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10시

저녁 10시, 회의실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

저녁 10시, 회의실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

저녁 10시, 회의실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 혼자 남는다는 것 10시 넘었다. 팀원들 다 갔다. "대표님 먼저 가세요" 하는 소리가 제일 어색하다. 누가 먼저 가라는 건지. 나도 가고 싶다. "응, 조심히 들어가" 하고 손 흔들었다. 밝게. 리더답게. 문 닫히는 소리 세 번. 개발팀 민준이, 디자이너 수진이, 막내 기획자 예린이. 엘리베이터 소리까지 들렸다. 사무실이 조용하다.에어컨 소리만 웅웅거린다. 누군가의 자판 소리 없다. 슬랙 알림도 안 뜬다. 이제 진짜 나만의 시간이다. 회의실로 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 노트북은 그대로 뒀다. 어차피 라면 먹고 다시 볼 거다. 회의실 문을 열었다. 화이트보드에 오늘 아침 회의 때 쓴 글씨가 남아있다. "Q2 목표 MRR 2000만원". 지워야 하는데 귀찮다. 냉장고에서 생수 꺼냈다. 정수기 물은 이상하게 라면이 맛이 없다. 미신 같지만 그렇다. 서랍에 라면 3개 있었다. 신라면, 너구리, 진라면. 오늘은 신라면. 전기포트에 물 끓인다. 보글보글 소리가 크게 들린다. 낮에는 안 들리던 소리다. 3분. 타이머 맞춘다.기다리는 3분 핸드폰 본다. 슬랙 확인한다. 아무도 없다. 카톡 확인한다. 아내한테 온 메시지.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거짓말이다. 7시에 먹은 김밥 두 줄이 전부다. 그래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딸 재웠어. 아빠 보고 싶대" "미안. 주말에 놀아줄게" 이것도 거짓말일지 모른다. 토요일에 투자사 미팅 있다. 타이머가 울린다. 3분 지났다. 뚜껑 뜯는다. 김이 확 올라온다. 뜨겁다. 좋다.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면이 풀린다. 국물이 빨갛다. 첫 젓가락 후루룩. 맛있다. 이게 오늘 제일 솔직한 순간이다. 낮에는 웃었다. 투자자 앞에서, 팀원들 앞에서, 거래처 사람들 앞에서. "잘 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팀 분위기 정말 좋습니다". 다 연기다. 라면 먹을 땐 연기 안 한다. 그냥 배고픈 36살 남자다. 대표 아니다. 후루룩 또 먹는다.국물이 얼얼하다. 맵다. 땀 난다. 이마가 축축하다. 휴대폰 내려놓는다. 그냥 먹는다. 회의실 창문 밖으로 성수동 야경이 보인다. 건물에 불 켜진 곳 많다. 다들 야근하나 보다.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위로가 되나? 잘 모르겠다. 반쯤 먹었을 때 라면 반 먹었다. 국물도 반 마셨다. 핸드폰 다시 든다. 습관이다. 이메일 확인한다. 스팸 3개. VC 한 곳에서 답장 왔다. "검토 결과 공유드립니다. 현재로서는..." 그만 읽는다. 거절이다. 20번째다. 지운다. 라면 먹는다. 통장 앱 켠다. 운영계좌 잔고 6500만원. 월급 날까지 2주. 급여 4800만원. 사무실 월세 180만원. 세금 600만원. 계산한다. 남는 거 920만원. 다음 달엔 5400만원 입금될 거다. 그럼 6320만원. 다다음 달엔? 그다음 달엔? 8개월. 런웨이 8개월. 한숨 나온다. 라면 먹는다. 차가워졌다. 그래도 먹는다. 국물을 마신다 면 다 먹었다. 국물 반 남았다. 회의실 시계 본다. 10시 23분. 집 가려면 11시는 돼야 나가야 한다. 지하철 막차 시간 계산하면 그렇다. 택시 타기엔 아깝다. 1만 2천 원. 국물 마신다. 짜다. 속이 쓰릴 거다. 내일 아침 위 아플 거다. 그래도 마신다. 이게 오늘의 사치다. 3억 받았을 때 기뻤다. 팀원들이랑 고깃집 갔다. 1인당 3만 원짜리. 소주 많이 마셨다. "우리 잘될 거야" 소리쳤다. 지금은 컵라면 1500원이 사치다. 웃긴다. 웃기지도 않다. 국물 다 마셨다. 컵 바닥 보인다. 쓰레기통에 버린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휴지로 입 닦는다. 컵라면 용기 들고 탕비실 간다. 쓰레기통에 버린다. 손 씻는다. 물이 차갑다. 거울 본다. 누가 봐도 피곤한 얼굴이다. 눈 밑에 다크서클. 머리는 언제 감았더라. 그제? 모레? "괜찮아" 거울 속 나한테 말한다. "조금만 더 하면 돼"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다. 그냥 하는 말이다. 매일 하는 말이다. 회의실로 돌아온다. 노트북 들고 내 자리로 간다. 다시 일한다 모니터 켠다. 엑셀 파일 열린다. 현금흐름표다. 시나리오 세 개 있다. 보수적, 중립적, 낙관적. 보수적 시나리오 본다. 8개월 뒤 파산. 중립적 시나리오 본다. 10개월 뒤 파산. 낙관적 시나리오 본다. 12개월 뒤 손익분기점. 손가락으로 숫자 고친다. MRR 성장률 15%에서 20%로 올린다. 12개월이 10개월로 줄어든다. "이 정도면 되나" 혼잣말이다. 투자 받으면 된다. 프리A 10억만 받으면 된다. 그럼 런웨이 2년 늘어난다. 그 사이 매출 올리면 된다. 되나? 모르겠다. 키보드 친다. IR 덱 연다. 51번째 버전이다. 슬라이드 12장. "Our Traction" 페이지. 그래프 수정한다. 더 가파르게 올라가게. 거짓말은 아니다. 각도만 조정한 거다. 시계 본다. 11시 8분. 막차 놓쳤다. "아 씨..." 택시 앱 켠다. 1만 3천 원. 어쩔 수 없다. 노트북 닫는다. 가방에 넣는다. 불 끈다 사무실 불 끈다. 한쪽씩. 딸깍딸깍. 마지막 불 끄기 전에 한 번 더 돌아본다. 텅 빈 사무실. 8개 책상. 내일 아침 7시면 다시 채워질 자리들. "내일도 화이팅"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나한테? 팀원들한테? 그냥 하는 말이다. 마지막 불 끈다. 문 잠근다. 엘리베이터 탄다. 1층까지 28초.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또 본다. "괜찮아질 거야" 28번째 한 말 같다. 오늘. 택시 안 택시 탔다. 기사님이 말 안 건다. 다행이다. 창밖 본다. 한강 다리 지난다. 물에 불빛 반짝인다. 핸드폰 본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지금 가는 중" 읽음 표시 안 뜬다. 잤나 보다. 당연하다. 11시 반인데. 슬랙 확인한다. 개발팀 민준이가 30분 전에 메시지 남겼다. "대표님 PR 머지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확인 부탁드려요. 푹 쉬세요" 착하다. 고맙다. 미안하다. "고생했어. 내일 봐" 보냈다. 창밖 계속 본다. 차 많다. 다들 어디 가나. 야근 끝나고 가나. 나만 이러는 거 아니구나. 위로가 될까? 잘 모르겠다. 집 앞 집 도착했다. 요금 냈다. 1만 3500원. 팁 포함이다. 현관문 연다. 조용하다. 불 다 꺼져있다. 신발 벗는다. 부엌 간다. 물 마신다. 냉장고 문 연다. 딸이 그린 그림 붙어있다. 아빠 얼굴. 크레파스로 그렸다. 웃고 있다. 나도 웃는다. 진짜로. 방문 살짝 연다. 아내랑 딸 자고 있다. 숨소리 들린다. 문 닫는다. 거실 소파에 앉는다. 노트북 꺼낸다. 또 켠다. 현금흐름표 다시 본다.컵라면이 식어갈 때쯤, 나는 제일 솔직해진다. 그게 하루 중 유일하게 대표가 아닌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