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 Dec, 2025
시드 투자 받고 1년 반, 여전히 돈 얘기다
시드 투자 받고 1년 반, 여전히 돈 얘기다 새벽 3시, 엑셀을 켠다 또 깼다. 새벽 3시 12분. 슬랙 확인하고, 이메일 확인하고, 결국 노트북을 켠다. 오늘도 그 파일을 열었다. "캐시플로우_최종_진짜최종_v23.xlsx" 런웨이 8개월. 정확히는 247일. 직원 8명 월급 3,200만원. 사무실 월세 180만원. 서버비 120만원. 잡비 포함하면 월 소진 4,500만원. 현재 잔고 3억 6천. 계산기 두드린다. 8개월 맞다. MRR은 1,200만원. 지난달보다 80만원 올랐다. 좋은 건가? 모르겠다. 투자자들은 "트랙션이 약하다"고 한다.커피를 끓인다. 오늘 첫 잔. 아직 아침도 아닌데. 1년 반 전, 그날 시드 투자 받던 날 기억난다. 2023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3억 입금됐다. 아내한테 꽃 사줬다. 딸 장난감도 샀다. 팀원들이랑 고깃집 갔다. "대표님, 이제 좀 숨통 트이겠네요!" 개발팀 막내 준석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웃었다. "그러게. 이제 제품 개발만 집중하면 돼." 거짓말이었다. 투자 받는 순간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3억은 많은 돈이 아니었다. 시간을 산 거다. 18개월. 처음 3개월은 괜찮았다. 개발에 집중했다. 베타 버전 나왔다. 초기 고객 5곳 확보했다. 6개월 차, 잔고 확인했다. 2억 남았다. 1억이 증발했다. 빨랐다. 9개월 차, 첫 번째 프리A 미팅 시작했다. VC 파트너가 물었다. "MRR이 800만원이면, 성장률이..." 말을 흐렸다.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일단 트랙션 더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날 밤, 아내가 물었다. "투자 잘됐어?" "응, 검토 중이래." 또 거짓말이었다.지금, 프리A 레이스 현재 진행 중인 VC 미팅. 5곳.A 펀드: 2차 미팅 대기 (3주째) B 캐피탈: "시장 검증 더 필요" (사실상 거절) C 벤처스: IR 자료 재요청 (7번째 수정) D 인베스트먼트: 실사 진행 중 (희망 50%) E 파트너스: 다음주 첫 미팅목표 금액 10억. 최소 7억은 받아야 한다. 7억 받으면 런웨이 18개월 추가. 그때까지 PMF 찾아야 한다. 안 그러면 끝이다. 투자 IR 덱 열어본다. 53페이지. 지난주에 49페이지였다. 자꾸 늘어난다.문제 정의 솔루션 시장 규모 비즈니스 모델 트랙션 팀 소개 재무 계획 투자 제안다 외운다. 발표는 15분인데 준비는 100시간 했다. 어제 D 인베스트먼트 실사팀이 물었다. "고객사 이탈률이 20%인데, 원인이 뭔가요?" 준비한 답변 나왔다. "초기 고객사는 피봇 과정에서 이탈했습니다. 최근 3개월 신규 고객 이탈률은 5%입니다." 숫자는 정확했다. 하지만 떨렸다.집에 와서 아내가 물었다. "실사 어땠어?" "괜찮았어. 다음주에 또 보기로 했어." "그럼 잘된 거네?" "...응." 딸이 안겼다. "아빠! 같이 놀자!" "미안, 아빠 일 좀 해야 해." 딸 표정 봤다. 실망했다. 방에 들어와서 노트북 켰다. 캐시플로우 파일 다시 열었다. 시나리오 A (낙관): 다음달 투자 유치 성공, 7억 확보 시나리오 B (중립): 3개월 내 투자 유치, 5억 확보시나리오 C (보수): 6개월 지연, 브릿지 론 필요 시나리오 D는 안 만들었다. 만들기 싫었다. 돈 얘기를 하는 이유 창업 전에는 몰랐다. 스타트업이 이렇게 돈 얘기만 하는 줄. 제품 만들고, 고객 만나고, 문제 해결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맞다. 그것도 한다. 하지만 하루의 30%는 돈 얘기다. 월요일 오전, CFO 미팅. "이번 달 번률 82%입니다." 화요일 오후, 투자자 콜. "다음 마일스톤은 언제쯤?" 수요일 저녁, 영업팀장. "이 고객사 계약하려면 2개월 무료 써보게 해야 해요." 목요일 새벽, 혼자. 엑셀 파일. 런웨이 계산. 금요일 밤, 또 혼자. 이번엔 밸류에이션 고민. 시드 라운드 밸류에이션 30억이었다. 프리A는 80억 제시하려고 한다. VC가 물을 거다. "근거가 뭔가요?" 준비한 답변 있다. "ARR 성장률, CAC 대비 LTV, 시장 점유율..."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르다. '그 정도는 받아야 우리가 산다.' 어젯밤 대학 동기 단톡방에 메시지 왔다. "창업 형님들~ 요즘 잘되시죠? ㅋㅋ" 대기업 다니는 친구였다. 악의는 없었다. 그냥 궁금한 거였다. 답장 안 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잘돼!' - 거짓말 '힘들어' - 오해 받음 '보통?' - 애매함 그냥 읽씹했다. 8개월, 충분한가 매일 계산한다. 8개월이면 뭘 할 수 있나.신규 고객 20곳 확보 (현실적?) MRR 3,000만원 달성 (가능한가?) 프로덕트 2.0 출시 (개발 일정 빠듯함) 팀 확장 (돈 있어야 뽑음)모순이다. 성장하려면 사람 뽑아야 하는데, 사람 뽑으면 런웨이 줄어든다. 영업팀장 민수가 지난주에 말했다. "대표님, 영업 한 명만 더 뽑아주시면 매출 2배 만들 수 있어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못 뽑는다. 영업사원 1명 인건비 월 400만원. 연 4,800만원. 지금 뽑으면 런웨이 7개월로 줄어든다. 안 뽑으면 성장 더디다. 투자 더 어렵다. 이러나 저러나다. 밤에 민수한테 답장 보냈다. "일단 우리가 더 뛰어보자. 조금만 기다려줘." 미안했다. 민수도 알 거다. 돈 없다는 거. 개발팀은 또 다르다. CTO 재훈이가 2주 전에 물었다. "클라우드 인프라 업그레이드 해야 하는데, 예산 나올까요?" 견적 봤다. 월 200만원 추가. "다음 분기에 검토하자." 재훈이 표정 봤다. 실망했다. 그날 밤 재훈이한테 따로 연락했다. "미안하다. 투자 받으면 바로 할게." "아니에요, 대표님. 이해해요." 이해한다고 했지만,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팀원들 다 안다. 돈 없다는 거. 버티고 있다는 거. 그래서 더 미안하다. 숫자 뒤의 사람들 투자 유치가 안되면 어떻게 되나. 시나리오 C 실행한다. 1단계: 불필요한 지출 제거 (사무실 다운사이징, 복지 축소) 2단계: 팀 구조조정 (8명 → 5명) 3단계: 브릿지 론 (빚내서 버티기) 4단계: ... 4단계는 생각 안 한다. 2단계에서 3명을 내보내야 한다. 누구를? 어떻게? 준석이? 입사 6개월. 젊고 열정 있다. 하지만 주니어다. 민수? 영업 실적 좋다. 하지만 연봉이 제일 높다. 디자이너 수진? 혼자서 모든 디자인 한다. 빼면 안 된다. 생각만 해도 잠이 안 온다. 이게 맞나. 창업이 이런 건가. 네이버 PM 할 때는 몰랐다. 팀원 구조조정 하는 게 이렇게 무거운 줄.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 준석이는 이번에 전세 계약한다고 했다. 민수는 다음달에 결혼한다. 수진이는 대출 갚고 있다. 다 안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더 투자 받아야 한다. 어제 아내가 물었다. "당신,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 괜찮아?" "응, 괜찮아." "거짓말. 얼굴에 다 써있어." 말 없이 안겼다. "투자 안 되면 어떡해?" "...다시 취업하면 되지." "진심이야?" 대답 못 했다. 진심인지 모르겠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팀원들을... 내일도 VC 미팅이다 일정 확인한다. 내일 오후 3시, E 파트너스 첫 미팅. IR 덱 다시 열어본다. 54페이지가 됐다. 어제 경쟁사 분석 슬라이드 추가했다. 발표 연습한다. 혼자 회의실에서. "안녕하세요, 박창업입니다. 저희는 B2B SaaS..." 목소리 떨린다. 연습인데도. 다시. "안녕하세요, 박창업입니다." 좀 낫다. 핸드폰 꺼내서 녹음한다. 15분 발표 리허설. 들어본다. 어색하다. 7번 '음...' 했다. 다시 연습한다. 밤 11시 넘었다. 사무실 비었다. 나만 남았다. 창밖 본다. 성수동 불빛 반짝인다. 다른 스타트업들도 저렇게 버티겠지. 누구는 성공했고, 누구는 망했고, 누구는 나처럼 버티고 있을 거다. 노트북 닫는다. 내일 VC 미팅. 또 '검토해보겠습니다' 들을까. 아니면 이번엔 다를까. 모르겠다.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다. 런웨이 8개월. 아직 시간 있다. 퇴근한다. 아내랑 딸 자고 있을 거다. 조용히 들어가야지.내일도 돈 얘기를 할 거다. 그게 내 일이니까.
- 07 Dec, 2025
대학 동기 만남에서 '대표님~' 할 때
토요일 저녁 6시 동기 모임 단톡에 메시지가 왔다. "창업아 오늘 7시 강남 어때?" 3개월 만이다. 가야 한다. 안 가면 또 '바쁘시죠 대표님~' 소리 들을 거다.샤워하고 옷 입었다. 청바지에 후드티. 예전처럼. 근데 뭔가 맞지 않는다. 거울 속 나는 그냥 피곤해 보인다. 7시 10분 도착. 이미 5명이 와 있다. "어! 대표님 오셨네!" 시작됐다. 대표님 호칭의 무게 현우가 제일 먼저 반겼다. 대기업 과장 5년차. "대표님 요즘 어때요? 사업 잘되죠?" 대표님. 창업하기 전엔 그냥 '창업아'였다. "그냥 그래. 너는?" "저야 뭐... 회사 다니죠. 대표님처럼 멋진 일 못 하잖아요." 멋진 일. 웃긴다. 어제 새벽 3시에 현금흐름표 보면서 식은땀 흘린 건 멋진가.민수가 소주잔을 들었다. "창업이 형 대표 된 거 축하한다고! 늦었지만." 2년 반 전 일인데. 다들 잔을 들었다. 건배. 마셨다. "근데 직원 몇 명이에요 지금?" "8명." "우와... 8명 먹여 살리는 거네. 대단하다 진짜." 먹여 살린다. 그 표현이 칼처럼 박힌다. 이번 달 월급날이 5일 남았다. 통장 잔고는 6800만원. 월급이랑 4대보험, 사무실 월세, 서버비 나가면 2200만원 남는다. 다음 달 런웨이. 또 그다음 달. 성공했다는 착각 성민이가 물었다. "투자 많이 받았다며? 몇억?" "시드로 3억." "대박... 우리 연봉보다 많네." 웃음이 터졌다. 다들 부러워한다. 3억. 1년 반 전 일이다. 지금은 8개월 치 런웨이만 남았다. 프리A 투자 안 받으면 끝이다. 근데 그 얘긴 안 했다. 할 수가 없다. "요즘 매출은 어때요?" "월 천이백." "와... 월 천이백. 부럽다." MRR 1200만원. 들리는 것보단 별로다. 서버비, 마케팅비, 월세 빼면 마이너스다. 적자 운영이다. 계속 투자금 까먹는 중이다. 근데 이것도 말 안 했다.준호가 말했다. "나도 창업 할까 봐. 요즘 회사 너무 재미없어." "하지 마." 진심으로 말했다. "왜요? 대표님은 잘하시잖아요." 잘한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매일 불안하다. 투자자 미팅 때마다 떨린다. 직원들 월급날 되면 잠 못 잔다. 이게 잘하는 건가. 거리감의 정체 고기를 구웠다. 먹었다. 소주를 마셨다. 다들 자기 얘기를 했다. 회사 얘기, 승진 얘기, 연봉 얘기. 나도 웃으면서 들었다. 근데 뭔가 다르다. 예전엔 같이 욕했다. "과장 개새끼", "야근 또 시키네", "이직 할까?" 지금은 그런 얘기 안 한다. 내 앞에서. "대표님은 그런 거 없으시죠?" "야근이요? 매일 하는데." "아 그건 본인 회사니까 다르죠. 우린 남의 회사잖아요." 다르다. 맞다. 근데 왜 이렇게 외로운가.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든 거 없어요? 솔직히." 있다. 너무 많다. 어제 VC 미팅에서 또 거절당했다. "트랙션 더 보고 연락드릴게요." 지난주에 개발자 한 명이 퇴사 의사 밝혔다. 카카오에서 스카웃 왔다고. 이번 주에 경쟁사가 시리즈A 100억 받았다는 뉴스 봤다. 런웨이는 8개월밖에 안 남았다. 밤마다 '피봇해야 하나' 고민한다. 아내한테도 제대로 못 말한다. 딸이랑 놀아줄 시간도 없다. 근데 이 얘기를 어떻게 하나. "아니, 괜찮아. 재밌게 하고 있어." 웃으면서 말했다. 존경과 격리 2차는 안 갔다. "먼저 갈게. 내일 미팅 있어서." "역시 대표님은 바쁘시네요." "수고하세요!" "다음에 또 봐요!" 택시 탔다. 창밖을 봤다. 강남 거리는 밝다. 사람들이 많다. 다들 즐거워 보인다. 카톡이 왔다. 동기 단톡. "오늘 창업이 형 만나니까 좋았다" "역시 대표님 포스 대단함 ㅋㅋ"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지" 좋아요 5개. 포스. 웃긴다. 집에 도착했다. 11시. 아내랑 딸은 자고 있다. 노트북 켰다. 슬랙 확인했다. CTO가 메시지 남겼다. "내일 오전에 배포 이슈 논의 가능하신가요?" "가능. 9시 회의실." 답장 보냈다. IR 덱 파일을 열었다. 50번째 수정이다. 슬라이드 3번. "Our Traction." MRR 그래프가 올라간다. 느리지만. 이걸로 투자 받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커피 내렸다. 여섯 번째다. 오늘. 대표님이라는 이름 대표님. 동기들은 존경한다고 말한다. 부럽다고 말한다. 용기 있다고 말한다. 근데 나는 그냥 매일 불안하다. 이게 성공인지 실패인지도 모르겠다. 투자 받았으니까 성공? 아니다. 직원 8명 있으니까 성공? 그것도 아니다. 매출 나오니까 성공? 적자인데. 대표라는 직함이 나를 그들과 격리시킨다. 같이 술 마시지만 같은 얘기는 못 한다. 같이 웃지만 같은 걱정은 나누지 못한다.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벽이 된다. 예전엔 같이 야근하면서 라면 끓여 먹고 욕하던 친구들. 지금은 조심스럽게 존댓말한다. "힘내세요 대표님." 고맙다. 근데 외롭다. 새벽 1시. 스프레드시트를 본다. 보수 시나리오: 5개월 후 자금 고갈. 중립 시나리오: 3개월 내 브릿지 투자 필요. 낙관 시나리오: 2개월 내 프리A 클로징. 어느 게 현실이 될까. 모른다. 일단 내일 CTO랑 배포 이슈 논의한다. 다음 주 VC 미팅 준비한다. 그다음 주 직원들 월급 입금한다. 계속 간다. "대표님"이라고 불러도 된다. 멀게 느껴져도 된다.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대표는 외롭다. 친구들 앞에서도.
- 06 Dec, 2025
IR 덱 50번 수정, 아직도 모자란 기분
IR 덱 50번 수정, 아직도 모자란 기분 새벽 2시, 슬라이드 47번째 또 열었다. IR 덱. 투자자 미팅 3일 남았다. 이번이 26번째 VC다. 슬라이드 3번. "Market Size". 7조에서 12조로 바꿨다가 다시 9조로 내렸다. 숫자가 커야 관심 받지만, 너무 크면 "현실성 없다" 소리 들었다. 지난번에. 4번 슬라이드. "Traction". MRR 그래프. 떨어진 달이 하나 있다. 저번 VC가 거기만 계속 물어봤다. "왜 여기서 주춤했죠?" "일시적 이탈이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냥 전부는 아닐 뿐.커피 한 모금. 식었다. 슬라이드 8번. "Competitive Advantage". 우리만의 차별점. "AI 기반 자동화", "직관적 UI", "빠른 구축 속도". 맞는 말이다. 근데 경쟁사도 비슷한 거 쓴다. 투자자들도 안다. 그걸. 이걸 어떻게 다르게 보이게 만들지. 50번 고쳤는데 답이 안 나온다. 승률 20%, 변하지 않는 숫자 시드 투자 받을 때는 10번 만에 됐다. 프리A는 다르다. 26번 미팅. 5번 투자 검토 중. 승률 19.2%. 덱을 20번 고쳤을 때도 비슷했다. 30번 고쳤을 때도. 지금 50번인데 여전히. 문제가 덱이 아닌 건가. 트랙션이 부족한 건가. MRR 1200만원. 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프리A 치고는..." 말 끝을 흐린다. 투자자들. 시장이 안 좋은 건가. 다들 "시장 상황이..." 한다. 근데 우리 경쟁사는 최근에 30억 받았다. 결국 우리 문제다.지난주 목요일. 유명한 VC였다. 덱 넘기면서 발표했다. 15분. 연습한 대로. "시장 규모는 충분합니다. TAM 9조, SAM 2.1조..." 파트너가 끊었다. "창업자님, 솔직히 물어볼게요. 지금 번 레이트가 얼마죠?" "월 200만원 정도입니다." "6개월 전에는요?" "150만원이었습니다." 침묵. 5초 정도. "성장은 하고 계시네요. 근데 프리A 타이밍인지는 모르겠어요." 미팅 20분 만에 끝났다. 슬라이드에 없는 것들 집 가는 지하철에서 생각했다. 덱에 뭘 넣어야 하지. 뭘 빼야 하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투자자들이 보는 건 슬라이드가 아니다. 숫자 뒤의 스토리다. 창업자의 확신이다. 근데 나도 확신이 없다. 요즘. 매출은 오른다. 느리게. 고객은 만족한다. 이탈률 8%. 나쁘지 않다. 그런데 왜. 투자가 안 되지. "타이밍이 아직이다." "조금만 더 트랙션을 쌓아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 거절이다. 부드러운.사무실 돌아왔다. 새벽 3시. 슬라이드 12번. "Team". 우리 팀 사진. 개발팀장 경력 12년. 디자이너 전 카카오. 영업 2명 각각 B2B 7년차, 5년차. 좋은 팀이다. 진짜로. 근데 투자자들은 "팀은 훌륭한데요" 하고 넘어간다. 그게 다다. 덱 문제가 아니다. 확실히. 숫자만 올라가는 밤 슬라이드 3번 다시 봤다. Market Size. 9조를 11조로 올렸다. 레퍼런스 3개 더 찾았다. IDC 리포트, 가트너 자료, 국내 리서치 보고서. 근거는 충분하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가. 슬라이드 5번. 고객 케이스. "A사 업무 시간 37% 단축", "B사 월 운영비 420만원 절감". 숫자 예뻐 보이게 인포그래픽 다시 만들었다. 피그마 켜서 1시간. 그런데 이게 중요한가. 슬라이드 9번. Financial Projection. 3년 뒤 매출 50억. 5년 뒤 200억. 시나리오 3개로 만들었다. 보수적, 중립적, 낙관적. 보수적 시나리오도 사실 좀 낙관적이다. 아마. 투자자들도 안다. 이 숫자들이 희망 섞인 계산이라는 거. 그래도 넣어야 한다. 안 넣으면 "재무 계획이 없네요" 소리 들으니까. 덱은 점점 그럴듯해진다. 투자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팀원들 모르는 밤 월요일 오전. 출근했다. "대표님 주말 어떻게 보내셨어요?" "그냥 쉬었어. 너는?" 거짓말이다. IR 덱 슬라이드 6개 수정했다. 토요일 오후 4시간, 일요일 새벽 3시간. 팀원들 몰라도 된다. 아니, 알면 안 된다. 개발팀장은 모른다. 이번 달 월급 나가면 통장에 1800만원 남는다는 거. 다음 달 인건비 4200만원이라는 거. 디자이너는 모른다. 지난주 투자자가 "디자인은 좋은데 비즈니스 모델이 약하다"고 했다는 거. 영업팀은 모른다. 내가 매일 밤 현금흐름표 보면서 "8개월, 7개월, 6개월..." 세고 있다는 거. 대표는 혼자 알아야 한다. 이런 거. 그게 내 일이다. 점심 먹으면서 개발팀장이 물었다. "IR 준비 어떻게 돼가요?" "잘 되고 있어. 다음주 미팅 하나 더 잡혔어." "기대되네요!" 웃었다. 나도. 속으로는 생각했다. '이게 28번째인데 될까.' 밤마다 보는 경쟁사 뉴스 네이버 검색창. "기업용 업무 자동화". 우리 경쟁사 3개. 매일 검색한다. D사. 2주 전에 시리즈A 30억 유치. 기사 5개 떴다. "AI 기반 혁신", "폭발적 성장세", "업계 주목". 우리랑 뭐가 다른가. 솔직히 제품은 우리가 낫다. 기능도 더 많고, UI도 더 직관적이다. 고객 피드백도 우리가 좋다. 그런데 저쪽은 투자를 받았다. D사 대표 링크드인 봤다. "팀원들과 함께 이룬 성과입니다. 투자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좋아요 327개. 부럽다. 아니, 솔직히 질투 난다. E사는 3개월 전 시드 5억 받았다. 우리보다 늦게 시작했다. 트랙션도 우리보다 적다. 그런데 받았다. F사는 작년에 망했다. 런웨이 다 써서.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새벽 4시. 침대에 누워서. 아내가 옆에서 잔다. 딸도 옆방에서. 천장 본다. '덱이 문제가 아니야.' 알고 있다. 진짜 문제가 뭔지. 트랙션이 부족하다. 성장 속도가 느리다. 시장 타이밍이 안 맞다. 아니면 내가 투자자들을 설득 못 하는 거다. 덱을 100번 고쳐도 소용없다.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그래도 고친다. 내일도.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서. 51번째 수정 수요일 저녁. 사무실. 팀원들 다 퇴근했다. IR 덱 다시 열었다. 51번째. 슬라이드 1번. 제목 슬라이드. "기업의 업무 자동화를 재정의합니다." 진부하다. "생산성을 2배로 높이는 자동화 플랫폼." 흔하다. "일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애매하다. 30분 고민했다. 결국 원래대로 뒀다. 슬라이드 16번. "Why Now". "시장이 성숙했습니다", "기업들의 니즈가 높아졌습니다", "경쟁 환경이 유리합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근데 투자자 입장에서는 "그래서 왜 지금 투자해야 하는데?" 생각할 거다. 답이 없다. 이 슬라이드. 그래도 넣어야 한다. VC들이 보고 싶어 하니까. 저장했다. 버전 51. 내일 미팅에서 이걸로 간다. 모르는 척, 아는 척 목요일 오후 3시. 강남 VC 사무실. 회의실 들어갔다. 파트너 2명. "반갑습니다. 저희는..." 15분 발표. 슬라이드 18장. 버전 51. 50번 수정한 그거. 파트너가 물었다. "CAC는 얼마죠?" "고객 획득 비용은 현재 건당 68만원입니다." "LTV는요?" "평균 계약 기간 18개월 기준, 약 930만원입니다." 준비한 답이다. 예상한 질문. "그럼 유닛 이코노믹스는 괜찮네요. 근데 성장 속도가 좀..." "네, 현재는 PMF 확보에 집중하고 있고요, 3분기부터 본격적으로..." "보통 그 말 들으면 우려되거든요. 3분기까지 런웨이는 되세요?" "...네, 충분합니다." 거짓말이다. 8개월 남았다. 3분기까지는 간다. 근데 그 다음이 없다. 지금 투자 못 받으면. "일단 검토해보겠습니다. 연락드릴게요." 30분 만에 끝났다. 엘리베이터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덱 문제가 아니었어.' 혼자만 아는 숫자 사무실 돌아왔다. 오후 5시. 팀원들한테 물어봤다. "오늘 미팅 어땠어요?" "괜찮았어. 관심 있어 보이더라." 웃어줬다. 팀원들도 웃었다. 속으로는 안다. 안 될 거라는 거. 그 투자자 표정 봤다. 질문 톤 들었다. 끝날 때 악수하는 느낌 받았다. 안 된다. 27번째 탈락. 노트북 열었다. 엑셀 파일. "VC 미팅 현황" 27번 줄에 적었다. "보류 (사실상 탈락)". 승률 계산했다. 18.5%. 떨어졌다. 다음 줄에 적었다. "28. K벤처스, 11/24 목요일 오후 2시". 덱 다시 열었다. 뭘 고쳐야 하지. 아내가 모르는 밤 밤 11시. 집 도착. 딸은 잤다. 아내는 거실에 있었다. "오늘도 늦었네." "응, 미팅 있었어." "어떻게 됐어?" "잘 됐어. 긍정적이었어." 거짓말이다. 또. 아내가 물었다. "투자 언제쯤 될 것 같아?" "곧. 한두 달 안에는." 모르겠다. 진짜로. 아내 표정 봤다. 믿는 척하는 얼굴. 아내도 안다. 내가 힘들다는 거. 투자 쉽지 않다는 거. 그래도 안 물어본다. 배려인지 포기인지. 방 들어갔다. 노트북 켰다. IR 덱. 버전 51. 슬라이드 7번. "Problem & Solution". 고객들의 문제. 우리의 해법. 다 맞는 얘기다. 근데 투자자들한테는 안 먹힌다. 왜지. 새벽 1시까지 고쳤다. 슬라이드 4개. 버전 52 저장했다. 내일 또 고칠 거다. 끝나지 않는 수정 금요일 오전. 팀 회의. "이번 주 고생했어요. 다들." 개발팀 스프린트 리뷰. 신규 기능 3개 배포. 버그 12개 수정. 디자인팀 화면 개선안 발표. 전환율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영업팀 리드 8개 확보. 다음주 2건 계약 가능성 높다. 다들 잘한다. 그런데 투자는 안 된다. 회의 끝나고 개발팀장이 물었다. "대표님,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괜찮아. 신경 쓰지 마." "IR 때문인가요?" "아니야. 그냥 할 게 많아서." 거짓말. IR 때문이다. 점심 혼자 먹었다. 편의점. 휴대폰 봤다. 링크드인. 또 다른 스타트업 투자 뉴스. '축하드립니다', '응원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댓글들. 우리는 언제쯤. 오후 4시. 사무실 회의실. IR 덱 프린트했다. 52번 버전. 종이로 보면 다르게 보인다. 가끔. 슬라이드 넘기면서 봤다. 1번. 타이틀. - 괜찮다. 3번. 시장 규모. - 숫자 그럴듯하다. 5번. 트랙션. - 떨어진 달 빼고는 괜찮다. 8번. 경쟁 우위. - 약하다. 계속 약하다. 12번. 팀. - 좋다. 여기는 자신 있다. 16번. Why Now. - 여전히 애매하다. 18번. Closing. - 진부하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 그런데 뭔가 빠진 기분이다. 계속. 투자자들이 원하는 게 뭘까. 숫자? 스토리? 확신? 다 있다. 우리한테. 근데 왜 안 되지. 52번 고쳤는데. 답이 없는 밤 주말. 토요일 밤. 아내랑 딸 재웠다. 거실에 혼자 앉았다. 노트북 열었다. IR 덱. 또 열었다. 슬라이드 1번부터 18번까지 봤다. 고칠 데가 없다. 아니, 고칠 데는 있다. 항상 있다. 근데 고쳐도 똑같을 것 같다. 투자자들 반응. 20% 승률. 덱을 200번 고쳐도 20%일 것 같다. 문제는 덱이 아니다. 트랙션이다. 성장성이다. 타이밍이다. 그걸 안다. 머리로는. 근데 손은 자꾸 덱을 고친다. 다른 걸 할 수 없어서. 트랙션은 당장 못 올린다. 시간이 필요하다. 성장성은 증명해야 한다. 몇 개월 더. 타이밍은 내가 정할 수 없다. 시장이 정한다. 그래서 덱을 고친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커서 깜빡인다. 슬라이드 8번. "Competitive Advantage" 다시 쓰기 시작했다. 53번째 수정.덱은 완벽에 가까워진다. 투자는 여전히 멀다. 그래도 고친다. 54번, 55번... 멈출 수가 없다.
- 05 Dec, 2025
저녁 10시, 회의실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
저녁 10시, 회의실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 혼자 남는다는 것 10시 넘었다. 팀원들 다 갔다. "대표님 먼저 가세요" 하는 소리가 제일 어색하다. 누가 먼저 가라는 건지. 나도 가고 싶다. "응, 조심히 들어가" 하고 손 흔들었다. 밝게. 리더답게. 문 닫히는 소리 세 번. 개발팀 민준이, 디자이너 수진이, 막내 기획자 예린이. 엘리베이터 소리까지 들렸다. 사무실이 조용하다.에어컨 소리만 웅웅거린다. 누군가의 자판 소리 없다. 슬랙 알림도 안 뜬다. 이제 진짜 나만의 시간이다. 회의실로 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 노트북은 그대로 뒀다. 어차피 라면 먹고 다시 볼 거다. 회의실 문을 열었다. 화이트보드에 오늘 아침 회의 때 쓴 글씨가 남아있다. "Q2 목표 MRR 2000만원". 지워야 하는데 귀찮다. 냉장고에서 생수 꺼냈다. 정수기 물은 이상하게 라면이 맛이 없다. 미신 같지만 그렇다. 서랍에 라면 3개 있었다. 신라면, 너구리, 진라면. 오늘은 신라면. 전기포트에 물 끓인다. 보글보글 소리가 크게 들린다. 낮에는 안 들리던 소리다. 3분. 타이머 맞춘다.기다리는 3분 핸드폰 본다. 슬랙 확인한다. 아무도 없다. 카톡 확인한다. 아내한테 온 메시지.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거짓말이다. 7시에 먹은 김밥 두 줄이 전부다. 그래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딸 재웠어. 아빠 보고 싶대" "미안. 주말에 놀아줄게" 이것도 거짓말일지 모른다. 토요일에 투자사 미팅 있다. 타이머가 울린다. 3분 지났다. 뚜껑 뜯는다. 김이 확 올라온다. 뜨겁다. 좋다.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면이 풀린다. 국물이 빨갛다. 첫 젓가락 후루룩. 맛있다. 이게 오늘 제일 솔직한 순간이다. 낮에는 웃었다. 투자자 앞에서, 팀원들 앞에서, 거래처 사람들 앞에서. "잘 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팀 분위기 정말 좋습니다". 다 연기다. 라면 먹을 땐 연기 안 한다. 그냥 배고픈 36살 남자다. 대표 아니다. 후루룩 또 먹는다.국물이 얼얼하다. 맵다. 땀 난다. 이마가 축축하다. 휴대폰 내려놓는다. 그냥 먹는다. 회의실 창문 밖으로 성수동 야경이 보인다. 건물에 불 켜진 곳 많다. 다들 야근하나 보다.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위로가 되나? 잘 모르겠다. 반쯤 먹었을 때 라면 반 먹었다. 국물도 반 마셨다. 핸드폰 다시 든다. 습관이다. 이메일 확인한다. 스팸 3개. VC 한 곳에서 답장 왔다. "검토 결과 공유드립니다. 현재로서는..." 그만 읽는다. 거절이다. 20번째다. 지운다. 라면 먹는다. 통장 앱 켠다. 운영계좌 잔고 6500만원. 월급 날까지 2주. 급여 4800만원. 사무실 월세 180만원. 세금 600만원. 계산한다. 남는 거 920만원. 다음 달엔 5400만원 입금될 거다. 그럼 6320만원. 다다음 달엔? 그다음 달엔? 8개월. 런웨이 8개월. 한숨 나온다. 라면 먹는다. 차가워졌다. 그래도 먹는다. 국물을 마신다 면 다 먹었다. 국물 반 남았다. 회의실 시계 본다. 10시 23분. 집 가려면 11시는 돼야 나가야 한다. 지하철 막차 시간 계산하면 그렇다. 택시 타기엔 아깝다. 1만 2천 원. 국물 마신다. 짜다. 속이 쓰릴 거다. 내일 아침 위 아플 거다. 그래도 마신다. 이게 오늘의 사치다. 3억 받았을 때 기뻤다. 팀원들이랑 고깃집 갔다. 1인당 3만 원짜리. 소주 많이 마셨다. "우리 잘될 거야" 소리쳤다. 지금은 컵라면 1500원이 사치다. 웃긴다. 웃기지도 않다. 국물 다 마셨다. 컵 바닥 보인다. 쓰레기통에 버린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휴지로 입 닦는다. 컵라면 용기 들고 탕비실 간다. 쓰레기통에 버린다. 손 씻는다. 물이 차갑다. 거울 본다. 누가 봐도 피곤한 얼굴이다. 눈 밑에 다크서클. 머리는 언제 감았더라. 그제? 모레? "괜찮아" 거울 속 나한테 말한다. "조금만 더 하면 돼"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다. 그냥 하는 말이다. 매일 하는 말이다. 회의실로 돌아온다. 노트북 들고 내 자리로 간다. 다시 일한다 모니터 켠다. 엑셀 파일 열린다. 현금흐름표다. 시나리오 세 개 있다. 보수적, 중립적, 낙관적. 보수적 시나리오 본다. 8개월 뒤 파산. 중립적 시나리오 본다. 10개월 뒤 파산. 낙관적 시나리오 본다. 12개월 뒤 손익분기점. 손가락으로 숫자 고친다. MRR 성장률 15%에서 20%로 올린다. 12개월이 10개월로 줄어든다. "이 정도면 되나" 혼잣말이다. 투자 받으면 된다. 프리A 10억만 받으면 된다. 그럼 런웨이 2년 늘어난다. 그 사이 매출 올리면 된다. 되나? 모르겠다. 키보드 친다. IR 덱 연다. 51번째 버전이다. 슬라이드 12장. "Our Traction" 페이지. 그래프 수정한다. 더 가파르게 올라가게. 거짓말은 아니다. 각도만 조정한 거다. 시계 본다. 11시 8분. 막차 놓쳤다. "아 씨..." 택시 앱 켠다. 1만 3천 원. 어쩔 수 없다. 노트북 닫는다. 가방에 넣는다. 불 끈다 사무실 불 끈다. 한쪽씩. 딸깍딸깍. 마지막 불 끄기 전에 한 번 더 돌아본다. 텅 빈 사무실. 8개 책상. 내일 아침 7시면 다시 채워질 자리들. "내일도 화이팅"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나한테? 팀원들한테? 그냥 하는 말이다. 마지막 불 끈다. 문 잠근다. 엘리베이터 탄다. 1층까지 28초.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또 본다. "괜찮아질 거야" 28번째 한 말 같다. 오늘. 택시 안 택시 탔다. 기사님이 말 안 건다. 다행이다. 창밖 본다. 한강 다리 지난다. 물에 불빛 반짝인다. 핸드폰 본다. 아내한테 메시지 보낸다. "지금 가는 중" 읽음 표시 안 뜬다. 잤나 보다. 당연하다. 11시 반인데. 슬랙 확인한다. 개발팀 민준이가 30분 전에 메시지 남겼다. "대표님 PR 머지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확인 부탁드려요. 푹 쉬세요" 착하다. 고맙다. 미안하다. "고생했어. 내일 봐" 보냈다. 창밖 계속 본다. 차 많다. 다들 어디 가나. 야근 끝나고 가나. 나만 이러는 거 아니구나. 위로가 될까? 잘 모르겠다. 집 앞 집 도착했다. 요금 냈다. 1만 3500원. 팁 포함이다. 현관문 연다. 조용하다. 불 다 꺼져있다. 신발 벗는다. 부엌 간다. 물 마신다. 냉장고 문 연다. 딸이 그린 그림 붙어있다. 아빠 얼굴. 크레파스로 그렸다. 웃고 있다. 나도 웃는다. 진짜로. 방문 살짝 연다. 아내랑 딸 자고 있다. 숨소리 들린다. 문 닫는다. 거실 소파에 앉는다. 노트북 꺼낸다. 또 켠다. 현금흐름표 다시 본다.컵라면이 식어갈 때쯤, 나는 제일 솔직해진다. 그게 하루 중 유일하게 대표가 아닌 시간이다.
- 04 Dec, 2025
아내한테 '힘들어'라고 못 하는 이유
밤 11시, 집 앞 편의점 집 앞 편의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11시 23분. 아내가 잔다. 딸도 잔다. 들어가면 조용히 씻고 누워야 한다. 그 전에 여기서 맥주 하나. 500ml짜리. 4500원. 오늘 투자자 미팅이 있었다. 세 번째 만남. "트랙션은 좋은데, 번율이 아쉽네요. 조금 더 지켜보고 연락드릴게요." 번역하면 거절이다. 알아듣는다. 이미 열두 번 들었다. 런웨이 7개월 남았다. 정확히는 214일. 매일 계산한다. 직원 8명 월급, 사무실 임대료, 서버비, 마케팅비. 합치면 월 3800만원. 매출은 1200만원. 적자 2600만원씩 쌓인다. 시드 투자금이 녹는다. 눈 녹듯이. 편의점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친다. 36살. 눈 밑이 검다. 머리는 언제 감았더라. 어제? 그제? 기억이 안 난다. 넥타이는 안 맨 지 오래다. 후드 티에 청바지. 창업가 유니폼.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묻는다. "오늘은 어땠어?" 나는 대답한다. "응, 괜찮았어." 거짓말이다. 매일 한다."어땠어?"라는 질문의 무게 아내는 똑똑하다. 대기업 마케팅팀 과장. 연봉 7800만원. 우리 집 주수입이다. 내가 창업하면서 "2년만 버텨줘"라고 했다. 2년 6개월이 지났다. 아내도 힘들다. 알고 있다. 아침 7시 출근, 저녁 8시 퇴근. 주말에는 딸 돌보기. 시댁 전화도 받아야 한다. "창업이 뭐 그리 오래 걸려?" 시어머니 말씀. 아내가 대신 받는다. "오늘은 어땠어?" 이 질문에 진짜 대답하려면. "오늘 투자 미팅 망했어. 이번 달 말까지 프리A 못 받으면 직원들 월급 못 줄 수도 있어. 런웨이 7개월 남았는데 매출 성장이 너무 느려. 경쟁사는 20억 투자받았대. 우리는 언제쯤 될까. 밤마다 현금흐름표 보면서 잠 못 자. 무섭다. 실패할 것 같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지만 못 한다. 왜냐하면. 아내도 지쳤기 때문이다. 내가 창업한다고 했을 때 아내가 말했다. "믿을게. 당신이면 할 수 있어."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배신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대답한다. "응, 괜찮았어. 미팅 잘 됐어." 거짓말. 매일.숫자로 말하기 팀원들한테는 숫자로 말한다. "이번 달 MRR 8% 성장했어. 좋은 흐름이야." "신규 고객 12개 더 늘었어. 다음 달 목표는 15개." "번율은 아직 낮지만, 개선 중이야. 다음 스프린트에서 온보딩 UX 바꾸자." 희망적으로 말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안 되니까. 월급 받는 사람들이다. 가족이 있다. 내 불안을 전염시킬 수 없다. 그런데 집에서는. 아내한테는 숫자로 말할 수 없다. "런웨이 7개월"이라고 하면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7개월 후엔?" "투자 못 받으면?" "직원들은?"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나도 모르니까. 그래서 애매하게 말한다. "일은 잘 되고 있어." "투자도 긍정적이야."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야." 구체적이지 않은 말들. 안개 같은 대답들. 아내는 눈치챈다. 알고 있다. 그래도 더 묻지 않는다. 물으면 내가 무너질까봐. 그 배려가 더 미안하다. 새벽 3시의 계산 오늘도 새벽 3시에 눈 떴다. 슬랙 확인. 알림 없음. 다행이다. 그럼 엑셀을 켠다. 현금흐름표. 시나리오 3개를 계산한다. 보수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5%. 7개월 후 프리A 실패. 직원 5명 정리. 3명만 남기고. 사무실 축소. 공유오피스에서 집으로. 런웨이 12개월로 연장. 그럼 아내한테 뭐라고 말하지. 중립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10%. 5개월 후 프리A 성공. 10억 투자. 직원 12명으로 확대. 사무실 확장. 그럼 2년 안에 시리즈A 가능할까. 낙관 시나리오: 월 매출 성장률 20%. 3개월 후 프리A 성공. 15억 투자. 직원 20명. 그럼... 그럼 아내한테 말할 수 있을까. "봐, 내가 했잖아." 세 개 다 불확실하다. 숫자만 다를 뿐 전부 추측이다. 그래도 계산한다. 안 하면 더 불안하니까. 옆에서 아내가 뒤척인다. 깬 건가. 아니다. 다시 잠든다. 나는 노트북 화면 밝기를 줄인다. 계속 계산한다. 새벽 4시까지."괜찮아"라는 거짓말 점심시간. 팀원들이랑 같이 먹는다. 성수동 식당. 제육볶음 7500원. 8명이니까 6만원. 회사 카드로 긁는다. 법인 통장 잔고 1억 2300만원. 숫자가 줄어든다. 매일. 개발팀 막내가 묻는다. "대표님, 투자는 어떻게 돼가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잘 되고 있어. 곧 좋은 소식 있을 거야." 팀원들이 안도한다. 밥을 먹는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팀원들이 불안해하면 이직 준비한다. 이미 한 명이 물어봤다. "혹시 투자 안 되면 어떻게 되나요?" 조심스럽게. 나는 대답했다. "걱정 마. 플랜 B도 있어." 플랜 B는 없다. 저녁 8시. 아내한테서 카톡 온다. "저녁 먹었어?" "응 먹었어." "언제 와?" "10시쯤?" "알았어. 조심히 와." 10시에 못 간다. 알고 있다. 오늘도 회의가 있다. 개발팀이랑 다음 스프린트 계획. 11시까지 걸린다. 그럼 집 가는 길 편의점. 맥주 한 캔. 시간 보내기. 11시 반에 들어간다. 아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기다렸다. "왔어?" "응." "힘들지?" "괜찮아." 괜찮지 않다. 하지만 말한다. 괜찮다고. 왜 말 못 하나 이유를 생각해봤다. 밤마다. 첫 번째 이유: 아내도 힘들다. 내 고민까지 떠안기면 너무 무겁다. 아내는 회사 일도 있고 육아도 있고 시댁 일도 있다. 거기에 내 불안까지 더하면 무너진다. 두 번째 이유: 가장이라는 환상.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착각. 30대 중반 가장.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불안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배웠다. 아버지도 그랬다. 세 번째 이유: 실패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힘들어"라고 말하면 "창업이 잘 안 되고 있어"라고 인정하는 거다. 그럼 진짜 실패가 된다. 말로 만들고 싶지 않다. 네 번째 이유: 해결책이 없어서. 고민을 말하면 아내가 묻는다. "어떻게 할 건데?" 나는 대답 못 한다. 모르니까. 해결책 없는 고민은 그냥 하소연이다. 투덜거림이다. 남자가 그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 다섯 번째 이유: 결정을 미루고 싶어서. "힘들어"라고 말하면 대화가 이어진다. "그만둘까?" "다시 취업할까?" "직원들 정리할까?" 그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여섯 번째 이유: 미안해서. 아내를 설득해서 창업했다. "2년만 믿어줘." 2년이 지났다. 약속을 못 지켰다. 미안하다. 그래서 더 말 못 한다. 일곱 번째 이유: 자존심. 네이버 PM 5년 하고 나왔다. 연봉 9000만원 받았다. 사람들이 말했다. "너 잘될 거야." "능력 있잖아." 그 기대를 저버리기 싫다. 특히 아내한테. 여덟 번째 이유: 혼자 버티는 게 익숙해서. 어릴 때부터 그랬다. 고민은 혼자 한다. 해결도 혼자 한다. 도움 청하는 거 어색하다. 그게 몸에 배었다. 진짜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다 섞인 거겠지. 아내는 알고 있다 어제 아내가 말했다. 자기 전에. 불 끄고. 어둠 속에서. "창업 그만둬도 괜찮아." 나는 대답 못 했다. 한참 후에 말했다. "아직 아니야. 조금만 더 해볼게." 아내가 말했다. "힘들면 말해. 혼자 버티지 말고." "응. 알았어." 거짓말이다. 또. 아내는 알고 있다. 내가 힘든 거. 숫자는 몰라도 분위기는 안다. 새벽에 깨는 것도 알고. 편의점에서 시간 보내는 것도 알고. 맥주 마시고 들어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더 묻지 않는다.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미안하다. 딸의 질문 이번 주 일요일. 드물게 집에 있었다. 딸이 물었다. 3살. 말이 트였다. "아빠, 왜 항상 피곤해?" 나는 웃었다. "피곤한 게 아니야. 아빠 일하는 거야." "일은 왜 해?" "응... 돈 벌려고." "돈은 왜 벌어?" "너 키우려고. 맛있는 거 사주려고." 딸이 말했다. "난 아빠가 같이 놀아주는 게 좋은데." 할 말이 없었다. 3살 애가 맞는 말을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러는가. 가족을 위한다면서 가족과 시간을 못 보낸다. 딸은 자란다. 매일. 나는 그걸 놓치고 있다. 아내가 옆에서 봤다. 아무 말 안 했다. 표정으로 알았다. "봐, 나만 힘든 게 아니야. 딸도 힘들어." 미안했다. 딸한테도. 아내한테도. 그래도 변하지 못한다. 월요일 되면 또 출근한다. 새벽 7시. 투자자 앞에서는 투자자 미팅 때는 다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저희 MRR은 매달 평균 12% 성장하고 있습니다. 번율은 현재 38%지만 다음 분기 60%까지 개선할 계획입니다. TAM은 3조 규모로 추정되며 저희가 선점할 수 있는 시장은..." 자신감 넘친다. 데이터를 보여준다. 그래프는 우상향이다. 고객 사례를 말한다. "A사는 저희 솔루션 도입 후 업무 효율 40% 개선했습니다." 투자자가 묻는다. "경쟁사는 20억 투자받았는데 어떻게 대응할 건가요?" 나는 웃는다. "저희는 차별화된 기술력이 있습니다. 특허 출원 완료했고요. 경쟁사보다 2년 앞섰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과장이다. 2년은 아니다. 6개월쯤? 하지만 투자자 앞에서는 확신에 차서 말한다. 미팅 끝나고 나온다. 엘리베이터 탄다. 혼자.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방금까지 웃었던 얼굴. 지금은 지쳤다. 연기 끝났다. 집에 가면 또 연기한다. "괜찮아." 회사 가면 또 연기한다. "잘 되고 있어." 어디서도 진짜 나를 보여주지 못한다. 창업 동기 모임 한 달에 한 번. 창업 동기들 만난다. 5명. 다들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거기서만 솔직해진다. "런웨이 얼마 남았어?" "6개월." "나는 4개월." "투자는?" "다 거절당했어." "나도." 웃는다. 쓴웃음. 그래도 웃는다. 같이 힘드니까 덜 외롭다. 한 명이 말한다. "와이프한테 말 못 하겠어. 힘들다고." 다들 고개 끄덕인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우리 와이프는 눈치챘어. 근데 더 안 물어봐." "그게 더 미안하지." "맞아." 소주 마신다. 과음하지는 않는다. 내일 또 일해야 하니까. 10시 되면 헤어진다. "다음 달에 봐." "그래. 버티자." 집 가는 길. 조금 덜 외롭다. 한 시간쯤. 그리고 다시 혼자다. 부모님 전화 아버지한테 전화 왔다. 일요일 저녁. "창업 언제까지 할 거냐." "조금만 더요." "조금이 얼마냐. 벌써 2년 넘었다." "투자 받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투자가 그렇게 쉽게 되냐. 내가 보기엔 안 될 것 같은데." "..." "다시 취업 알아봐라. 네이버 있을 때가 좋았다. 연봉도 많이 받고." "아버지." "뭐."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하다가 망하면 어쩔 건데. 애도 있고 와이프도 있는데." "..." 끊었다. 예의는 아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더 듣기 싫었다. 아버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현실적이다. 합리적이다. 그래서 더 듣기 싫다. 나도 같은 생각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밤 11시 30분, 또 편의점 오늘도 편의점이다. 집 앞. 11시 30분. 아내 잔다. 딸도 잔다. 들어가야 한다. 조금만 더. 맥주 한 캔 더. 편의점 알바생이 나를 안다. "또 오셨네요." "응." "힘드세요?" "아니. 괜찮아." 거짓말. 또. 창밖을 본다. 우리 집 불이 꺼져 있다. 22평. 전세 3억. 아내 회사 대출로 얻었다. 내 신용으로는 안 됐다. 창업하면서 신용등급 떨어졌다. 내년에 전세 만기다. 집값 올랐다. 3억 5000만원 될 거다. 5000만원 더 구해야 한다. 어떻게 구하지. 투자 받으면 가능하다. 못 받으면? 모르겠다. 계산한다. 또. 머릿속으로. 런웨이 214일. 일 평균 적자 86만원. 프리A 목표 금액 12억. 확률은? 30%? 40%? 모르겠다. 맥주를 마신다. 500ml. 다 마셨다. 일어난다.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는 길 현관문 연다. 조용히. 신발 벗는다. 소리 안 나게. 거실 지난다. 소파에 뭔가 있다. 이불이다. 아내가 덮어놨다. 나 챙긴 거다. 미안하다. 또. 침실 문 연다. 아내 잔다. 딸도 옆에서 잔다. 평화롭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 내가 힘들게 하고 있는 것들. 씻는다. 조용히. 눕는다. 아내 옆에. 등을 보고. 아내가 뒤척인다. 깨진 않았다. 습관적으로 내 쪽으로 몸을 기댄다. 따뜻하다. 말하고 싶다. "힘들어." "무서워." "잘될 수 있을까." "도와줘." 하지만 못 한다. 오늘도. 언젠가는 말할 것이다. 언제일까. 성공하고 나서? 아니면 실패하고 나서? 그것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눈을 감는다. 내일 또 새벽 3시에 깰 것이다. 슬랙 확인하고. 엑셀 켜고. 계산하고. 그렇게 버틴다. 오늘도.힘들다고 말 못 하는 게 더 힘들다. 그걸 아내도 안다. 나도 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 않는다. 아직은.