친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커서 깜빡인다. 슬라이드 8번. "Competitive Advantage" 다시 쓰기 시작했다. 53번째 수정.덱은 완벽에 가까워진다. 투자는 여전히 멀다. 그래도 고친다. 54번, 55번...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